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무사-263화 (261/425)

# 263

<귀환무사 263화>

귀환무사 2부

38화

* * *

[그녀가 눈에 익지 않았습니까? 왠지 어디선가 본 듯, 기분이 묘합니다.]

[전혀…… 워낙 비슷비슷하게 생겨서 그런 거 아니냐?]

[그런가요…….]

혁련소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마차를 응시했다.

분명 처음 보는 아리안이다. 물론 레이놀드를 영접하는 자리에서 보았지만 이토록 자세히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뭐지? 이런 느낌은…….]

가슴이 묘하게 울렁거렸다.

그리고 말로 표현하지 못할 이상한 감정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며 생겨났다.

아름다운 여인을 보았을 때, 생겨나는 감정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는 문득 연소민이 떠올랐다.

전혀 닮지 않은 두 여인의 얼굴이 저절로 교차되며 가슴이 뜨거워졌다.

흑야가 그런 혁련소를 보며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수련을 게을리해서 집중력이 떨어진 것은 아니냐? 돌아가면 만사를 제쳐 두고 수련에 집중해.”

“돌아가진다면 당연히 그래야겠지요?”

“당연하지. 지금의 널 주공께서 보시면 혼나는 것은 나다.”

혁련소의 얼굴에 씁쓸함이 떠오른다.

“이젠, 솔직히 돌아간다는 거에 대한 희망은 지웠습니다. 자신도 없고…….”

“너답지 않게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가 가지 못하면 그분께서 오신다. 그러니 마음 강하게 먹어.”

“하하!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일행은 삼십 분 정도를 달린 후에 온통 흰색으로 세워진 아르소의 성에 다다랐다.

성을 보던 흑야의 눈에 감탄의 빛이 떠오른다.

아름다웠다. 주변 경관과 어우러진 아르소의 성은 마치 고향의 신마성을 떠올리게 했다.

* * *

둘은 귀빈들을 모시는 별관에 앉아 주변을 구경했다. 아리안은 잠시 자신의 거처에 들렀다 온다고 가 버린 뒤였다.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군요. 이 정도면 상당한 세금을 징수했을 텐데…… 설마 악덕 영주는 아니겠지요?”

온갖 장식품으로 치장된 별관은 무척이나 화려했다. 자신의 그것과는 비교 자체가 되지 않았다. 도가 지나치자 아리안의 품성이 저절로 의심되기까지 했다.

“여자라서 그런가?”

“아르소는 재정적으로 풍족한 영지라서 그럴 거다. 밀을 수출해서 버는 돈만 해도 다크 영지의 수십 배는 족히 되고도 남겠지, 게다가 다른 농수산물 역시 제국에서 으뜸으로 쳐주는 곳이 이곳이다. 당연히 세금이 여타의 영지보다는 많을 수밖에.”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밝은 게 다 이유가 있었군요. 다크 영지와는 확실히 차이가 납니다.”

흑야가 가는 눈으로 물었다.

“네가 생각만 바꾸면 짧은 시간에 다크 영지도 이곳만큼 발전시킬 수 있다.”

“하하! 그럴까요?”

“꼭 세상을 떠돌아야만 그 아이를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인으로서 그 정도의 무력이라면 결코 아리안 영주보다 못한 대접을 받진 않을 게다. 영지를 발전시키며 힘을 기르다 보면 마땅한 방법이 찾아질 수도 있어.”

“흠! 살아 있었다면 세상에 떠도는 소문을 들었겠지요. 사실 숙부와 저를 두고 흑안의 마검사라며 무척 시끄럽지 않습니까. 당연히 그녀라면 우리를 의심했을 테고, 그렇다면 찾아왔어야죠.”

흑야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가 한곳에 정착을 했던 시간이 삼 개월이 고작이다. 만약 그 아이가 상당히 먼 곳에 있었다면 시간적으로 찾아오기가 힘들 수도 있었겠지. 정작 왔는데 우리가 떠나고 없었을 수도 있었겠고 말이다. 해서 하는 말인데…… 다크 영지를 제국 최고의 영지로 만들어 보는 것도 그 아이를 찾는 좋은 방법일 듯싶다.”

“그게 좋은 방법이 된단 말입니까?”

“그렇지. 단순히 세상에 우리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어. 하지만 강력한 영지를 가진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힘이 있으면 사람들이 모이게 되고, 그러다 보면 취할 수 있는 정보의 범위가 넓어지지.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느냐?”

혁련소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이다.

사실 그동안 일부러 소문을 내려고 모든 이들의 이목이 집중된 몬스터 토벌이나 국경 지역에서 발발한 대규모 국지전에 참전하기도 했었다.

덕분에 흑안의 마검사라 불리며 유명세를 탔지 않은가. 물론 일부러 동공의 색을 바꾸어 신분을 감추고는 있지만 어차피, 그녀는 자신을 알아볼 것으로 생각하고 움직였던 자신이다.

하지만 오 년이 흐른 지금에도 그녀의 소식조차 접하지 못했다.

“만약에 말이다. 그 아이를 찾지 못하고 중원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게 된다면 이 세상, 제대로 한번 흔들어 봐야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난 죽어서도 눈을 못 감을 거야.”

“중원을 통일한 아버지처럼 숙부와 저도 이 세상을 한번 뒤집어 볼까요?”

“난, 진심을 말하는 거야.”

“하하. 저도 그런 생각, 가끔 해 봅니다. 정말 억울해서라도 왕국을 건설해 보고 죽어야지…… 하는 생각을 말입니다.”

흑야의 눈이 섬광을 발했다.

“왕국? 그렇지! 왕국이 좋겠군. 작은 영지로는 사실 부족해. 적어도 한 나라를 세워 보고 죽어야 한이 풀리겠군. 하하! 좋은 생각이다!”

“그게 말이 그렇지. 가능하겠습니까? 그냥 해 본 소립니다.”

“누군 처음부터 왕으로 태어나더냐? 의지와 꿈을 가지고 작은 것부터 해 나가다 보면 충분히 가능하다.”

정색을 하고서 말을 하는 흑야를 보며 혁련소가 가볍게 웃었다.

“정말 왕국을 세워 보실 생각입니까?”

“지금 결정했다. 그렇게 하기로…….”

“참! 하여튼 숙부는…….”

그때, 문이 열리며 아리안이 들어섰다.

갑옷을 벗고 깔끔한 평상복을 입은 그녀는 소문 이상으로 상당한 아름다움을 자랑했다.

혁련소는 또다시 가슴 한구석에서 스멀거리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분명 낯이 익어…….’

그러나 기억을 살펴봐도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죄송해요. 일이 있어 조금 늦었군요. 여기서 이럴 게 아니고 저를 따라오세요. 마침 좋은 술이 몇 병 있어 그것으로 대접할까 해요.”

“대접까지야…….”

“선정으로 명성이 자자한 다크 영주께 그깟 술 몇 병이 대수겠어요?”

가볍게 웃어 보인 아리안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향기로운 향수가 까다로운 후각을 자극했다. 아리안의 뒤를 따라가며 흑야가 전음을 보냈다.

[손을 보니 상당한 수련을 거쳤어. 확실히 대단한 여자야.]

[그렇…….]

대답을 하려던 혁련소가 입을 다물었다.

아리안의 손, 하얗고 긴 손이지만 굳은살이 눈에 띄는 다소 투박한 손이었다. 그런데 그 손이 연소민의 그것과 너무 흡사했다. 순간적으로 혁련소는 그녀의 뒷모습을 자세히 살폈다.

[이런…… 내가 확실히 집중력이 떨어졌군.]

금발에 조금 더 큰 키, 게다가 흑안이 아닌 벽안에 새하얀 피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내심 씁쓸함을 금치 못한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아이와 비슷한 분위기라 헷갈리나 보군.]

[숙부도 알고 계셨습니까?]

[처음엔 분위기가 너무 흡사해서 그 아이가 변장한 줄 알았다만…… 확실히 아니더군.]

[손이 닮아서 잠시…….]

흑야가 그의 어깨를 툭 쳐 주며 위로했다.

아리안은 성곽의 우측을 돌아 상당히 높은 건물로 올라갔다.

영지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그곳엔 열 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아담한 외야석이 있었는데 술과 각종 음식이 그 위에 놓여 있었다.

시녀로 보이는 여인, 둘이서 그들을 정중하게 맞이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둘은 시녀들이 빼 준 의자에 앉았다. 그 맞은편에 아리안이 앉았다. 무심결에 술병을 보던 혁련소가 조금 놀란 기색을 보인다.

“이건 케논 산맥에서만 난다는 과일로 만든 술이군요. 상당히 귀한 것으로 아는데…….”

“술에도 조예가 깊으시군요. 이건 어지간한 주당들도 몰라보는 것인데, 케논 산맥에 다녀오기라도 하신 모양이군요?”

“아, 아닙니다. 그곳에 감히 어찌 갑니까? 오우거들의 천국에다 와이번의 번식지가 그곳이 아닙니까. 마스터들이 아니면 함부로 갈 수 없는 곳이지요.”

아리안의 하얀 얼굴에 그윽한 미소가 떠오른다.

손을 저으며 대답하는 혁련소가 그녀의 눈에는 제법 귀엽게 비쳤기 때문이다.

그녀가 술의 마개를 열고 술을 따랐다. 시녀들이 따르는 것이 옳았지만 소문처럼 그녀는 격식 따위는 따지지 않는 듯 보였다.

“저도 아직은 그곳엘 가 보지 못했어요. 이 술은 몬스터 토벌에 참전했던 지인이 선물로 준 겁니다. 오늘 첫 개봉을 하는군요.”

향이 무척이나 향기로웠다.

둘은 처음 마셔 보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여 답례했다.

하지만 둘은 이 술이 처음이 아니다. 케논 산맥의 몬스터 토벌에 참전했을 때, 위기에 처한 엘프족 청년을 구해 준 대가로 질리도록 마셨던 적이 있었다.

순간 혁련소는 생각했다.

‘이걸 만들어 팔면 떼돈을 벌겠군. 제조법도 잘생긴 그 친구가 가르쳐 줬으니…….’

그는 문득 아르소 영지의 밀을 떠올렸다. 그 밀로 인해 아르소는 탄탄대로를 걷고 있다. 다크 영지가 만약 이 술을 대량으로 제조한다면 아르소의 밀은 아무것도 아니다.

아르소의 밀, 몇 포대를 팔아야 이 술을 한 병 살 수 있다.

흑야가 묘한 빛으로 전음을 보냈다.

[흠! 너도 그 생각을 한 모양이군.]

[숙부도 그럼…….]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흑야도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갑자기 둘이 말이 없어지자 아리안이 의아한 빛으로 둘을 보았다. 혁련소가 너스레를 떨었다.

“흠! 역시 귀한 술이라 뒷맛이 일품이군요. 이런 귀한 것을 맛보게 해 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호호! 무슨 말씀을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 낯이 다 뜨거워지는군요. 술은 많으니 양껏 드세요. 좋은 분들과 함께 마시니 술맛이 더 좋군요.”

아리안은 벌써 석 잔을 마셨다.

주거니 받거니 하던 술자리는 달이 하늘의 가운데로 떠오를 때까지 이어졌다.

셋은 그동안 다섯 병의 술을 비웠다. 어지간한 영지민들의 반년치 생활비가 그들의 뱃속으로 사라졌다.

적당히 취기가 오른 아리안이 물었다.

“아시겠지만 테베스는 무척 포악한 자였어요. 영지민들의 원성이 이곳까지 들릴 정도로 말이에요. 사실 다크 영주께서 그곳의 영주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같은 족속이겠거니 생각도 했었어요. 아! 제가 말이 좀 지나쳤군요. 사과드려요.”

“하하! 아닙니다. 계속하십시오.”

살짝 치아를 드러내며 웃는 아리안의 얼굴이 무척 고혹적이었다. 호흡을 가다듬은 그녀가 말을 이어 갔다.

“세월이 지나면서 소문이 돌더군요. 영주님의 재산을 몽땅 가난한 영지민들에게 베풀고 식사도 영지민들이 하는 것과 똑같은 것으로 한다고 말이에요. 처음엔 믿기 힘들었죠. 세상에 그런 귀족이 어디 있을까 하면서 말이죠. 나중에 모든 것이 사실임을 알고 나니 제가 다 부끄러워지더군요. 해서 사실, 영주님을 한번 만나러 갈까 하고 있던 중이었어요.”

“저를 말입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