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9
<귀환무사 259화>
귀환무사 2부
34화
“파충류에 두 분을 비교할 셈이냐?”
“하하하! 파충류? 하하! 그렇군요. 이 세상의 사람들이 신처럼 여기는 존재를 파충류라고 생각하는 분은 아마 숙부님뿐이겠지요? 하하하!”
혁련소는 허리까지 젖히며 크게 웃었다.
흑야가 손을 뻗었다. 팔 위로 내려앉으려던 독수리가 갑자기 ‘퍼드득’거리더니 바닥으로 사정없이 곤두박질했다.
흑야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미안하다. 난 사람 흉내를 내는 네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퍽!
발길질에 독수리는 비명을 지르며 멀찌감치 날아가 처박혔다. 죽지는 않았는지 꿈틀거리며 두려움에 찬 눈으로 흑야를 쳐다보았다.
“전할 말만 전하고 얼른 꺼져!”
“레이놀드 백작 각하의 영접을 명하노니 남작 테베스는 지금 즉시 아르소 영지의 초원으로 와서 각하를 영접하라!”
독수리의 입에서 사람의 말이 흘러나왔다.
흑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퍽!
또다시 이어진 발길질에 독수리가 저만치로 날아가더니 그대로 축 늘어졌다. 즉사한 것이다.
혁련소가 고개를 저으며 흑야를 쳐다봤다.
“하여튼, 숙부의 그 성미는…… 아니, 따지고 들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새 대가리 주제에 반말은…….”
“하하!”
혁련소가 크게 웃었다.
죽은 독수리의 몸에 장력을 퍼부어 가루로 만들어 버린 흑야가 술잔을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아직 놈들은 네가 이곳의 영주가 된 것을 모르고 있는 모양이군. 테베스라면 네 손에 죽은 그놈이 아니냐?”
“워낙 구석진 곳이라 그들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군요. 뭐, 그게 우리에겐 더 좋은 일이지요. 어쩔까요? 그냥 무시하고 가지 말까요?”
“네 뜻대로 해. 난 상관없다.”
“백작의 목을 자르려는 생각엔 변함이 없습니까?”
“생각 중이다.”
혁련소가 가볍게 웃었다.
“중원에서의 숙부라면 몰라도 지금의 숙부는 절대 놈의 목을 자르진 못할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난, 변한 거 하나도 없다.”
“하하! 영지민들 때문에라도 숙부는 절대 놈의 목을 자르지 못할 겁니다. 우리가 백작의 목을 자르는 것이야 사실 마음먹으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지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우린 다시 세상을 떠돌아야 하고 이곳에 남겨진 영지민들은 다시 힘들었던 옛 시절로 돌아가게 되겠지요. 그게 걱정되지 않습니까? 아니, 분명 그 걱정을 하고 계실걸요?”
흑야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만해라.”
“하하하! 하여튼 정말 숙부께서 이렇게 변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아버님과 숙부들이 아시면 두고두고 놀림거리가 될 일입니다!”
틀린 말이 아니다.
중원에선 그야말로 죽음의 사신으로 불리던 그다. 그러나 이 세상에 와서는 누구보다 사람을 사랑하게 된 그였다.
옛날처럼 악인이라면 무조건 베고 보는 그가 아니었다. 반드시 죽여야 할 자들만 죽이고, 비록 악인이라도 개과천선의 여지가 보이면 미련 없이 놓아주는 그런 흑야로 변해 있었다.
그 하나로 인해 죽음의 공포에 떨었던 중원의 사람들이 만약 이 사실을 안다면 왜 진즉에 그러지 않았냐고 성토를 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혁련소가 말을 이었다.
“여행을 할 겸, 한번 가 보는 것도 괜찮겠습니다. 이 기회에 아르소 영주의 미모도 구경해 보도록 하지요.”
흑야는 혁련소를 힐끗 응시했다.
아르소의 영주를 거론할 때 혁련소의 눈빛에 아픔의 기운이 맺히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헤어져 버린 연소민. 그녀를 두고 단 한 번도 다른 여인은 쳐다보지도 않았던 혁련소다.
흑야는 내심 한숨을 내쉬고는 혁련소의 어깨를 다독거려 주었다.
“언젠가는 만나게 될 거다.”
* * *
여전히 지붕 위에서 꼼짝 않고 앉아 있던 마법사 요란의 얼굴에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감히 레이놀드의 전령을 죽이는 자가 있었다니…….’
독수리에 심어 준 자신의 마법이 갑자기 사라졌다.
독수리가 죽으면 저절로 자신에게 전해지는데, 이는 분명 독수리가 죽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요란의 눈동자에 흥미로움이 나타났다.
‘후후! 누군지 꽤 흥미로운 자가 있었군. 이곳은 중소 규모의 영지뿐이다. 고작 그 정도의 세력을 가진 영주가 무슨 배짱으로 이런 일을 벌인 거지? 나중에 오게 되면 알게 될 테지.’
자신의 마법은 소멸될 때, 그 흔적을 남긴다.
직접적으로 상대한 자의 육신에 아주 미세한 양의 마나가 보름 정도 머무르게 된다. 그 흔적으로 상대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영주가 있다. 돼지!’
그는 여전히 흥청거리는 레이놀드 백작을 보며 차갑게 비웃었다. 그때 먼 곳에서 먼지가 일며 마차 한 대가 빠르게 달려오고 있는 것이 요란의 눈에 보였다.
상당히 화려한 마차였다. 요란의 눈이 투명한 광채를 뿜었다.
아주 먼 거리도 똑똑히 볼 수 있는 특수 마법을 펼쳐 마차를 살폈다.
‘아르소의 영주!’
요란은 마차의 외벽을 뚫고 그 안에 앉아 있는 여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 가슴 떨리게 만드는 금발의 여인이 다소 차가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는데, 바로 제국의 삼대미녀로 불리는 아르소의 영주 아리안이 그녀였다.
그녀의 복장은 여타, 여인의 그것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은색갑주에 머리엔 투구까지 쓰고 있었는데, 그런 그녀의 품엔 여인이 사용하기엔 지나치게 무겁고 거대한 그레이트 소드가 들려 있었다.
‘후후! 역시 제국 최초의 여마스터다운 모습이군.’
그랬다.
아리안은 제국 최초의 여마스터였다.
그녀는 용맹한 기사이자 후퇴를 모르는 불굴의 여전사로 불린다.
오러를 두른 그레이트 소드를 휘두르며 적진으로 돌진하는 그녀를 두고 세인들은 금발의 광전사로 부르기도 했다.
여인에게 붙이기엔 지나치게 섬뜩한 면이 있었다. 그만큼 그녀의 용맹은 전 대륙에 소문나 있었다.
두두두!
마차는 빠르게 레이놀드 백작이 흥청거리는 지척까지 다가왔다. 그 속도가 엄청남을 본 레이놀드 백작의 근위병들이 검을 뽑아 들고 앞을 막아서자 그제야 마차는 자욱한 먼지를 일으키며 멈추었다.
덜컹!
마차의 문이 열리며 햇빛에 번쩍이는 눈부신 투구에 금발을 날리며 아리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레이놀드의 두 눈이 이내 탐욕으로 물들었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아리안의 미모는 실로 대단했다. 마치 미의 요정에게 갑옷을 걸쳐 놓은 것처럼 눈부신 외모였다.
“신분을 밝히시오!”
근위대장이 정중하게 물었다.
물론 아리안의 신분을 알면서도 형식적인 절차 때문에 물은 것이다.
아리안의 아름답게 빛나는 눈동자가 주변을 느릿하게 쓸어 봤다. 레이놀드를 거쳐 마차 위의 요란에게서 그녀는 시선을 멈추었다.
요란은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저런 것이 바로 마스터의 반열에 오른 강자들의 눈빛임을 그는 새삼 느꼈다.
마스터는 마법사들의 천적이다. 하지만 요란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살짝 이채를 머금었던 아리안이 시선을 돌렸다.
“아르소의 아리안이 백작 각하를 뵙습니다.”
그녀는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결코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적당한 수준의 태도였다. 몸짓 하나에 고매한 품격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어지간한 남자들도 고개를 흔드는 용맹함이 숨겨져 있음을 모두는 알고 있다.
해서 레이놀드의 기사들도 하나같이 경외감을 머금은 채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서 오게! 그대가 그 유명한 아르소의 영주 아리안이었군. 과연 소문대로 여신이 강림을 한 것 같네, 으허허허!”
“제가 제일 빨리 온 것 같군요. 다른 영주들이 올 때까지 저는 제 마차에서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정의 기복이 심한 것일까?
품격이 느껴지던 조금 전과는 판이한 차가움이 그녀에게서 발산되었다.
여인의 나긋함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태도였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녀의 미모를 더욱 돋보이게 해 주었다.
극미의 아름다움과 차가움이 공존하니 그것만큼 사람의 심장을 떨리게 하는 것이 또 있으랴.
“마차로 가시지요.”
시녀의 안내를 받으며 아리안은 성큼 마차로 걸음을 놓았다.
갑주를 걸쳤어도 육감적인 허리의 곡선은 모두의 심장을 뜨겁게 달구어 놓기에 충분했다.
레이놀드의 탐욕이 점점 더 짙어지는 순간이었다.
제5장 인연
아리안이 도착하고 한 시간 정도가 지나자 두 명의 영주들이 연이어 도착했다.
아리안과는 달리 그들은 레이놀드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온갖 짓을 다 떨었다. 그들을 쳐다보는 요란의 눈이 레이놀드를 볼 때와 같아졌다.
속이 울렁거림을 참아 낸 그는 그들에게서 마나의 흔적을 살폈다.
‘아직 그자가 오지 않았군.’
독수리에게 심어 놓았던 마나의 흔적은 그들에게서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네놈들 따위가 그런 행동을 할 리 없지.’라고 생각한 요란은 마차에 등을 대고 누웠다.
초원 위로 어둠이 밀려들었다.
술자리는 그때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전장에서 잔뼈가 다져진 레이놀드 백작은 야외에서의 술자리를 광적으로 좋아했다. 물론 지금도 그런 이유 때문에 초원에 술판을 벌여 놓고 영주들을 오라고 부른 것이다.
하지만 제법 시간이 지나도 나머지 둘이 오지 않자 레이놀드 백작의 얼굴이 슬슬 붉어졌다.
화가 난 것이다. 아리안이라도 술판에 끼었다면 나머지 둘이야 오지 않아도 그만이라고 여겼겠지만, 그녀는 여전히 마차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기사들에게 발끈 성질을 부렸다.
“이봐! 왜 아직 오질 않는 거지? 그리고 화이트도 올 때가 지났지 않느냐?”
화이트는 레오날드 백작이 무척 아끼는 애완용 독수리다. 물론 흑야의 발길질에 죽어 버린 그 독수리다.
요란은 화이트의 죽음을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던 탓이다.
근위대장이 조금은 당황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며칠 전까지 이곳 북부 지역에 꽤 많은 비가 내렸다고 합니다. 그런 연유로 마차의 속도가 더딘 듯하니 조금만 더 기다리시지요. 그리고 화이트는 종종 오늘처럼 늦었던 적이 있었으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오다가 사냥이라도 하는가 봅니다.”
“크음! 아직 오지 않은 자들이 북부 지역의 영주들인가?”
“그렇습니다!”
“그래도 너무 늦잖아! 이봐, 술 남은 것 더 가져와!”
술이 제법 취한 레이놀드 백작의 말투는 전쟁터를 누빌 때의 거친 스타일로 변해 있었다.
품위를 지키려고 애쓰는 평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 모습에 영주들은 내심 그를 비웃었다.
그들은 품위와 격식을 목숨처럼 여기는 전형적인 귀족들. 당연히 전쟁에서 공을 세워 하루아침에 신분 상승을 이루어 낸, 낙하산 귀족의 전형인 레이놀드 백작이 그들의 눈에 찰 리 없었다.
그가 지닌 배경이 두려워 굽실거릴 뿐, 진정으로 그에게 복종하는 것은 아니었다.
* * *
두 필의 백마는 적당한 속도로 어둠을 가르며 달렸다.
말 위의 인물들은 모두 긴 흑발에 제국의 복장과는 다소 다른 흑의를 걸치고 있었는데, 레이놀드에게로 향하는 혁련소와 흑야였다.
호위로 따라오겠다는 사람들을 만류하고 오직 둘만이 길을 나선 지 하루가 지났다.
일부러 천천히 주변 경관을 구경하며 다니던 터라 아직까지 아르소 영지에도 들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어둠이 내린 대지를 두 개의 달이 고고함을 뽐내며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