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3
<귀환무사 273화>
귀환무사 2부
48화
“후작님! 인근 도시로 들어가요. 그곳에서 공작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겠어요.”
“조금 더 이동하면 그랜트 백작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그곳으로 가시지요.”
“그랜트 백작이라면 제3기병사단의 사령관이라는 그분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몇 안 되는 제국의 충신이지요. 그라면 공주마마를 환영할 것입니다.”
“좋아요, 그곳으로 가요.”
레이나 공주는 다시 마차로 들어갔다.
헤론 후작이 다시 전진을 명령하자 행렬은 이동을 재개했다.
* * *
써튼이 돌아왔다.
공주와 헤론 후작만의 대화였기에 아무런 정보도 얻질 못한 써튼은 북궁천소와 왕전의 험악한 눈초리를 피해 행렬의 후미로 슬그머니 물러났다.
그때 흑마법사가 작은 음성으로 말했다.
“방향이 바뀌는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저쪽은 케논 산맥을 향하는 방향이 아닙니다. 키토라는 도시로 이어진 길인데…….”
조윤이 혁련천후를 돌아봤다.
혁련천후가 눈빛으로 대답하자 그는 다시 써튼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상황을 짐작한 써튼이 부리나케 앞으로 말을 몰았다. 써튼은 금방 다시 돌아왔다.
“키토로 가신답니다!”
“케논 산맥은?”
“그냥 키토로 가신다고만 하셨습니다.”
조윤이 다시 혁련천후를 응시했다. 우측으로 방향을 트는 마차를 응시하며 가볍게 미간을 찌푸린 혁련천후는 조윤에게 지시했다.
“이쯤에서 헤어지는 것이 좋겠군. 직진한다!”
“알겠습니다. 이봐! 넌 가서 헤론인가 하는 작자에게 전해. 우린 캐논 산맥으로 간다고 말이다.”
“넵!”
써튼이 다시 말을 몰아 헤론 후작에게로 달려갔다.
그가 헤론에게 말을 건네자 헤론이 뒤를 돌아봤다. 마차가 멈추면서 헤론이 말머리를 돌려 혁련천후 등에게로 다가왔다.
모두는 눈빛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 눈빛을 죽이지 못한 북궁천소와 왕전은 먼 산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은 지금 위험하다! 그러니 다른 곳으로 가든가, 아니면 우리와 키토로 들어가는 게 좋겠다.”
[일 때문에 그곳으로 간다고 전해.]
써튼은 귓속을 울리는 가느다란 음성에 흠칫 놀라고는 뒤를 돌아봤다. 혁련천후의 차가운 눈빛을 본 그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저흰 볼일이 있어 그곳으로 가야만 합니다. 함께하지 못함을 용서하십시오, 후작 각하!”
“어허! 자칫하면 모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단 말이다. 그리고 곧 출입 금지령이 떨어질 것이다. 괜한 헛수골랑 말고 생각을 바꿔라!”
[산맥 근처까지만 간다고 해.]
“저희는 산맥 근처까지만 가면 됩니다. 위험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럼!”
헤론 후작은 더 이상 그들을 만류하지 않았다.
다른 귀족들 같았으면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고 성을 냈겠지만 그는 그런 종류의 위인이 아니었다. 그는 써튼에게 조심하라는 말을 건네고는 마차로 말을 몰아 돌아갔다.
곧 마차가 우측으로 길게 뻗은 길을 따라 상당히 빠른 속도로 사라져 가자 진천과 사공진무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주공! 속도를 내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게 해라.”
“자! 우리도 전속력으로 달린다!”
두두두두…….
라이트 마법이 걸린 말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질주를 시작했다. 그리고 짧은 시간에 그들은 그곳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우르릉!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이내 천둥이 울렸다. 뒤이어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쏴아아!
* * *
“흐흐흐…….”
챙!
“멈춰!”
악마의 속삭임과도 같은 섬뜩한 미소에 아리안은 검을 뽑아 들었다.
허리띠처럼 하늘거리던 그것은 지독한 검강을 품으며 독을 머금은 독사처럼 머리를 치켜세웠다.
주변을 둘러보니 자신과 함께했던 사람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런 아리안을 향해 로브를 뒤집어쓴 사악한 마법사가 다가왔다.
“누구냐!”
“흐흐! 너를 악마의 성지로 데려 갈 사자이니라.”
“닥쳐라! 더 이상 다가오면 벨 것이다!”
아리안의 손에 쥐어진 검이 검강을 뿜어냈다. 그때 어디선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민! 소민!”
아리안은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아름다운 눈동자가 크게 흔들린다.
누군가 자신을 부르고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다가오던 마법사에게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그 존재도 사라지고 없었다. 불안감이 밀려든다. 미지의 세상에 대한 두려움은 이미 그녀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
“소!”
누군가를 애타게 불렀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메아리뿐이다. 절망이 밀려오며 그녀의 두 다리에서 힘을 빼앗아 가 버렸다.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무릎에 고개를 묻은 그녀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여인의 주변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핀 그녀는 백색의 성을 발견하고는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이야! 이곳으로 오너라.”
허공에서 공명이 들려온다.
너무나도 인자하게 생긴 백발의 노인이 자신에게 손짓을 보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마음이 포근하게 녹아든다.
성으로 걸음을 옮기는 아리안의 모습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탐스럽던 흑발은 점점 화려한 금발로 바뀌어 갔으며, 아이의 그것처럼 새카맣게 빛나던 눈동자는 벽안으로 변해 갔다.
“아리안…… 내 이름은 아리안이야.”
갑주를 걸치고 그레이트 소드를 든 여인은 환하게 웃었다.
성의 첨탑에 올라 세상을 내려다보며 그녀는 과거의 자신을 잊었다. 드넓게 펼쳐진 세상을 바라보며 그녀는 두 팔을 뻗어 올리며 소리쳤다.
“아르소의 영주, 아리안이 신의 자식이 되었음을 고하나이다!”
우웅!
갑작스럽게 하늘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시커먼 구름이 하늘을 가리며 세상을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다.
“넌, 아리안이 아니다!”
차가운 음성에 아리안은 놀라서 뒤를 돌아봤다.
흑발에 검은 옷을 걸친 차갑게 생긴 사내가 자신을 보며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역시 흑발을 늘어뜨린 사내가 자신을 보며 차갑게 웃고 있었다.
“당신들은 누구야! 나는 분명 아르소의 영주 아리안이야. 한데 왜 아니라고 하는 거지?”
“웃기지 마. 넌 신교주 연무극의 딸이야. 결코 이 세상의 계집이 아니란 말이다.”
“닥쳐!”
아리안은 사내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피가 뿌려지며 사내들은 힘없이 죽어 갔다. 자신을 보며 차갑게 웃던 사내의 입에서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이름이 흘러나온다.
“소민.”
아리안은 사내의 목소리를 들으며 혼란에 휩싸였다. 소민이라는 이름. 분명 기억에 없는 이름인데 왜 이렇게도 혼란스러운 걸까.
“약속해요. 나를 지켜 주겠다고…….”
자신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온다. 사라졌던 사악한 마법사가 다시 나타났다.
“흐흐흐!”
콰우우…….
검은 구름들이 광포한 움직임을 보이며 서서히 세상을 향해 내려앉기 시작했다. 아리안은 두려움에 머리를 감싸 쥐고 무작정 뛰었다.
또다시 들려오는 자신의 목소리…….
“약속해요, 나를 지켜 주겠다고…….”
“헉!”
아리안은 눈을 떴다.
주변을 둘러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아직까지 악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듯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언제나 자신의 꿈속에서 자신을 괴롭혔던 사내의 얼굴을 떠올리며 아리안은 고개를 숙였다.
‘또 그 꿈을 꿨어…….’
꿈속의 사내를 떠올려 봤지만 얼굴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언제나 이랬다. 흑발에 흑안만 떠오를 뿐이다. 게다가 그가 자신을 향해 외쳤던 소민이라는 이름만이 기억되었을 뿐이었다.
“또 악몽을 꾸셨군요, 아가씨.”
시녀가 다가와 그녀를 감싸 안았다. 아리안은 그녀에게 몸을 맡기고는 움직이지 않았다.
또르륵…….
투명한 액체가 뺨을 타고 흐른다.
그 꿈을 꾸면 헤어날 수 없는 지독한 슬픔이 밀려온다. 그녀는 슬픔에 자신을 맡기고는 하염없이 울었다. 기억조차 없건만 슬픔은 도저히 견뎌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난 오 년의 세월을 그렇게 살아온 그녀였다.
너무나도 고통스러워 주술사를 찾아도 가 보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저 기이한 현상이라는 말뿐이었다.
감정을 다스린 아리안이 몸을 일으켰다.
호위이자 시녀인 안제리나가 근심 어린 빛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숄케는 여기서 돌아가세요. 당신이 없으면 영지민들을 돌봐 줄 사람이 없어요.”
“영주님!”
“내 걱정은 마세요. 그러니 얼른 돌아가세요.”
갑주를 차려입은 아리안은 담요를 걷어 말에 묶고는 위로 올랐다. 악몽의 잔재를 떨쳐 낸 아리안은 평소의 당당함을 되찾고 있었다.
안제리나도 말에 몸을 싣고는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영주님!”
허리를 숙이는 숄케를 뒤로하고 둘은 빠르게 말을 몰아갔다.
두두두두!
* * *
“크악!”
기사들의 검과 창이 오크들을 무참히 도륙했다.
베린스 공작은 기사들을 지휘하며 주변 산맥의 오크들을 차례로 토벌하는 중이었다.
소리아노가 검을 뽑아 들고 소리쳤다.
“놈들을 죽이고 북쪽으로 이동한다!”
수백에 달하던 오크들이 몰살을 당했다. 제아무리 오크라도 오러로 무장한 기사들에겐 식후 간식거리도 되지 못했다.
삼천에 이르는 기사들이 말머리를 북쪽으로 돌렸다.
“각하! 저곳만 토벌하면 군단 병력이 상주할 공간을 확보하게 됩니다!”
“후후! 좋아, 꽤 싱겁게 끝나는군.”
“제아무리 캐논 산맥의 몬스터들이라도 각하께서 직접 단련시킨 기사들을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하하하!”
소리아노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흡족한 표정으로 북쪽을 응시하던 베린스 공작이 이동을 지시하자 기사들은 빠르게 북쪽으로 질주했다. 능선을 하나 넘어가자 거대한 평원이 펼쳐졌다.
산맥의 일부인 그곳은 놀라울 정도로 광활한 넓이를 자랑했다. 요란 제국의 이름난 무인인 베린스 공작은 거침없이 토벌명령을 내렸다.
두두두두…….
삼천의 기병들이 지축을 울리며 평원으로 돌진했다. 숲의 곳곳에서 몬스터들이 놀라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이 잡혔다. 기병 일부가 숲으로 돌진해 들어가 살육을 시작했다.
“모조리 쓸어버려라!”
“으하!”
이들은 요란 제국 최강의 돌격 부대다.
모두 일만의 기병으로만 이루어진 이들은 제국전쟁 때, 그 용맹을 대륙 전체에 뽐냈던 자들로서 그야말로 최강, 최고의 무력 부대라 불린다. 선두에서 말을 몰아가던 베린스 공작이 검을 뽑아 들었다.
시퍼런 오러가 검 전체를 두르고 있었다. 오러블레이드! 그것은 강자만의 전유물이다.
“오우거는 가죽을 남기고 나머지는 모조리 죽여 씨를 말려라!”
거칠 것이 없었다.
간간이 모습을 드러낸 오크들과 하위 몬스터 고블린들은 말발굽 아래 짓밟혀 그대로 죽어 갔다.
삼천의 기병이 평원의 중앙까지 들어섰을 때였다.
갑자기 사방에서 대규모의 오크 병력이 그들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베린스는 당황하지 않았다.
대열을 바꾸어 횡으로 펼친 그는 그대로 밀려오는 오크들을 향해 돌진을 명령했다.
“요란 제국의 위대함을 보여 줘라!”
“공작 각하를 위하여!”
콰지지직!
피와 살이 난무했다.
마법실드가 펼쳐진 전마들은 먹이 사슬의 위에 있는 몬스터들을 전혀 겁내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거친 몸짓으로 오크 병사들의 중앙으로 짓쳐 들었다.
캬오!
측면에서 거대한 괴성이 터져 나왔다.
“으악!”
기사 하나가 피를 뿌리려 허공으로 날아갔다.
“오우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