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2
<귀환무사 262화>
귀환무사 2부
37화
제6장 아르소의 영지에서
아르소는 제국에서 가장 우수한 농산물을 생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이곳의 밀은 황실과 귀족들에게 매우 높은 가격에 납품할 정도로 제국에서 최고로 뽑힌다.
밀에 못지않게 보리 또한 상당한 양을 재배하는데, 그 때문에 아르소는 술 문화가 상당히 발달했다.
보리를 발효시켜 만든 맥주를 파는 집이 술집의 대부분을 차지했는데, 그중에서도 나그네의 쉼터라는 술집이 아르소에선 최고로 유명했다.
수용 인원이 삼백 명에 달하는, 큰 규모를 자랑하는 그곳에 혁련소와 흑야가 들어선 것은 오후가 지나고 저녁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대단하군. 이 정도의 술집이라니…….”
“그러게 말입니다. 역시 번창한 도시군요. 이러니 공국에서 탐을 내는 것 아니겠습니까. 술은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독한 거면 아무거나…….”
둘은 적당한 곳에 앉아 술과 음식을 시켰다.
자신의 영지와는 달리 매우 활기찬 아르소의 곳곳을 구경하며 혁련소는 내심 자신의 영지도 이렇게 발전시키고 싶다는 생각했다.
전 영주의 혹독했던 정책 때문에 다크 영지의 주민들은 심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 자신이 영주로 부임한 지 수개월이 지났건만 여전히 자신을 두려워하고 기피하는 주민들이 대부분이다.
귀족이라면 으레 전 영주와 같다고 모두는 여기는 것 같았다.
‘기왕 맡은 거면 제대로 키워 보는 것도 괜찮겠지.’
사실 혁련소는 영지에 그다지 의미를 두진 않았다.
자신은 돌아갈 곳이 있고 찾아야 할 여인이 있다.
어쩌다가 영주가 되긴 했지만 언제 그곳을 버리고 떠날지는 자신도 몰랐다.
물론 전 영주의 재물을 털어 영지민들에게 골고루 나눠 주긴 했지만 그건 의적들도 하는 것이다. 영주라면 영지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본분이다.
‘마법사를 구하면 그녀를 본격적으로 찾아 떠나야 하는데…….’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이내 머리를 흔들고는 심호흡을 했다. 동안에는 최선을 다해 그들을 돕기로 작정한 것이다.
‘후후! 이런 생각을 하다니…… 이 세상에 완전히 물들어가는군.’
저절로 쓴웃음이 나온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지?”
“다크 영지가 떠오르는군요. 제가 조금은 우습기도 하고 말입니다.”
“비교되나 보군. 이곳과…….”
“사람들의 얼굴이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저 사람들을 보십시오. 삶에 대한 즐거움과 희망이 가득한 것이 마치 신마성의 식구들 같지 않습니까? 하지만 다크 영지의 주민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들에겐 희망이란 게 없지 않습니까?”
흑야가 눈을 가늘게 하고서 혁련소를 본다.
“갑자기 영주의 소임을 제대로 하고 싶단 생각이라도 한 거냐?
“예, 그러고 싶단 생각이 드는군요. 물론 언젠간 떠나야겠지만 있는 동안은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떠나는 건 차후 문제니 마음을 그렇게 먹었다면 제대로 한번 해 봐. 어차피 중원으로 돌아가면 넌 신마성과 강호 전체를 다스려야 한다. 사전에 한번쯤 미리 경험해 보는 것도 괜찮겠지. 사전 연습이라 생각해.”
“글쎄요…….”
혁련소는 즉답을 못하고 쓴웃음만 지었다.
그때, 금발에 뚱뚱한 여인이 술과 음식을 들고 왔다.
크리스털로 만든 술병의 마개를 열자 독한 주향이 주변을 진동했다.
대부분이 맥주를 마시지만 흑야는 워낙 독한 술을 좋아했다. 해서 제국에서 가장 독한 여신의 키스라는 술을 시켰다. 몇 잔만 마시면 정신 줄을 놓아 버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역시! 술은 독해야 제 맛이지.”
“크! 항상 이걸 마실 때면 숙부들과 아버지 몰래 마시던 화주가 떠오릅니다.”
“화주에 비하면 이건 술도 아니지.”
값으로 치면 화주 수십 병을 살 만한 술이 여신의 키스였지만 그래도 고향의 맛과 같을까.
하지만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래기엔 최고였기에 둘은 자주 여신의 키스를 즐기곤 했다. 몇 잔을 주고받은 둘이 한 병을 더 시키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술집의 정문이 소란스러워지더니 갑옷을 걸친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대부분이 평민들이라 기사들이 나타나자 순식간에 술집은 조용하게 가라앉았다.
술집 안을 한 차례 둘러본 기사들 중 하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테세우드 각하의 기사들이다. 공작 각하의 명을 전달하러 왔으니 모두들 주목하라!”
모두가 숨죽여 기사들을 지켜봤다.
잠시 뜸을 들인 기사가 조금 높아진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지난번에 징집에 대한 공고를 한 바 있음은 모두가 알 것이다. 공작 각하에 대한 충성으로 모든 영지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본 공국의 징집에 스스로 자원하였으나 유독, 이곳 아르소만은 아니었다. 해서 마지막으로 그대들에게 전한다. 이달 말까지 19세에서 30세 이하가 되는 남자들은 무조건 아르소의 북쪽에 주둔한 공국의 1군단 마법병과에서 신체검사와 적성 검사를 받아야 한다. 어기는 자가 있다면 법에 따라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웅성웅성!
다시 웅성거렸다. 징집은 곧 군인이 되는 것을 뜻한다.
제대로 수련을 받지 않은 이들 같은 사람들은 군대에 들어가 살아 돌아올 확률은 극히 미미했다. 전쟁이 발발하면 가장 선두에서 육탄 방패가 되는 것이 하급병사들의 주요 임무였기 때문이다.
흑야는 창밖을 슬쩍 쳐다보았다.
다른 기사들이 술집의 곳곳에 커다란 종이를 붙이고 있었다.
테세우드 공작의 직인이 찍힌 공고문이었다. 기분 좋게 술을 마시던 사람들은 기사들이 전한 공고령에 입맛을 잃은 듯 술잔을 깔짝거렸다.
몇은 노골적으로 기사들을 노려보며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선뜻 나서지는 못했다.
나서면 개죽음을 당하는 것은 정해진 사실이다. 싸워서 이길 힘도 없었지만 싸워서 될 자들이 아니었다.
테세우드의 기사들은 제국 내에서도 가장 영향력이 높은 자들이다. 자칫 그들의 심기를 거슬리면 영주라도 무사하기 힘들다. 모두가 테세우드 공작의 권력이 엄청났던 까닭이다.
“오늘의 경고를 잊지 마라!”
기사들이 물러갔다.
그러자 술집은 다시 소란스럽게 변했다. 곳곳에서 징집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왔다.
대부분이 이십 대 초중반의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이라 술집은 삽시간에 공국에 대한 성토장으로 바뀌었다.
“징집을 하다니…… 전쟁 준비라도 하는 걸까요?”
“모르지. 다크 영지에도 징집에 대한 공고를 보냈던가?”
“전혀…… 이럴 땐, 촌구석이 좋군요. 인구가 적으니 신경조차 쓰지 않은 모양입니다.”
“지금처럼 평화로운 시기에 징집령을 내리다니…… 확실히 웃기는 놈이군.”
술을 한 모금 머금은 흑야가 주변을 돌아보며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그 밝았던 사람들이 징집령을 듣고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로 바뀌어 있었다. ‘역시 인간이란 단순한 동물이야.’라고 생각한 흑야는 안주를 씹으며 혁련소를 쳐다봤다.
“그만 일어서지. 살 것도 있다면서?”
“그러지요. 술값은 숙부가 내십시오.”
“근위장이 영주 술값도 내야 하나?”
“하하! 나중에 한 방으로 갚겠습니다.”
둘은 값을 지불하고 밖으로 나섰다.
언제 붙었는지 공고령이 건물들의 곳곳에 도배되어 있었다. 말을 찾으러 술집의 마방으로 걸음을 옮기던 둘은 자신들의 말 주변에 서 있는 기사들과 일반 병사들로 보이는 자들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뭐 하는 거지?”
중얼거린 혁련소가 흑야를 쳐다봤다. 흑야의 얼굴이 순간 차갑게 굳어 갔다. 묻지 않아도 어떤 상황인지 대번에 깨달은 것이다.
그가 성큼 기사들에게 걸어갔다.
“이봐! 남의 말에게 무슨 짓이야?”
기사들이 둘을 돌아봤다. 아래위를 기분 나쁜 눈초리로 쓸어 본 기사들이 명령조로 말했다.
“공작 각하의 명령으로 기마병들이 사용할 말을 징집 중이다! 그대들의 소유인가?”
“누구 마음대로 남의 말을 함부로 가져간단 말이지?”
“지금 공무를 수행 중인 우리들에게 시비를 거는 것이냐?”
“시비? 웃기고들 자빠졌네.”
“뭐야! 이놈들이…….”
기사들이 검을 뽑아 들 시늉을 했다. 영주라도 테세우드 공작가의 기사들에겐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하물며 평범한 자들로 보이는 흑야가 오만한 태도로 굴었으니 기사들은 고리눈을 하고는 둘을 노려봤다.
“감히 우리가 누구인지 알고 그따위 불손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냐! 일가친척들을 모조리 노예로 만들고 싶으냐!”
“좋은 말로 할 때, 말에서 손을 떼고 꺼져. 테세우드의 자식 새끼라도 내겐 통하지 않는다.”
“감히 각하를 모욕하다니! 놈을 잡아라!”
명령이 떨어지자 기사들이 검을 뽑아 들고 우르르 달려들었다. 미간을 찌푸리고 섰던 혁련소가 앞으로 나섰다. 그러지 않았다면 주변은 금방 피바다로 되었을 것이다.
“영주들의 말도 징집 대상에 포함되는 것이오?”
“뭐, 영주? 누가 어디의 영주란 말이냐?”
“다크에서 왔소. 그곳의 영주이기도 하오만…….”
영주라는 말에 검을 뽑았던 기사들이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비록 영주들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테세우드의 기사들이지만 그들도 영주를 함부로 대해선 곤란하다. 황제가 인정한 남작의 지위를 지닌 귀족이 아니던가.
“젠장!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말을 할 것이지…… 모두 물러나라!”
수장으로 보이는 기사가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이건 도저히 영주에 대한 존중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태도였다.
“영주의 신표를 보여 주시오!”
“신표? 그런 게 있었소?”
“아니 뭐요? 영주라는 사람이 그것을 모른단 말이오?”
기사의 눈이 대번에 의심의 눈초리로 바뀌었다. 물러섰던 기사들이 다시 둘에게로 다가섰다.
“영주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렇소. 신표는 없으나 내가 영주임은 사실이오.”
“후후! 이거 말이 된다고 지껄이시나. 신표가 없는 영주라니? 여기가 무슨 전쟁터도 아니고 말이야. 이봐! 촌놈! 영주를 사칭한 죄가 참형에 속함을 알고는 있겠지?”
기사의 태도가 돌변했다.
쓴웃음을 지은 혁련소가 흑야를 돌아보며 손을 들어 올리는 시늉을 했다. 어쩔 수 없이 두들겨 패야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 흑야가 앞으로 나섰다. 그때 모두의 뒤쪽에서 청아한 음성이 들렸다.
“그분이 영주임은 제가 증명하죠!”
뜻밖의 상황에 혁련소와 흑야가 뒤를 돌아봤다.
아리안이 그곳에 서 있었다. 언제나처럼 은빛 갑옷에 탐스러운 금발을 늘어뜨린 그녀는 기사들을 보며 차갑게 말을 이어 갔다.
“무례하군요. 본 영주의 허락 없이 함부로 아르소에서 징집을 행하다니…… 정식으로 황실에 항의하겠어요.”
“그, 그건…… 공작 각하의 명령이 계셨소.”
“흥! 설마 공작 각하가 황제 폐하보다 우선한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 말에 기사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그 말보다는 그녀가 마스터라는 것이 그들을 온순하게 만들었다. 더욱이 그녀는 황태자가 점찍었다고 전해진 인물이니 당연히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아르소의 하얀 미간에 슬쩍 주름이 잡혔다.
“그만 물러가세요! 영주를 욕보인 행위만으로도 당신들은 교수형을 당할 수도 있음을 잊지 마세요.”
법으로만 따지면 그녀의 말이 옳았다.
그러나 눈앞의 기사들은 그런 법의 위에서 살아가는 테세우드의 가신들이다. 당연히 그녀의 말에 겁을 집어먹지 않았다. 하지만 더 버틸 수는 없는 상황임을 깨닫고는 말을 타고 사라졌다.
가면서도 뒤를 돌아보며 불만을 늘어놓는 기사들.
그런 기사들을 응시하던 흑야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살기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어쩌면 아리안의 등장으로 가장 혜택을 입은 자들은 기사들이라고 봐야 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흑야에 의해 감히 거부할 수 없는 죽음의 공포를 맛보았을 것이다.
혁련소가 가볍게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나타냈다.
“고맙습니다!”
“별말씀을…… 여기서 또 뵙는군요, 영주님!”
“그렇군요. 아르소의 술맛이 최고라기에 들렀다가 그만…… 하하! 아무튼 큰 신세를 졌습니다, 아리안 영주님!”
“소문은 많이 들었어요. 영지민들을 위해 모든 재산을 내놓으셨다죠? 아르소의 영지민들도 다크 영주님의 선정을 칭송하고 있어요. 귀하신 분이 오셨으니 제가 직접 모시지요. 두 분을 성으로 모시세요!”
기사들이 말을 끌어와 혁련소와 흑야의 앞에 섰다.
오만했던 조금 전의 기사들과는 달리 그들에겐 동작 하나하나에 절도와 예절이 보였다. 내심 가볍게 감탄하였다. 혁련소가 흑야에게 눈웃음을 짓고는 말 위에 올랐다. 흑야도 어쩔 수 없이 말 위로 올랐다.
아르소가 탄 마차가 앞장을 서고 그 뒤를 혁련소와 흑야가 따랐다. 십여 명의 기사들이 마차와 둘의 주변을 호위하며 아르소의 성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