# 279
<귀환무사 279화>
귀환무사 2부
54화
테세우드 공작이 말 머리를 돌려 분주하게 움직이는 병사들에게로 다가갔다.
기사들이 동작을 멈추고 머리를 숙이자 그는 손을 들어 괜찮다는 시늉을 보였다.
그는 빠르게 자리를 잡아 가는 평원을 둘러보며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중앙에 거대한 막사가 세워지고 있었다.
자신과 수뇌부가 기거할 사령부였다.
“드디어 시작이군…….”
그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한동안 평원을 바라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 * *
베린스 공작은 참담한 표정으로 머리를 숙였다.
그의 앞에는 황금색 갑주를 걸친 날카로운 인상의 인물이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응시하며 앉아 있었다.
“면목이 없습니다!”
“아까운 기사들 수백이 죽었다. 게다가 최고의 전마들 천 마리가 먼지로 화해 소멸되었다. 도대체 일 처리를 어떻게 한 것이냐!”
베린스 공작은 대답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지금 그를 질책하는 인물은 요란 제국 최강의 무인이자 황제의 아우이며 최강의 전투 부대라는 1군단의 군단장을 맡고 있는 케이시 공작이었다.
공작이라고 다 같은 공작이 아니다. 케이시 공작은 요란 제국에서 대공으로 인정하는 위인이었기에 베린스 공작의 목숨은 그의 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케이시 공작의 좌우에 시립한 인물들이 검집에 손을 가져갔다.
명령이 떨어지면 베린스 공작은 그 자리에서 목이 떨어져 죽어야만 한다. 요란 제국의 군율은 엄격하기로 세상에 정평이 나 있었다.
공작이라도 군율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곳이 요란 제국이다.
“발록을 닮은 생명체라고 했느냐?”
“그렇습니다!”
“책에도 나와 있지 않은 존재가 이곳에 나타났나니…….”
케이시 공작은 화제를 슬쩍 돌렸다.
비록 베린스 공작이 참수형에 해당하는 피해를 입었지만 그를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몇 안 되는 마스터이자 황제가 꽤 아끼는 인물이 바로 베린스 공작이다.
물론 케이시 공작, 자신도 그를 상당히 신임하고 있었다.
“베린스!”
“예! 군단장님!”
“기사들을 풀어 놈의 시신을 찾아오라! 시신을 본국으로 보내 상세하게 조사해야겠다.”
케이시 공작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는 좌우를 시립한 장수들을 슬쩍 쳐다보고는 단호한 어조로 베린스 공작에게 말했다.
“테세우드, 놈이 산맥의 건너편에 도착했다. 반드시 전공을 세워 이번의 실수를 만회하라! 알겠느냐!”
“용서에 감사드립니다! 군단장님!”
베린스 공작이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케이시 공작이 좌우의 장수들을 데리고 밖으로 서둘러 나섰다.
쑥대밭이 되었던 주둔지는 어느새 말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게다가 십만에 이르는 대병력이 그곳을 차지하고 있었다.
검은색 독수리가 수놓아진 거대한 깃발들이 주둔지의 곳곳에서 바람에 펄럭였다. 요란 제국 최강의 전투 부대인 1군단을 상징하는 부대기를 보며 케이시 공작은 눈빛을 발했다.
“테세우드! 네놈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겠다!”
숙적에 대한 분노는 테세우드 공작만큼이나 케이시 공작도 강렬했다.
* * *
“저곳입니다!”
써튼이 손을 들어 북쪽을 가리켰다.
거대한 산맥의 초입에 들어선 그들은 산으로 올라서는 길을 발견하고는 재빨리 그곳으로 이동했다.
“엄청나군요.”
진천이 고개를 들어 산맥을 올려다보며 탄성을 자아냈다.
중원에서 최대의 산이라는 천산도 이곳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어찌나 넓은지 산맥의 좌우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으며 높이는 구름으로 인해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맹수들의 천국이라 불릴 만하군. 이거 어디 사람이 살 수 있겠어?”
“이곳에 드래곤인가 하는 놈의 집이 있다며?”
왕전의 물음에 써튼이 나섰다.
“드래곤의 레어는 전설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직 그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쉽군. 있다면 놈의 가죽이 얼마나 두꺼운지 알아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왕전은 자신의 대도를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북궁천소도 같은 표정이다. 써튼과 우드는 그런 둘을 바라보며 내심 혀를 내둘렀다.
어쩌면 저 존재들은 정말로 드래곤과 맞짱을 뜨고도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진짜 드래곤이던가.
일행은 빠르게 산을 타고 올랐다.
그러나 조금을 더 들어가자 말에서 내려야만 했다.
워낙 지형이 가파르고 험악해 말을 타고 이동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혁련천후는 말들을 묶어 두지 않고 자유롭게 놓아주었다.
“여기 잠시만 계십시오! 제가 주변을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우드가 나섰다.
확실히 우드는 변해 있었다. 스스로 자원하는 것은 지금껏 없었던 일이다.
“그러지.”
혁련천후가 고개를 끄덕이자 우드는 플라이 마법을 시전하여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모두가 깜짝 놀랐다.
“어! 제법인데?”
“상당한 경공이군. 저 정도면 꽤 대단한데 지금껏 힘을 숨기고 있었단 말인가?”
조윤이 중얼거렸다.
“숨긴 것이 아니다. 마음이 풀어지니 가진 능력이 나오는 것일 뿐이겠지.”
그렇다.
우드는 지금껏 이들 앞에서 별다른 것을 보여 주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고 봐야 했다.
워낙 두려운 존재들이라 주눅이 든 것도 있었고, 자기보다 강한 존재 앞에선 자신의 힘을 드러내기를 꺼리는 인간 본연의 습성 때문이기도 했다.
우드는 금방 돌아왔다.
“엄청난 병력이 산맥의 앞뒤로 주둔하고 있습니다.”
“숫자는?”
“각각이 대략 십만쯤으로 보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양측 모두가 기병이라는 것입니다.”
담대소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대명의 도독이었다. 당연히 누구보다 군제에 밝았다.
“대단하군…….”
기병 십만은 그야말로 엄청난 전력이다.
그 자신도 오만의 기병을 이끈 전력이 있었다. 그 오만으로도 변방을 괴롭히던 돌궐과 북원의 잔당들을 휩쓸고 다녔지 않았던가.
혁련천후는 담담했다.
어차피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다만 지금부터 흑안의 마검사라 소문난 인물들의 흔적을 찾는 것이 문제였다. 만약 그들이 자신의 아들과 흑야라면 이 산맥 어딘가에 흔적이 남아 있을 것이다.
모두는 그를 따라 눈앞에 펼쳐진 평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 평원에서 흑안의 마검사들이 활약했다는 정보를 써튼이 얻어 냈다.
그래서 그들은 그곳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그들의 흔적을 찾고자 한 것이다. 넓은 평원을 살피려면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는 막연한 방법이지만 현재로선 그것이 최선이었다.
앞서 걷던 혁련천후의 미간이 슬쩍 구겨졌다.
조윤이 다가오며 말했다.
“벌써 전투가 벌어졌던 모양입니다.”
모두는 걸음을 멈추고 평원을 바라보았다.
죽은 자들의 시신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대부분이 시커멓게 탄 채로 죽어 있었는데, 몬스터들의 시신들과 뒤섞여 참혹한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혁련천후의 눈동자에 착잡함이 떠올랐다. 그의 속내를 짐작한 조윤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평원의 다른 지역을 찾아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쑥대밭이 되어 버린 이곳은 흔적을 찾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북궁천소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엄청난 화공에 당했군. 이건, 오래 타서 녹아든 게 아니고 순식간에 녹아서 죽은 흔적인데…… 괴물에게 당한 것인가?”
“전에 보았던 그, 불을 뿜어 대던 새 말이다. 그놈 짓이 아닐까?”
“글쎄…….”
조윤이 슬쩍 인상을 그리고는 북궁천소와 왕전에게 입을 닫으라는 시늉을 보냈다. 흔적을 찾기가 요원해진 혁련천후의 마음을 헤아린 것이다.
“모두 흩어져서 찾는다.”
혁련천후는 평원의 다른 쪽을 응시하며 그렇게 말했다.
모두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잠시 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모두는 스스로를 자책하고는 세 방향으로 인원을 나누었다.
이틀 후에 이곳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조한 그들은 이내 각각의 방향으로 몸을 날려 사라졌다.
* * *
레이나 공주는 저 멀리 끝없이 펼쳐진 군막들을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녀로서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테세우드 공작이 오지 않기를 그토록 바랐건만 결국 그가 직접 오고야 만 것이다.
“공주마마! 이곳에서 기다리십시오. 제가 전령을 보내어 마중을 나오라 전하겠습니다.”
마차 밖에서 헤론 후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마차가 멈추었다.
기사 하나가 말을 몰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레이나 공주는 거울을 보며 머리와 옷매무새를 고쳤다.
제국의 공주로서 위엄을 잃고 싶지는 않았던 그녀는 부친인 황제가 선물한 검을 가슴에 안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자신의 정적인 테세우드에게 충성하는 자들이 무려 십만이나 자신의 눈앞에 펼쳐져 있자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마마! 마음을 굳게 하세요.”
시녀가 그녀의 옷매무새를 다시 고쳐 주며 힘주어 말했다.
가늘게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에 주둔지의 중앙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자들이 잡혔다. 헤론 후작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테세우드 공작입니다.”
예상 밖이었다.
참모장 정도를 보낼 줄 알았는데 직접 오다니.
테세우드 공작을 태운 전마는 무척이나 빨랐다. 전령보다 더 빨리 그녀 앞에 도착한 그는 말에서 내려 한쪽 무릎을 꿇었다.
“공주마마를 뵙습니다.”
“수고가 많으시군요. 언제나 공작의 노고에 감사드리는 바예요.”
“제국과 폐하를 위해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원로에 피곤하실 터이니 속히 모시겠습니다.”
레이나 공주를 대하는 테세우드 공작의 태도는 무척이나 공손했다. 하지만 그 내면에 감추어진 날카로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레이나로서는 결코 진심으로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다시 마상으로 오르던 테세우드 공작과 헤론 후작의 눈길이 서로 마주쳤다. 헤론 후작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예를 취했다.
순간 테세우드 공작의 눈동자에 섬광이 맺혔다가 사라졌다.
“마마를 모신다고 수고가 많네.”
“각하께 비할 바는 아니지요.”
오고가는 말은 따뜻했다. 그러나 그 안에 숨어 있는 날카로움은 언제든 서로의 심장을 겨눌 것이다. 추구하는 세상이 다르고 모시는 대상이 다르다.
같은 제국에 태어난 것을 서로가 후회하는 그들이다. 적이었다면 벌써 생사 결판을 내었을 그들은 운명 때문에 서로에게 쑤셔 넣을 칼날을 일부러 감추고 있을 뿐이었다.
“충!”
우렁찬 군례에 주둔지가 들썩거렸다.
군영에 들어서자 모든 기사들과 병사들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부동자세를 취했다. 제국 최강의 돌격 부대라는 명성답게 그들은 하나같이 용맹스러움을 풀풀 풍겨 냈다.
레이나 공주는 내심 착잡함이 더해만 갔다.
자신의 아버지와 자신에게 충성을 해야 할 이들이다. 그러나 지금 이들이 충성하는 대상은 테세우드 공작이다. 어쩌면 미래에 자신에게 창과 검을 겨눌 수도 있는 자들이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군례를 하고 있었다.
‘대단해…….’
느껴지는 강력함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두 주먹을 꼭 쥐었다.
마차는 주둔 지역을 한 바퀴 돈 다음에야 중앙 막사로 이동했다. 레이나 공주는 테세우드 공작이 안내하고 돌아간 군막에 시녀와 함께 들어섰다.
헤론 후작과 기사들은 그녀의 군막, 앞쪽에 세워진 별도의 군막으로 들어갔다.
“역시 철저한 위인이구나.”
군막 안은 상당히 깔끔하고 세련되게 치장되어 있었다.
마치 자신이 오늘 이 시각에 방문하는 것을 알았다는 듯, 자신의 취향에 딱 맞게끔 준비되어 있자 새삼 테세우드 공작의 무서움을 그녀는 실감했다. 자신이 그의 손바닥 위에서 논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잘 거야. 나중에 깨워 줘.”
그녀는 입은 그대로 야전 침대에 몸을 눕혔다. 솟구치는 짜증으로부터의 탈출구로 잠을 선택한 그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