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0
<귀환무사 260화>
귀환무사 2부
35화
“언제 봐도 믿기지 않는 신기한 광경입니다.”
하늘에 뜬 두 개의 달을 보며 혁련소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힐끗 달을 쳐다봤던 흑야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신기한 게, 저것뿐이겠나. 난 아직도 모든 게 신기할 뿐이야. 먹는 음식까지도 말이야. 빵이 뭐야, 빵이…….”
“하하! 이젠 식습관은 바뀔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전 간편하고 좋기만 하던데…….”
“마음에 들지 않아.”
둘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느릿하게 말을 몰았다.
“아르소가 보이는군요. 과연 우리가 사는 곳보단 훨씬 크고 발전한 모습입니다. 이 시간에 저런 불빛이라니…….”
먼 곳에서 거대한 불꽃의 덩어리가 보였다.
아리안이 영주로 있는 아르소가 보이자 둘은 잠시 말을 멈추고 야경을 감상했다.
길게 늘어진 도시는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각에도 불구하고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도시의 발달을 불꽃이 대변해 주고 있었다.
“모든 공국의 왕들이 탐을 낼 만도 하군요. 성곽을 끼고도는 강에다가 저 넓은 곡창 지대를 보십시오. 제대로 확장하면 제국의 수도로 삼아도 전혀 모자라지 않을 듯싶습니다.”
“여인이 다스리기엔 지나치게 넓고 비옥한 땅이지. 그녀가 마스터의 반열에 오르지 않았더라면 벌써 누가 먹어도 먹었을 곳이다.”
“그러고 보면 참 대단한 여인입니다. 마스터라면 중원의 시각으로 본다면 절정을 초월한 수준이 아닙니까? 중원에서도 그 정도 수준의 여인은 흔치 않았는데 말이지요.”
흑야의 얼굴에 옅은 그리움이 떠오른다.
언제나 가슴 한구석을 진하게 물들인 그리움은 때를 가리지 않고 스멀거리며 생겨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흑야의 얼굴을 흘긋거린 혁련소가 말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빨리 가시죠. 우리 때문에 다른 영주들이 꽤 고생하고 있을 테니…….”
“……!”
둘을 실은 전마가 바람처럼 앞으로 뛰쳐나갔다.
* * *
여인의 농염한 육신을 탐하던 레이놀드는 근위대장의 보고를 받고 거처에서 나왔다.
임시로 세워진 거처라지만 거대한 쇠가죽을 염색하고 그 위에 온갖 장식을 박은 천막은 황제의 그것을 방불케 했다.
“괘씸한 놈들! 이제야 도착을 하다니…….”
“그런데 조금 이상합니다. 테베스가 아닌 다른 자들이 왔습니다. 더욱이 흑발을 한 자들이 둘씩이나 됩니다.”
“뭣이! 흑발? 혹시 흑안은 아니더냐?”
“혹시나 해서 자세히 살폈습니다만 다행히 옅은 갈색의 눈동자를 지녔으니 소문의 그자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
레이놀드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지금 모든 대륙을 통틀어 가장 소문이 거창하게 난 존재들이 바로 흑안의 마검사란 존재였다.
부정을 저지르고 백성을 괴롭히는 탐관오리들은 그들을 지옥의 사자처럼 여긴다. 언제 어디서 그의 검이 목을 자르고 지나갈지 몰라서였다.
스스로가 좋은 귀족이라 여기지 않는 레이놀드가 긴장하는 것은 당연했다.
둘은 빠르게 영주들이 모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투두둑!
통나무가 울음을 터뜨리며 굵은 불줄기를 뿜어냈다.
동이 트는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영주들은 모두 한곳에 모여 불을 쬐고 있었다.
조금 전에 도착한 혁련소와 흑야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사들이 건넨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혁련소는 남자처럼 갑옷을 걸친 아리안을 흘긋거렸다.
역시 소문대로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미녀였다. 게다가 어깨에 걸친 그레이트 소드와 이질적인 기운이 한데 어우러져 묘한 매력을 발산했다.
“상당한 미인이군.”
“괜히 제국의 삼대미녀란 소릴 듣겠습니까.”
“얼굴보단 검이 눈길을 끄는군. 저 정도면 남궁세가의 중검은 저리 가라겠어. 파괴력을 우선하는 여검사라…… 확실히 대단한 여인이군.”
흑야의 시선은 아리안의 그레이트 소드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 세상에 온 지 오 년이 지나는 동안 여인이 그레이트 소드를 주병으로 삼은 것은 그도 처음 보았다.
물론 마스터의 경지를 바라보는 여인 또한 아리안이 처음이다.
“저자군요. 낙하산 백작이라는 자가…….”
“소문에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자라고 들었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군.”
레이놀드가 근위대장과 함께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장신에 상당한 덩치를 자랑하는 레이놀드에게 던져진 흑야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영주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혁련소와 흑야도 느릿하게 일어났다.
“다들 모였군. 늦은 자들은 다음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니 각별히 유의하도록!”
레이놀드가 백작의 권위를 한껏 발산하려는 듯 영주들에게 위압적인 태도로 말했다. 짐짓 근엄한 시선으로 영주들을 느릿하게 쓸어 본 그가 혁련소를 보며 물었다.
“그대가 테베스의 영주인가?”
“지금은 다크로 바뀌었지요.”
“내가 알고 있는 그곳의 영주는 분명 테베스였다. 어찌 된 일이지?”
“몇 개월 전에 바뀌었습니다. 영지를 꼼꼼히 챙기다 보니 아직 보고 드리지 못한 점, 이해하십시오!”
말은 무척이나 정중했으나 표정과 태도는 그렇지 않았다. 그것이 다소 못마땅했던 레이놀드가 인상을 쓰고서 다시 물었다.
“영주의 자리에 취임하면 상신 기간이 일주일로 정해진 것이 제국의 법도이거늘, 법을 어기는 자가 어찌 영지를 다스릴 수 있단 말인가! 그렇지 않은가?”
“영지에 통신마법구가 없는 바람에 그만…….”
“통신마법구가 없다니…… 그러고도 영주라고 할 수 있는가? 촌구석은 어쩔 수가 없군! 그건 그렇고 저자는 누구냐?”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흘린 레이놀드가 흑야를 가리키며 물었다.
흑야가 자신의 시선을 감히 피하지 않자 그는 눈매가 매섭게 변했다. 근위대장이 험악한 표정으로 흑야에게 시선을 돌릴 것을 눈빛으로 지시했다.
그때야 흑야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돌아가는 그의 눈빛이 순간 섬뜩함을 발산했으나 본 자는 아무도 없었다.
“영지의 근위장입니다.”
“근위장? 푸하하! 꼴에 영주랍시고 별걸 다 하는구나!”
“하하하!”
근위대장과 일부 영주들이 혁련소를 보며 비웃음을 터뜨렸다. 흑야의 눈이 섬광을 발한 것을 본 혁련소가 전음으로 그를 말리고는 환하게 웃었다.
“하하! 같은 권역에 계신 영주님들을 뵙게 되어 무척 반갑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속이 뒤틀린다. 적당히 해.]
[싸워서 좋을 게 있겠습니까? 거슬려도 좀 참으세요.]
흑야는 혁련소의 밝은 얼굴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그러고는 레이놀드를 슬쩍 쳐다보았다. 어울리지 않는 무게를 잡으려고 기를 쓰는 그를 보자 다시금 죽이고 싶은 충동이 생겨났다.
중원에서나 이곳에서나 저런 종자들을 싫어하는 성정은 변함이 없었다.
레이놀드의 무게 잡기는 이십 분 정도 더 이어졌다.
먼동이 트며 붉은 일출이 시작되자 레이놀드는 자신의 천막으로 들어가 버렸다.
잠을 설친 탓에 오후에 출발할 것을 지시하고는 이내 코를 골며 잠에 빠졌다.
영주들도 설친 잠을 자기 위해 각자의 마차로 들어갔다. 아리안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본 혁련소와 흑야는 마차가 없는 탓에 근처의 나무 밑에 가서 앉았다.
“놈의 행차에 함께할 생각이냐?”
“어쩌겠습니까. 적당히 비위를 맞춰 주고 돌아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지나치게 느긋하군. 언제까지 영지에 머무를 작정이지? 그 아이를 찾으려면 세상을 돌아다녀도 쉽지 않을 터인데…….”
“당분간은 영지에 머무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머무르면서 마법사들을 구해 볼 생각입니다. 텔레포트가 가능한 마법사만 구해지면 그녀를 구하는 일이 훨씬 수월해지지 않겠습니까?”
“그 정도면 최소 5클래스를 넘어야 한다. 넘어섰다고 해도 가능할지도 의문이고 말이야. 그리고 그 정도의 놈들이라면 벌써 모든 제국이나 왕국에서 손을 뻗쳤을 것이다. 그런 놈들을 어디서 어떻게 구한단 말이냐? 설사, 지금껏 아무 곳에도 소속되지 않은 자가 있다고 치자. 가만히 있어도 귀족 작위가 주어지는데 과연 촌구석까지 오려고 하는 놈이 있을까?”
“방법이 생기겠지요. 가급적, 긍정적으로 생각하고자 마음먹었습니다. 그동안 너무 서둘렀습니다. 천천히, 확률이 높은 쪽으로 움직이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이 서는군요.”
물을 한 모금 마신 흑야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였다.
“네 좋을 대로 하자. 눈 좀 붙여 둬. 저 돼지 같은 놈이 일어나려면 꽤 걸릴 테니…….”
“그러지요.”
둘은 이내 눈을 감았다.
사실 그들 정도의 고수는 그다지 수면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피곤하면 운기를 통해 해결하면 그뿐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와서 그들은 조금 변해 있었다.
세상 천지에 아는 사람이라곤 단둘뿐이니 중원에서와는 달리 모든 면에서 다소 느긋해진 것이다.
* * *
아리안은 자신의 마차에서 시녀가 끓여 준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마법주머니에서 거울을 꺼낸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초승달처럼 휘어진 눈썹을 곱게 찌푸렸다.
“아가씨께서 보셔도 너무 아름다우시죠?”
호위 여기사이기도 한 시녀가 짐짓 질투하는 듯 얼굴을 살짝 찌푸리고 물었다.
“필요 없어, 미모 따위…….”
“에그…… 또 저러신다. 그 말씀을 세상의 여자들이 들었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나하곤 상관없어. 한 잔 더 마실래.”
무뚝뚝하게 대답한 아리안이 찻잔을 내밀었다.
마법램프로 끓인 차의 맛이 일품이다. 천천히 향을 음미하며 차를 즐기던 아리안의 머릿속으로 문득 한 사내가 스치고 지나갔다.
흑발을 늘어뜨리고 세상의 모든 차가움을 한 몸에 지닌 듯한 사내들의 영상이었다.
‘낯이 익어…….’
그랬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들인데 가슴 한구석이 가볍게 뜀을 느꼈다. 그리고 언젠가 만났던 사람들처럼 친숙하게 느껴졌다.
혁련소의 준수한 얼굴이 떠올랐다.
순간 그녀의 새하얀 얼굴이 슬쩍 붉어졌다.
‘남자 따위…… 필요 없어!’
하지만 이내 본연의 차가움을 되찾은 그녀는 마차의 창을 통해 밖을 내다봤다. 눈부신 태양이 초원을 뜨겁게 달구려는 듯 빛을 뿌렸다.
레이놀드 백작의 기사들과 각 영주들이 데려온 기사들이 각자 호위하는 마차의 주변을 철통처럼 경계하는 모습에 살짝 인상을 찌푸린 그녀는 레이놀드 백작의 문양이 표시된 마차 위에 홀로 앉아 있는 마법사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로브를 걸친 그는 전날 밤부터 신경을 자극하던 그 마법사였다.
‘저 사람…… 흑마법사가 분명해.’
지나치게 음울한 기운을 뿌린다.
대부분의 흑마법사들이 지닌 공통된 분위기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적어도 백작 정도의 귀족이라면 절대 흑마법사를 대동하진 않는다.
상대적으로 지탄받는 대상인 흑마법사를 대동하면 상당한 비난을 받게 된다. 약아빠진 레이놀드가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진 않을 거다.
‘기분 나빠, 저 사람…….’
보는 것만으로 꺼림칙하며 싫었다.
“왜 그러세요?”
“응? 아니야. 아무것도…… 좀 자 둬. 조금 후면 며칠 동안 꼬박 시달려야 할 거야.”
“아가씨도 좀 주무세요. 마법알약을 드시는 것보다 그냥 수면을 취하는 게 건강에 좋대요.”
“알았어.”
아리안이 갑주를 벗고 막 융단 위에 누우려는 때였다. 갑자기 마차가 크게 휘청거렸다. 동시에 사방에서 말들의 울음이 크게 들려왔다.
“어머! 무슨 일이지?”
시녀가 놀라 호들갑을 떨었다.
황급히 갑주를 걸친 아리안과 여호위기사가 밖으로 나섰다. 모든 마차의 말들이 길길이 날뛰었다. 기사들이 말들을 진정시키려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