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4
<귀환무사 254화>
귀환무사 2부
29화
대륙 전체에 소문이 자자한 흑발의 마검사.
대마법사조차도 함부로 상대하지 못한다는 그가 눈앞에 떡하니 서 있었으니 죽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여겼다.
바닥에 쓰러진 마법사들을 쳐다보던 혁련천후의 눈빛이 일순간 매섭게 변했다.
연못에서 진천의 환술로 보았던 영상 속의 인물, 검은 천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뒤집어쓴 그 영상 속의 인물과 마법사들의 복장이 무척이나 비슷했다.
그가 진천을 찾았다.
“환술을 시전 중입니다.”
“음…….”
진천의 주변이 황금색으로 번쩍였다.
진천과 드웨인의 육신을 두른 황금색 빛들은 한동안 둘의 육신을 감싸며 움직이더니 어느 순간 연기처럼 사라졌다. 동시에 진천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알아냈냐?”
“하하! 제가 누굽니까? 천재 중의 초천재, 진천이 아닙니까?”
“그래, 니 팔뚝 굵다, 망할 놈아.”
“얼른 말해.”
진천이 혁련천후의 곁으로 다가왔다.
“알아내었느냐?”
“장소가 그래서 많은 것을 물어보지는 못했습니다. 대신 이곳엔 통역을 해 주는 마법 구슬인가 뭔가가 있다고 하는군요. 자신의 집에 그것이 있으니 함께 가면 그것을 주겠답니다.”
“마법 구슬? 통역을 해 준다고? 아니, 구슬이 사람 말을 통역해 준단 말이지? 저 노랑머리 새끼가 거짓말한 거 아니냐!”
왕전이 험악한 얼굴로 드웨인을 노려보았다.
그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구슬이 사람의 말을 대신해 주다니.
진천이 웃으며 말했다.
“믿기지 않지만 사실입니다. 만약 그가 거짓말을 했으면 벌써 뇌가 터져 죽었을 테니까요. 솔직히 저도 그런 게 있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가서 확인은 해 봐야지 않겠습니까.”
“기왕 물어본 거, 좀 더 많은 것을 물어보지 그랬냐? 고작 그거 하나 얻어 내고 말았냐?”
조윤이 핀잔을 주자 진천이 짐짓 눈을 부라렸다.
“어허! 그게 얼마나 많은 내공을 필요로 하는지 알고 그런 소릴 합니까? 한번 시전하면 며칠을 삼류 허접이처럼 살아야 한다고요!”
“그러기에 진즉 영단 좀 처먹고 내공을 길렀어야지, 자식아!”
“내공이 하루아침에 쌓인답니까?”
왕전이 괜히 끼어들었다가 진천이 버럭 성을 내자 슬쩍 뒤로 물러섰다. 그를 노려본 진천이 혁련천후에게 말했다.
“일단은 저들을 따라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법 구슬이라는 것을 얻는 것이 우선이지 않겠습니까?”
“그러지.”
혁련천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쓰러져 있는 마섭사들을 응시했다.
“저 복장, 네가 본 것과 비슷하지 않나?”
“오! 그렇군요. 맞습니다! 분명 놈도 저런 복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햐! 이거 우리가 제대로 왔군요.”
진천이 놀랍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했다.
“좋은 놈들인가?”
그 물음에 진천이 뚫어져라 마법사들의 눈을 쳐다봤다. 그러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악기로 가득한 놈들입니다. 사람도 엄청나게 많이 죽인 것 같습니다.”
“죽여.”
“……옛?”
“나쁜 놈들이면 살려 둘 필요가 없겠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북궁천소가 기다렸다는 듯이 터벅터벅 마법사들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그의 손이 허공을 슬쩍 가르고 지나가자 다섯의 숨이 그대로 끊어졌다.
그 모습을 드웨인과 욘크 등은 크게 놀랐다.
‘이게 아닌데…… 왜 이렇게 쉽게 사람을 죽이지?’
흑안의 마검사들은 절대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 설사 상대가 적이라도 마찬가지다. 한데 눈앞의 이들은 마치 벌레를 죽이듯 마법사들을 죽이지 않는가.
‘다른 자들일 수도 있다. 아! 큰일이다…….’
드웨인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고 올라오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 * *
아이는 손에 든 작은 보따리를 쳐다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하! 이거면 엄마가 굶지 않아도 돼.”
붉게 상기된 얼굴은 뛰어가는 내내 미소를 머금었다. 가끔 뒤를 돌아볼 때면 사슴처럼 큰 눈망울엔 존경이 어리곤 했다.
“내가 커서 어른이 되면 꼭 저분들처럼 될 거야! 반드시…….”
스스로 그렇게 수백 번을 다짐하며 아이는 숨이 턱까지 차오르도록 뛰었다.
인가가 드문 한적한 곳에 초라한 집 하나가 있었고, 아이는 그 집에 이르러서야 걸음을 멈추고는 숨을 쌕쌕거렸다.
“엄마!”
덜컹!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서자 쾨쾨한 냄새가 아이의 코를 찔러 왔다. 아이에겐 익숙한 냄새다.
낡은 침상에 누워 있던 중년 여인이 힘겹게 고개를 들어 아이를 바라보았다.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 아이를 바라보던 여인은 아이의 손에 쥔 보따리를 보고는 눈을 가늘게 했다.
“그게 뭐니?”
“엄마! 이제 굶지 않아도 되고, 아픈 거 고칠 수도 있어!”
“그게 뭐냐니까?”
“헤헤! 이것 좀 봐!”
챠르륵!
아이가 낡은 탁자 위에 뭔가를 쏟아 냈다.
창을 뚫고 들어온 햇빛에 반짝이는 황금색 동전들을 본 여인의 얼굴이 차갑게 변했다. 결코 아이의 손에 쥐어질 물건들이 아니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났을까. 여인은 몸을 일으켜 아이의 손을 거머쥐었다.
“루크! 너 이게 어디서 난 거니?”
“왜 그래, 엄마?”
좋아할 줄 알았던 엄마가 화를 내자 아이는 울먹였다. 여인이 다그쳤다.
“바른 대로 말해! 이 돈! 어디서 난 거지?”
“훔친 거 아냐. 다크 남작님이 주셨단 말이야. 맛있는 거 사 먹고 엄마 약도 사 드리라고…….”
“뭐? 다크 남작님이…… 그게 정말이니?”
“응! 그리고 나보고 엄마 병이 다 나으면 남작님 성으로 함께 들르라고도 하셨단 말이야. 정말이야, 훔친 거 아니야.”
눈에 눈물을 그렁거린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 루크! 미안해. 엄마가 너를 그렇게 보았다니…….”
여인이 아이를 끌어안고는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연신 미안하단 말을 흘려 냈다.
“엄마! 나 배고파.”
“그래! 조금만 기다려. 엄마가 곧 밥을 지어 줄게.”
여인이 눈을 훔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구석에 마련된 낡은 조리 시설로 걸어가던 그녀가 그 자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시커먼 그림자가 그곳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자가 그녀를 향해 다가오며 말했다.
“오해하지 마시오. 그냥 아이가 돈을 지니고 가는 것이 염려되어 따라온 것이오.”
“어! 털보 아저씨!”
“하하! 그래 털보 아저씨다.”
아이가 반갑게 그를 맞이하자 여인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림자가 앞으로 슥 나서자 장대한 체구에 얼굴의 반을 수염으로 뒤덮은 이십 대 후반의 청년이었다.
손에 커다란 뭔가를 든 그는 여인에게 허리 숙여 인사를 하고는 그것을 여인에게 내밀었다.
“이건 남작님께서 드리는 것입니다. 부디 거절치 마시고 받아 주시지요.”
여인은 남작이 거론되자 황송하다는 듯 허리를 숙였다.
청년이 내민 것은 커다란 소의 뒷다리였다. 일개 여인이 받기엔 지나치게 무거울 만큼 큼지막했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청년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고기를 주방의 한쪽에 내려놓았다.
“아저씨! 배고프면 밥 먹고 가세요!”
“밥? 밥 좋지! 제가 먹을 밥도 있습니까?”
“아! 이런……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곧 식사를 해 올리겠습니다.”
“하하! 이거 한 끼 신세를 지겠습니다, 부인. 아!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저 고기를 좀 썰어 놓겠습니다.”
여인이 두 팔을 휘저었다.
“아, 아닙니다! 미천한 곳에서 어찌…….”
그 말에 웃음을 머금었던 청년의 정색으로 변했다. 여인이 그런 청년을 보고는 자신이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은 아닌가 싶어 두려움을 가졌다.
청년이 여인을 보며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적어도 우리 남작님의 권역에선 누가 미천하고 누가 잘나고, 그런 거 따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분께선 신분의 고하는 어디까지나 사회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장치로만 여기십니다. 앞으로 다시는 부인께서 스스로 미천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여기 루크를 봐서라도 말입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옛날 버릇이…….”
여인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혔다.
평생을 포악한 영주의 영주민으로 살면서 착취를 당해 온 그녀였다. 남편을 잃었으며 인생을 잃었다. 하루 한 끼 식사를 하는 것만으로 신에게 감사했던 그녀는 언제부턴가 자신들의 영주가 바뀌었음을 알게 되었다.
영주가 바뀐다고 최하위 계급인 소작농들이 달라질 건 없다. 전 영주에게 하던 대로 생산한 곡물의 팔십 퍼센트를 바치고 나머지로 생활을 이어 가는 것이 그녀의 삶이었다.
그나마 그것도 몸에 병이 들면서부터 소작을 하지 못하게 된 그녀는 영주의 문책이 두려워 하루하루를 가슴 졸이며 살아야만 했다.
하지만 바뀐 영주는 세금을 바치지 못하는 그녀에게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
세금을 바치지 못하면 아이를 데려갔던 전 영주와는 달리 생명처럼 소중한 아들도 데려가지 않았다.
다크 남작!
여인은 그 이름을 떠올리며 기어코 눈물을 흘려 냈다.
“엄마! 울지 마. 이 아저씨 무서운 분 아니란 말이야.”
“응! 그래.”
“하하!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부인! 제가 이래 봬도 음식 솜씨가 제법 뛰어나답니다. 이봐! 루크! 오늘 스테이크 어때?”
“우와! 스테이크 먹고 싶어요!”
루크가 눈을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청년이 여인을 자리에 일부러 앉히고는 요리에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여덟 살의 어린 루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쇠고기로 만든 스테이크를 먹게 되었다.
* * *
다크 영지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근에서 가장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영지였다.
인구수도 적고, 땅도 좁았으며, 주변에 강성한 영지들에 둘러싸여 있었던 까닭에 제대로 발전을 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다크 영지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새롭게 영주가 된 한 사람 때문이었다.
그런 다크 영지의 북쪽에 자그마한 성이 있었다. 영주가 거주하는 그곳의 맨 위층 실내에 두 사람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한데 둘의 낯이 눈에 익었다.
놀랍게도 둘은 금역에서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던 흑야와 혁련소였다.
그러나 연소민은 보이지가 않았다.
화려함을 자랑하는 술병에서 호박색 술이 흘러나와 둘의 술잔을 채웠다. 혁련소의 얼굴은 중원에서와는 다르게 조금은 어둡고 우울해 보였다.
“이젠 이 술도 익숙해져 가는군요.”
“제법 이곳 사람처럼 보인다. 게다가 남작인가 하는 지위까지 얻었지 않느냐?”
“그깟 지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긴 지위가 높아지니 좋은 점은 있군요. 억압받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으니 말입니다. 문명은 중원보다 상당히 발달했지만 일반 백성들이 고생하는 건 어디든 다 그런 것 같습니다.”
술을 한 모금 입에 털어 넣은 흑야가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받았다.
“이번에 새롭게 백작의 지위에 오른 놈 있지? 그놈이 곧 자신의 영토를 순시한다고 하더군. 당연히 이곳에도 올 테니, 미리 준비를 해 놓는 것이 좋지 않을까?”
“준비라니요?”
“놈의 악명은 세상을 울리더군. 봐서 가능하면 도중에 목을 잘라 버려야지.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도 또 다른 악당이 그 자리를 차지하겠지만…….”
“백작 정도면 상당히 까다로울 겁니다. 당연히 상당한 수준의 마법사들과 마스터들이 동행하지 않겠습니까? 그냥 왔다가 건방 떨고 가게 내버려 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