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8
<귀환무사 278화>
귀환무사 2부
53화
“깍! 누가 누굴 쫓았다고 그래. 여긴 내 땅이야. 내가 다스리는 왕국이란 말이야.”
“몬스터가 인간의 말을 하다니, 확실히 수상한 놈입니다.”
“깍! 말조심해! 인간아! 누가 몬스터란 말이야!”
큰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고서 발끈하는 모습에 혁련소는 피식 웃었다.
생김새는 그 무시무시하다는 발록이지만 하는 짓과 목소리는 영락없는 애였다.
흑야가 다시 검을 겨누었다.
“정체가 뭐냐니까?”
“날 죽일 거야?”
“말하지 않으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니 냉큼 대답해라.”
흑야의 눈을 빤히 응시하던 카루가가 갑자기 눈물을 뚝 흘리더니 이름을 밝혔다.
“카루가, 그게 내 이름이야.”
“이름 말고 신분을 밝혀라.”
“나는 마계의 왕자야. 물론 지금은 쫓겨난 신세지만…….”
둘이 흠칫했다.
마계의 왕자라니.
카루가가 고개를 숙이며 우울한 표정을 짓는다. 흑야가 다시 물었다.
“신계와 대립한다는 그 마계를 말하는 것이냐?”
“그럼 마계가 다른 곳에도 있었어?”
흑야와 혁련소는 다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저 지어 낸 이야기로만 여겼던 신계와 마계다.
그런데 그곳의 왕자라는 존재가 눈앞에 있다. 물론 둘은 이내 카루가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혁련소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카루가에게 물었다.
“너, 발록과는 무슨 사이야?”
카루가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악을 썼다.
“그놈은 나쁜 놈이야. 나를 쫓아낼 때, 그놈이 제일 앞장섰다고. 아주 악질이야! 덩치만 큰 무식한 들소 같은 자식!”
“……뭐?”
“놈의 채찍도 내가 선물을 해 준 거라고. 은혜도 모르는 망할 자식!”
성이 나서 얼굴까지 벌게진 채 씩씩거리는 카루가를 보며 혁련소는 눈이 동그래졌다.
[진짜 같은데요?]
[…….]
흑야가 다시 물었다.
“그 상처는 뭐냐?”
“인간들하고 싸우다가 너희들한테 정신이 팔렸어. 그때 입은 상처야. 그러니까 따지고 보면 너희들 때문에 이렇게 된 거지.”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자 흑야가 대뜸 싸늘한 기운을 발산하며 검을 겨누었다.
“알아듣기 쉽게 말을 해라, 꼬마.”
“잘 알아들으면서 뭘 그래!”
“……그러니까,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자초지종을 말하는 거다.”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말을 하던가.”
카루가가 삐친 아이처럼 심드렁하게 노려보자 흑야도 어이가 없어 피식 웃고 말았다.
혁련소가 거들고 나섰다.
“거짓말 없이 다 말해 주면 너를 해치지 않는다. 원한다면 약속을 해 줄 수도 있다.”
“진짜야?”
“진짜다.”
“약속할 수 있어?”
“약속한다.”
카루가가 돌연 해죽 웃더니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과 자신의 능력에 대해 털어놓기 시작했다.
듣는 내내 둘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
이토록 연약해 보이는 카루가가 그토록 엄청난 힘을 지녔다니.
카루가의 말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 * *
‘나쁜 인간들은 아니야.’
카루가는 흑야와 혁련소를 보며 마음이 놓였다.
발각되었을 때, 꼼짝없이 죽음을 당하는 줄 알았었다.
사실 카루가는 원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죽으면 다시는 환생이 불가능한 처지가 되었다.
마계에서 쫓겨날 때, 왕족들의 권리를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두려웠던 카루가는 말을 늘어놓는 내내 둘을 처치할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둘의 눈빛을 통해 내면을 읽은 카루가는 그들이 자신과 싸웠던 인간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생각을 바꿔 당분간 이들과 함께하기로 마음먹었다.
“궁금해. 어떻게 인간이 그런 기운을 지니고 있는 거지?”
카루가는 흑야를 보며 눈을 반짝거렸다.
“쓸데없는 호기심은 명을 단축시키는 법이다, 꼬마. 상처부터 치료를 해야 하니 냉큼 일어서라.”
“필요 없어.”
“죽고 싶은 거냐?”
“그냥 두면 저절로 상처는 아무니까 내버려 두라고.”
“……뭐?”
“난 너희 인간들하고는 달라. 그러니까 신경 끄란 말이야.”
사실이었다.
벌어졌던 상처들과 관통상으로 보였던 구멍들이 그 짧은 시간에 제법 많이 아물어 있었다. 둘은 상당히 놀랐다.
스스로 치료하는 신체는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카루가 둘을 향해 말끝을 흐렸다.
“저기, 부탁이 있는데…….”
“뭐냐?”
“나 배고파.”
둘은 어이가 없어 다시 웃었다.
혁련소가 장난처럼 물었다.
“뭘 잡아 줄까? 오크나 고블린, 뭐 이런 거 몇 마리 잡아다 주면 될까?”
“내가 괴물이야? 그런 걸 먹게.”
“넌, 마계의 왕자라며?”
“마계의 왕자는 그런 거 먹는다는 소릴 누구에게 들었어?”
혁련소는 순간 머쓱했다. 당연히 들은 적이 없다. 그냥 마계의 왕자는 괴물로 인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괴물은 당연히 몬스터를 주식으로 하니까…….
“난, 과일 아니면 안 먹어.”
카루가가 몸을 세웠다.
흐르던 피도 멈추었고 상처도 완벽하게 나아 있었다. 다소 흐렸던 눈빛도 반짝반짝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 완벽한 상태로 회복한 듯 보였다.
분노해서 베린스 공작의 병사들을 화염으로 쓸어버릴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카루가가 성큼 앞으로 걸었다.
“난 갈 거야!”
“어디로?”
“내 집으로.”
“그건 곤란한데?”
흑야가 그 앞을 막아섰다.
“왜?”
“널 놔주면 곤란한 일이 생길 것 같거든…….”
“놔준다고? 깍! 내가 그럼 너희들에게 잡힌 거야? 그런 거냐고?”
“비슷하지.”
카루가가 그 자리에서 팔짝 뛰었다. 그의 육신이 황금색 광채로 둘러졌다. 흑야의 눈동자가 이내 차가운 기운을 품었다.
스르릉!
새파란 광채를 두른 그의 검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난, 덤비는 놈을 지금껏 살려 준 적이 없어. 그러니 생각 잘 해.”
“변신하면 넌 죽어! 그래도 나와 싸울 거야?”
“얼마든지…….”
카루가의 눈이 흑야의 손에 쥐어진 검을 향했다. 카루가는 왠지 그 검이 마음에 걸렸다.
“끙…….”
펄펄 날뛰던 카루가가 신음을 내며 힘없이 주저앉았다.
사실 카루가는 흑야와 혁련소가 두려웠다. 변신을 하고 싸워도 이길 거란 자신이 서질 않는다.
‘쳇! 정말 무서운 인간이구나. 저 검에 깃든 마나로 나를 소멸시키겠지? 죽으면 환생이 불가능한데…….’
결국 이기지 못할 거라는 생각보다는 죽으면 영원히 환생이 불가능한 자신의 처지에 발목이 잡힌 것이었다.
“그럼 이제부터 너희들과 같이 있어야 하는 거야?”
“당연하지. 그리고 그 말투도 고쳐!”
“어떻게?”
“항상 뒤에다 요 자를 넣어.”
“왜?”
“왜요라고 해라.”
“알았다…….”
흑야의 찌릿한 눈길을 받은 카루가는 다시 대답했다.
“알았다요.”
지켜보던 혁련소는 웃음을 머금고 카루가를 바라보았다. 예측이 불가능한 카루가는 미지의 생명체와도 같았다. 흑야가 걸음을 놓았다.
그를 빤히 쳐다보던 카루가도 고개를 숙이고는 힘없이 뒤를 따랐다.
혁련소가 가장 뒤쪽에서 걸었다.
묘한 동행이 시작되었다. 칙칙했던 하늘이 화창하게 밝아지며 따뜻한 태양빛이 산맥을 비추었다.
풀이 죽었던 카루가는 숲에 널린 과일로 배를 채우면서부터 조금씩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둘에게 지옥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한 번 터진 카루가의 입은 닫힐 줄 몰랐다. 둘은 괜히 데려왔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언제 놔줄 거요?”
“말투 고쳐!”
“요 자를 넣으라며…… 요?”
“소.”
“예.”
“교육 좀 시켜라, 아니면 아혈을 짚든가.”
“아혈이 뭐야요?”
쳐다보는 카루가의 눈망울이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 * *
두두두두…….
대지가 흔들렸다.
케논 산맥을 향하는 길목에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평원이 펼쳐졌다. 그리고 그 위를 질주하는 대병력은 무려 십만에 달했다.
모두가 기병이었다.
십만 마리의 전마들은 거침없이 평원을 달렸다. 평원의 좌우측을 두르고 있던 울창한 수림은 두려움에 몸을 떠는 몬스터들의 비명으로 가득했다.
두려움을 모른다는 오크들도 행여나 기병들의 눈에 띌까 두려워 빛이 없는 숲속으로 몸을 숨기기 바빴다. 하늘의 제왕이라는 와이번들도 감히 전마들을 사냥하지 못했다.
그만큼 그들의 기세는 대단했다.
전마들이 질주하는 전방에 천년설로 옷을 입은 케논 산맥이 웅장한 자태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뿌우웅!
나팔 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대지를 가를 듯 질주하던 전마들이 일제히 속도를 늦추며 질주를 멈추었다. 은빛 갑주에 붉은색 흉갑을 두른 인물이 앞으로 나섰다.
역시 같은 복장을 한 인물들이 그를 좌우에서 호위하며 따랐다. 거대한 깃발을 든 기사가 그들의 뒤쪽에 섰다.
거대한 깃발엔 황금색 독수리가 새겨져 있었다.
“각하! 이곳에 군단이 주둔할 병영을 설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좋다! 그렇게 하도록!”
“예! 각하!”
장수 하나가 말 머리를 돌려 기병들에게로 돌아갔다. 그가 명령을 내리자 십만에 달하는 병력들이 대지로 내려서며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법사들이 지나가는 자리엔 어김없이 철통같은 결계가 쳐졌다. 간혹, 멋모르고 뛰어들던 들짐승들이 그대로 죽어 나갔다.
경계 차원을 넘어서 결계 자체가 하나의 강력한 살상 무기였다.
짧은 수염이 무척이나 강인해 보이는 인물은 한동안 케논 산맥을 응시하며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주변을 호위하며 선, 장수들도 하나같이 무시무시한 기운을 발산했다.
그들은 십만 대군이 있음에도 주변을 날카롭게 경계하며 호위에 만전을 기했다. 이들의 호위 속에 케논 산맥을 바라보는 인물은 과연 누굴까?
테세우드 공작.
그렇다.
대륙에 셋뿐인 초인이자 각 제국의 황제들을 제외하고 대마법사를 거느린 유일무이한 존재가 바로 그였다.
태양빛을 받아 번쩍이는 은빛 갑주가 눈부신 광채를 발산했다. 대마법사의 실드가 쳐진 갑주는 그를 무적의 반열에 올려놓은 일등 공신이다. 드래곤 본으로 만들어진 그레이트 소드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을 베어 버리는 가공할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 우선하는 것은 테세우드, 자신의 냉철함이다.
어려서부터 제왕 수업을 받아 온 그였기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병법이 그의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진 냉철한 판단력과 결단력이 그를 전쟁의 신이라 부르게 만든 것이다.
테세우드 공작의 입술이 느릿하게 벌어졌다.
“요란 제국이라…….”
평생의 숙적, 요란 제국과의 전쟁이 눈앞에 다가왔다.
물론 자신이 원하던 상황이다. 유약한 황제는 언제나 온건 정책만을 선호했다. 국경 지역이 조금씩 적국에 먹히는 상황에서도 황제는 전쟁을 기피했다.
케논 산맥을 침범한 요란 제국의 전투 부대를 진압하기 위해서도 황제와 치열한 신경전을 벌인 뒤, 지금에서야 직접 군사를 이끌고 당도한 것이다.
“레이나 공주는 어디 있느냐?”
“이곳으로 오고 있는 중입니다.”
“헤론이 함께한다고?”
“그렇습니다! 명령만 내려 주시면 당장, 놈을 잡아 오겠습니다!”
테세우드 공작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부폰!”
“예! 각하!”
“헤론은 뛰어난 무장이다. 평화 시에는 모르나 전시에는 그 누구보다 유용한 자원이 헤론이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를 다치게 하는 일은 없도록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