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무사-264화 (262/425)

# 264

<귀환무사 264화>

귀환무사 2부

39화

“호호! 그곳에 다른 영주라도 있나요?”

“저 같은 보잘것없는 하급 귀족을 왜…….”

그 말에 아리안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다.

“그 말씀은 저를 욕하는 것과 같군요. 하급 귀족이라뇨. 호호! 저도 영주님과 같은 준남작이랍니다.”

혁련소가 모른 척, 눈을 동그랗게 했다.

“영주께선 명성이 드높은 마스터가 아닙니까? 그런데 고작 준남작이라뇨. 저는 최소한 영주께서 남작이신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것도 부족하다고 여기고는 있었지만…….”

“그저 칼질 좀 잘한다고 직위가 높아지면 세상이 군인들 천지로 변하게요? 전, 사실 마스터라는 것 때문에 받은 작위는 아니에요. 돌아가신 제 의부께서 물려주신 거죠.”

‘의부?’

아리안이 조금은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마법을 연구하던 분이셨어요. 시간을 거스르는 마법을 연구하시다가 그만…….”

“이거, 괜히 저희들 때문에…….”

혁련소가 미안한 표정을 짓자 아리안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오히려 주책을 떤 제가 미안하군요. 그나저나 사실 영주님께 드릴 말씀이 있답니다. 사실 그 부분 때문에 영주님을 찾아뵈려고 했었어요. 죄송해요.”

“아, 아닙니다. 그런데 부탁이라는 게…….”

아리안의 눈부신 벽안이 혁련소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순간 혁련소는 그 눈동자가 무척이나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아리안이 입술을 몇 번에 걸쳐 실룩거리더니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아르소를 맡아 주세요!”

“예, 예?”

혁련소는 순간 깜짝 놀랐다. 어지간한 흑야도 꽤 놀란 눈치였다.

느닷없이 아르소를 맡아 달라니…… 다른 자라면 ‘이게 웬 떡이냐’라며 내심 웃을 일이다.

아리안이 포근한 미소를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제가 당분간 이곳을 비워야 합니다. 몇 개월이 걸릴지, 몇 년이 걸릴지 장담할 수 없는 일이라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영주님처럼 영지민들을 아끼는 분이라면 저보다 더 아르소를 잘 이끌 것이라 믿어요.”

혁련소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 당황했던 스스로를 자책하고는 물었다.

“무슨 일인지 알려 줄 수 없습니까?”

“솔직히 숨김없이 말씀드리지요. 얼마 전, 테세우드 공작가의 권역에 흑발에 흑안을 지닌 사람들이 상당수 나타났다고 하더군요. 저는 그 사람들을 찾아 떠날 생각이에요. 개인적으로 알아볼 게 있답니다.”

우우우웅!

순간 실내가 광포한 기운으로 요동쳤다.

아리안이 크게 놀란 얼굴로 몸을 흠칫했다. 기운의 주인공은 바로 흑야와 혁련소였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이토록 강력한 마나를 지녔다니…….’

지금 둘이 발산하는 기운은 자신은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실내를 장식하고 있던 테라스가 파삭! 하는 소리를 내며 가루로 변해 흩날릴 정도였다.

“지금 뭐라고 했지?”

아리안을 응시하는 흑야의 눈동자가 강렬하게 흔들렸다.

아리안은 무지막지한 기운이 흑야에게서 발산되자 흠칫, 상체를 뒤로 뺐다.

그뿐이 아니다. 혁련소는 어떤가. 그저 영민하고 밝은 성정으로만 여겨졌던 그가 마스터는 그냥 한입에 삼킬 듯, 가공할 마나를 풀풀 쏟아 내며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힘을 감추고 있었어, 이 사람들…….’

아리안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과거 제국의 초인을 먼발치에서 보았을 때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흑야가 다시 싸늘히 물었다.

“묻겠다. 누가 어디서 어떻게 나타났다고?”

“숙부!”

흠분을 가라앉힌 혁련소가 흑야를 말렸다.

“죄송합니다. 잠시 흥분을 했군요. 영주님! 그 사람들에 대한 소식을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주변을 몰아쳤던 광포한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흑야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아리안을 감정 없는 시선으로 보았다. 아리안은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의 무지막지한 기운이 소멸되자 술을 한 모금 들이켜고는 혁련소와 흑야를 보며 물었다.

“힘을 감추고 계셨군요. 놀라워요. 마스터인 제가 움찔할 정도라니…….”

“그게, 가문의 비법을 좀 배웠을 뿐입니다. 흥분하거나 화가 나면 몸 안의 마나가 일시적으로 끓어올라 상대를 두렵게 몰아가는…… 별 대수롭지 않은 수법입니다. 실전엔 전혀 효과가 없지요.”

혁련소가 대충 둘러댔다. 둘러대고 보니 제법 그럴싸했다.

“두 분도 그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많으시군요. 이유는 묻지 않겠어요. 물론 그럴 자격도 없지만…… 좋아요. 말해 주죠! 얼마 전에 테세우드 공작가의 마법사들이 떼죽음을 당한 사건이 발생했어요. 그것도 테세우드 공작의 성, 지척에서 말이죠. 사인은 내부 장기가 모조리 가루로 변한 것이라 하더군요. 마치 전설에 나오는 드래곤의 마법처럼 말이죠.”

“마법사들을 죽인 게, 바로 흑안에 흑발을 지닌 그 사람들이란 말입니까?”

“그래요. 며칠 전, 통신구를 통해 제국의 전역에 그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어요. 모르셨나요? 어지간한 영지엔 전부 송신을 했다고 들었는데…….”

다크 영지엔 통신구가 없다.

혁련소가 그것을 팔아 영지민들의 쌀을 사 주었기 때문이다. 혁련소의 얼굴에 초조함이 묻어났다.

“혹시, 통신구로 전송된 영상을 저장하는 방법이라도 있습니까?”

“없어요!”

아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물어본 혁련소도 내심 씁쓸했다. 그런 방법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만 가 보자.]

[지금요?]

[당연하지. 여기서 이 계집과 노닥거릴 시간이 없다. 어쩌면 주공과 놈들이 이곳으로 왔을 수도 있으니 서두르자.]

[알겠습니다.]

확신할 순 없지만 조금의 의혹만으로도 그들은 달려가야 했다. 혁련소는 가슴이 뛰었다.

해서 술병을 통째로 마셔 버리고는 아리안을 보며 다시 물었다.

“그 사람들을 찾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지를 버리고 갈 정도로 대단한 일입니까?”

“죄송해요. 그건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혁련소는 잠시 아리안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봤다. 악한 기운은 전혀 없었다. 벽안의 눈동자가 자신을 보며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만 가 봐야겠습니다! 그리고 영지를 맡아 달라는 말씀, 죄송하지만 들어줄 수가 없습니다. 거듭 죄송합니다, 아리안 영주님!”

혁련소는 허리를 깊게 숙여 진심으로 미안함을 전했다.

흑야도 몸을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그들의 태도에 아리안은 놀란 얼굴로 둘을 번갈아 쳐다봤다.

흑야가 다소 풀어진 낯빛으로 아리안에게 물었다.

“지금 그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소?”

“그것까지는…… 다만 테세우드 공작가에서 발표하기를 그들의 이동 동선이 케논 산맥으로 향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시죠? 설마 현상금을 노리고 그들을 찾으러 가는 것은 아니겠죠?”

조금 전, 둘이 극강의 기운을 발산하기 전까지는 생각조차 못했던 질문이다.

마법사들을 떼로 죽인 자들을 당해 낼 정도의 강자는 드물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도 모르게 그러한 질문이 저절로 입에서 나온 것이다.

“현상금? 현상금이 붙었단 말이냐?”

흑야가 또다시 광포함을 드러냈다. 이번엔 조금 전과 비교할 수준이 아니었다. 아리안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호흡마저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십만 골드가 붙었어요. 물론 생포하면 두 배로 준다고 하더군요.”

“……!”

“숙부님! 그만 돌아가시죠.”

흑야는 그들이 혁련천후와 자신의 벗들이라 확신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혁련소는 가급적 흥분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기대했다가 아니면 그동안 진정시켰던 마음이 도로 참기 힘들 지경으로 떨어질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영주님! 오늘의 환대, 잊지 않겠습니다. 그럼!”

둘은 빠르게 밖으로 나섰다.

아리안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그녀는 둘이 사라져 간 방향을 바라보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가슴이 몇 시간을 뛴 사람처럼 심하게 요동쳤다.

‘검을 잡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어. 저 사람들…… 설마!’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번쩍 빛을 발하며 벌떡 일어섰다. 제국에 떠도는 소문이 그녀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흑발을 날리며 악의 무리들에겐 사형집행인이라 불리는 그들, 흑안의 마검사.

‘아니야. 분명 그들의 동공은 연한 갈색이었어. 그들은 마족과 같은 검은색이라고 했어. 아니야.’

그녀는 다시 의자에 무너지듯 앉았다.

무지막지했던 흑야의 얼굴이 새삼 떠올랐다.

‘무례한 그자! 제국의 연회에서 보았던 테세우드 공작과 비교해도 결코 떨어지지 않아! 이게 말이 돼? 말이 되냐고…….’

아리안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조금 전 그가 발산했던 마나의 양이라면 초인이라 불리는 자들과 거의 차이가 없는 수준이다.

황제가 주최한 제국의 연회에서 그녀는 황실의 기사단장과 시범 대련을 펼치던 테세우드를 보았었다. 자신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무의 장벽을 보고서 얼마나 절망했던가.

‘혹시 그자가…….’

그녀는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오르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악인들이여! 달이 뜨는 밤이면 그가 찾아온다. 그는 피할 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 악몽과도 같으니, 죄인들이여! 타인에게 원한을 산 자들이여! 그대들이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을 어찌 볼 수 있으랴.”

“다크어쌔신!”

아리안의 고운 입술에서 신음성과도 같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불끈 쥔 주먹이 바르르 떨렸다.

‘만약 그자가 소문의 그라면…… 그가 그들을 노린다면…….’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아리안의 행동이 빨라졌다.

시녀를 불러 떠날 채비를 지시한 그녀는 곧장 자신의 거처로 뛰어갔다.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출생 비밀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는 사람들…… 그들을 다크어쌔신보다 자신이 먼저 만나야 했다.

비밀.

그녀에겐 반드시 풀어야 할 비밀이 있었다.

제7장 케논 산맥으로

한 달이 지나갔다.

똑같은 사람이 사는 세상이건만 중원과는 너무나도 다른 이계는 여전히 낯설었다.

혁련천후 일행은 드웨인의 영지에 도착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드웨인을 도와주기로 작정한 혁련천후는 드웨인이 내준 별관에 여장을 풀고 그곳에서 수하들과 함께 간단한 술을 즐기며 대화를 나누었다.

“중원보다 훨씬 넓은 세상이군요. 놀랍지 않습니까? 이 정도의 문명을 지닌 국가가 있었다는 게. 사실 지금껏 믿기지 않습니다. 통치하는 방식도 완전히 다르고 말입니다.”

사공진무의 그 같은 말에 다른 모두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천이 이어 갔다.

“소와 흑야 형님을 찾는 것이 우선이긴 합니다만, 돌아갈 방도 또한 미리 강구해 놓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저 얼치기들 말을 들어 보면 이 세상엔 마법사라는 자들이 상당히 많다고 하더군요. 그중 몇은 텔레포튼가 뭔가 하는 방법으로 말을 타고 반년을 가야 할 거리를 눈 깜박할 시간에 오간다고 합니다. 그 마법사라는 자들이 차원을 오가는 방법에 대한 열쇠를 쥐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자들을 잡아서 족치면 되겠네.”

“그렇지.”

북궁천소와 왕전이 거들었다. 듣고만 있던 혁련천후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왔으니 돌아갈 방법 또한 어딘가에 있을 거다. 일단은 소와 흑야를 찾는 것에 총력을 기울여. 다른 건 차후에 생각해.”

“혹시라도 돌아가지 못하면…….”

다소 우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사공진무가 모두의 험악한 눈빛을 받고는 머쓱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혁련천후가 술잔을 입으러 가져가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