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5
<귀환무사 265화>
귀환무사 2부
40화
“찾아서 돌아간다. 반드시…….”
두고 온, 사랑하는 사람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자신들이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그녀들도 이곳으로 오기 위해 연못으로 뛰어들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이곳에 그녀들이 떨어진다는 보장도 없다. 그것이 언제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사공진무는 자신의 말실수가 마음에 걸린 듯 술을 거푸 마셨다.
진천이 그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위로했지만 북궁천소와 왕전 등의 험악한 눈길은 여전했다. 어색한 침묵은 드웨인이 들어서면서 깨졌다.
“음식들이 입에 맞으십니까?”
양손에 술과 음식을 잔뜩 든 시녀들이 그와 함께 들어섰다.
작은 영지라고 하더니 성의 규모나 술과 음식의 양과 질을 보니 그것도 아닌 듯했다.
이 정도면 중원에선 어지간한 황족들도 맛보지 못할 진수성찬이다. 물론 이곳의 음식에 대한 지식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진천의 생각에 그렇게 느껴졌다.
진천이 드웨인을 가볍게 노려보며 물었다.
“거짓말을 했군. 보잘것없는 영지라더니 이게 보잘것없는 영지의 주인이 먹는 밥상이냐?”
드웨인이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하고서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왕들이나 먹음직한 음식들이 아니더냐! 이 자식이 어디서 거짓말이야! 죽고 싶어?”
진천이 온갖 음식들을 보며 화를 내자 드웨인은 그때야 뜻을 알아차린 듯,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다른 대륙에서 오셔서 오해를 하셨나 봅니다. 이곳의 영주들이라면 손님이 오셨을 때, 이 정도의 대접은 일반적인 것이지요. 뭐, 조금 과하게 차리긴 했습니다만, 왕족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준이 못 됩니다.”
“이곳의 왕은 어떤 자지?”
느닷없이 혁련천후가 물었다.
대번에 드웨인의 표정과 몸짓이 황제를 대하듯 공경스럽게 바뀌었다.
그에겐 혁련천후가 황제보다 더 무서운 존재로 각인되어 있었다. 물론 그보다는 험악한 북궁천소와 왕전이 더 두려웠지만…….
“율리우스 공작께서 황제의 승인을 받아 이곳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공작은 일개 귀족이라면서 나라를 통치한단 말이냐?”
“왕국이나 공국은 제국의 위성 국가라고 보시면 됩니다. 자체적인 세력이 강성한 공작들을 왕에 봉하여 제국을 호위하는 임무를 부여한 것이지요. 물론 전쟁이 발발하면 제국에 귀속됩니다.”
조윤이 혁련천후를 보며 말했다.
“고대 중원의 제후국이라 보면 되겠군요. 세력이 강성한 공작들에게 적당한 땅을 내주어 그들의 불만을 위로하고 결속을 다지는, 뭐, 그런 것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고대가 아니더라도 중원에서도 황제들이 장성한 왕자들을 번왕으로 위임하지 않았습니까?”
“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혁련천후가 드웨인을 보며 다시 물었다.
“귀족들은 세습제로 유지되느냐?”
“대부분이 그런 경우이긴 합니다만, 때론 전쟁에서 공을 세우거나 황제의 신임을 얻게 되면 귀족으로 봉해지는 경우도 무척 많습니다. 당대 제국을 뒤흔드는 공작들이 대부분, 그런 경우로 왕에 봉해진 것이지요. 해서 전쟁을 바라는 호전적인 귀족들이 상당히 많은 게 현실입니다. 출세를 보장받기 때문입지요.”
그 말에 모두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흐흐! 싸움만 잘하면 귀족이 될 수 있단 말이군. 주공! 이거 괜찮은 세상이군요.”
북궁천소가 험악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드웨인이 움찔한다. 북궁천소는 그저 보는 것만으로 두려움을 갖게 만드는 인물이다.
“합리적이라고 볼 수도 있는 제도군요. 인물이 뛰어나든, 모자라든 무조건 세습으로 황위에 오르는 중원보다는 낫습니다. 모두에게 성공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과 같으니 말입니다.”
“그렇겠군.”
틀린 말이 아니다.
중원은 황권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었고 대부분의 관직도 세습이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물론 아주 특출한 인재들이 황제에 의해 발탁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손에 꼽을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역설적으로 ‘왕후장상이 씨가 따로 있느냐’라는 말이 생겨났을까.
“영지전이라는 거…… 언제 열리지?”
“제가 그곳에 도전장을 보내면 쌍방 협의하에 날짜가 정해집니다만 왕실의 결재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써튼이라는 작자가 벌써 왕실의 결재를 받았을 테니, 저와 그자의 합의만이 남은 상태라고 보면 됩니다.”
드웨인의 얼굴이 다소 우울하게 가라앉았다.
자신의 모든 것이 걸린 영지전을 떠올리자 근심이 구름처럼 생겨났다. 눈앞의 존재들이 대신 해 준다면 그다지 문제 될 것은 없겠지만 이들의 대리 자격을 왕실에서 인정해 줄지가 걱정이었다.
써튼의 끈이 닿아 있는 왕실이 만약 이들의 대리 출전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자신은 써튼의 칼에 목숨을 잃든가, 영지를 내주고 야인으로 떠돌든가, 둘 중 하나의 신세로 전락해야만 한다.
“표정이 뭐냐? 우리를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냐?”
왕전이 고리눈으로 물어 오자 드웨인이 속내를 털어놓았다. 오 분 정도 드웨인의 말이 끝나자 조윤이 물었다.
“영지전이라는 게, 꼭 대가리들끼리 일대일 결투로만 행해지는 것인가?”
“아닙니다. 영지 간의 전면전 방식이 있습니다만, 그렇게 되면 영지민들이 피해를 입기 때문에 그것은…….”
왕전이 더 들을 것 없다는 투로 말했다.
“그럼 됐네. 전면전으로 바꿔. 그쪽 놈들 대가리만 몇 놈 없애면 간단하게 끝나겠네. 왕실의 결재를 받니 마니 할 필요도 없고 좀 쉬우냐? 그렇지 않습니까?”
듣고만 있던 혁련천후가 나지막이 물었다.
“전면전도 결재라는 것을 받아야 하나?”
“아닙니다. 선전 포고만 하면 가능합니다만, 그들의 힘이 압도적으로 강한 탓에…….”
“그건 상관없다! 전면전이 더 빨리 해결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
“……!”
혁련천후가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으며 눈을 감았다.
무언가에 대해 결정을 내릴 때, 곧잘 보이는 버릇이었다. 모두가 그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드웨인의 속내는 가시덤불을 맨발로 걷는 기분이다.
전면전은 말 그대로 전쟁이다. 수많은 영지민들이 죽어 나간다.
그렇게 해서 이긴다고 해도 영지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안 한 것보다 못한 경우로 전락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힘만을 믿고 전면전을 벌여 주변의 영지를 복속시켰던 수많은 영주들이 반란으로 목숨을 잃는 것을 드웨인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때, 그의 근심을 현실로 만들어 버리는 음성이 귓속으로 흘러들었다.
“여기서 지체할 시간이 없다. 내일 써튼인가 하는 자에게 선전 포고를 해. 하루 만에 전쟁을 끝내고 우린 케논 산맥으로 간다.”
* * *
180미터의 큰 키에 딱 벌어진 어깨를 자랑하는 삼십 대 중반의 인물은 자신의 탁자 위에 놓인 붉은색 첩지를 내려다보며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런 인물의 앞에는 검은색 로브를 뒤집어쓴 마법사와 금색 갑주를 걸친 기사 하나가 마주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얼굴에도 가소롭다는 빛이 가득했다.
“놈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감히 내게 선전 포고를 해 오다니…… 어떻게 생각하느냐?”
써튼 영지의 영주 써튼 남작은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기사에게 물었다. 성정이 지나치게 급하고 오만했던 그는 영지도 스스로 자신의 이름으로 바꾼 인물이다.
그는 지금 드웨인이 보내온 선전 포고문을 가지고 수하들과 의논을 하던 중이었다. 로브 밑으로 하얀 눈동자를 번득이던 마법사가 속삭이듯 말했다.
“전면전은 영지민들의 지지를 떨어뜨리는 최악의 방법이지요. 하지만 그쪽에서 먼저 선전 포고를 해 왔다면 전혀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 부분을 모든 영지민들에게 공고를 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영주님은 오히려 좋은 명분을 얻는 것이지요.”
마법사의 음성은 무척이나 사악했다.
눈동자에 어린 붉은색 기운은 그가 흑마법사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모두가 꺼리는, 특히 귀족들이라면 더더욱 꺼리는 흑마법사와 써튼이 계약한 것이다.
흑마법사를 계약하고 부리면 제국의 법에 의해 참수형을 당한다.
하지만 일이 터지면 그는 백마법사로 위장하여 움직였기 때문에 진정한 신분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물론 더 상위 계열의 마법사가 있다면 대번에 들통이 날 일이지만 이런 변방에 그 정도의 마법사가 있을 리 만무했다.
마법사를 바라보는 써튼의 눈동자에 살짝 아픔이 스쳐 지나갔다.
막돼먹은 귀족의 전형인 그가 보일 수 있는 눈빛이 아니었다.
써튼이 이내 눈빛을 고치고는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좋아! 드디어 비옥한 드웨인의 영지가 이 써튼의 품으로 들어오는구나! 스스로 갖다 바친다면 거절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지 않겠느냐? 흐흐! 일단 드웨인의 영지를 손에 넣고 난 다음, 제라드의 영지를 노려야겠군.”
그때 지금껏 가만히 듣고만 있던 기사가 말했다.
“그자가 무엇을 믿고 전면전을 택했을까요? 그냥 결투를 했다면 목숨이라도 건질 수 있을 텐데, 굳이 백 퍼센트 죽을 수밖에 없는 전면전을 택했다면 뭔가 꿍꿍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요? 강한 기사들과 계약을 했다든지, 상위 계열의 마법사를 구했다든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는 써튼의 친동생이자 써튼 영지의 기사단을 이끄는 단장이었다. 그 말에 흑마법사가 대답했다.
“그건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곳에 제 수족이 잠입해 있음은 두 분도 아시지 않습니까? 며칠 전, 돌아온 드웨인이 몇 명의 이방인과 함께 왔다고는 했지만 마나의 양이 보잘것없는 작자들이라고 전해 왔습니다. 그 말은 곧, 전력 보강이 전혀 없다는 것이지요.”
속삭이듯 말하는 흑마법사의 음성이 어찌나 사악한지 몸에 소름이 돋아날 정도였다. 슬쩍 인상을 찌푸렸던 써튼이 껄껄 웃었다.
“넌, 그게 탈이다. 그렇게 소심해서 언제 나처럼 작위를 받겠느냐? 좀 대범하게 굴어라, 이놈아! 장차 몇 개의 영지가 손에 들어오면 네 밑으로 수십의 기사들과 수만의 사병들이 굴러들어 올 텐데 그런 소심함으로 어찌 부릴 수 있단 말이냐?”
“전, 단지 걱정이 되어서…….”
“됐다! 그대들은 돌아가서 출전 준비를 하여라. 당장 내일 드웨인의 영지로 쳐들어갈 것이다. 아! 서류도 반드시 챙겨야겠지? 내일 오후쯤이면 놈의 피 묻은 도장을 찍게 될 테니 말이야, 하하하!”
써튼의 웃음소리가 밤하늘로 울려 퍼지는 그때, 써튼 영지로 숨어드는 일단의 무리들이 있었다.
시커먼 야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상당한 속도로 영지의 성곽으로 스며들었다. 혁련천후 일행과 드웨인이었다.
성곽의 지척에 다다른 그들은 잠시 그 자리에 털썩 앉았다.
“자식아! 너무 빨리 왔잖아. 내일 아침은 되어야 싸울 수 있다며? 이런 빌어먹을!”
왕전이 드웨인을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이렇게 빠르실 줄은…….”
드웨인은 그들이 이렇게 빠를 줄은 생각도 못했었다. 자신을 기준으로 시간을 책정하고 출발했는데 다섯 시간이나 빨리 도착해 버린 것이다. 물론 자신은 왕전의 억센 손아귀에 안기다시피 달려왔다.
“그냥 무시하고 쓸어버리자.”
어둠 속에서 북궁천소의 하얀 이를 드러났다.
드웨인은 그저 혁련천후만을 바라보며 눈을 껌벅였다. 그 말고 다른 존재들은 무서워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특히 저 북궁천소와 왕전은 머리가 돌아 버린 드래곤이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을 언제나 가져다주는 존재들이었다.
“남은 시간 동안 잠 좀 자 둬.”
“쩝! 멍청한 놈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담벼락 노숙을 하게 생겼네.”
“그러게.”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