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3
<귀환무사 253화>
귀환무사 2부
28화
* * *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대초원 위로 붉은 석양이 떨어진다. 세상을 온통 자신과 같은 붉은색으로 칠해 버린 석양은 그 수명을 다하고 서쪽 하늘 너머로 사라졌다.
뒤이어 질세라 달이 떠오른다. 세상은 붉은색에서 곱게 화장한 여인의 그것처럼 은은한 아름다움을 뽐내며 밤이라는 세상으로 바뀌었다.
푸르륵!
은은한 달빛이 떨어지는 초원 위로 전마에 몸을 실은 일단의 무리들이 나타났다. 모두가 갑주를 걸치고 투구를 쓴 기사들. 그러나 그들에겐 기사 특유의 용맹한 분위기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선두에서 전마를 몰아가던 금발을 한 기사의 입에서 짙은 한숨이 흘러나온다.
“휴! 틀렸군. 틀렸어.”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절망에 찬 표정을 지었다. 그의 좌우를 함께하던 기사들이 주변을 살펴보며 그의 절망에 불을 지핀다.
“아무래도 이곳엔 없는 듯합니다! 곧장 영지로 돌아가시는 것이…….”
“그렇습니다! 자칫 테세우드 공작의 권역에 들어설 수도 있습니다! 이쯤에서 돌아가 다른 방도를 구해 보시는 것이 안전합니다.”
둘의 조급함에 금발 사내의 얼굴에 짜증스러움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내 숨을 내쉰 그는 고삐를 당겨 전마를 세웠다. 멀리 초원의 끝으로 거대한 성곽이 달빛에 아른 거리며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곳이군. 대륙 최강의 초인이라는 테세우드 공작의 권역이…….”
“더 들어가면 마법 병단의 경계망에 걸려듭니다.”
“후후! 그 위대한 양반이 고작 나 같은 미천한 일개 영주에게 신경이나 쓸까? 그에겐 그저 수천만의 인간들 중, 하나로밖엔 보이지 않을 텐데…….”
금발 사내의 얼굴에 자조 섞인 웃음이 떠오른다.
“욘크!”
“예! 영주님!”
“잠시 쉬었다 돌아가자. 술 남은 것 있어?”
“조금…….”
영주라 불린 사내가 말에서 내려 초원 위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욘크라 불린 기사가 말의 허리에 걸렸던 주머니에서 술과 간단한 건량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너희들도 이리 앉아. 며칠을 쉬지 않고 돌아다녔더니 죽을 맛이야. 이것만 마시고 영지로 돌아가자. 힘들 내자고!”
“영주님도 힘내십시오!”
“힘…… 그렇지. 나도 힘을 내야지. 크…….”
술을 한 모금 마신 사내의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술은 지독하게 독한 럼주였다. 해적들이나 마실 독한 술이 영주인 그의 입맛에 맞을 리 없다.
두 기사도 럼주를 한 모금씩 마시고는 재빨리 건량을 입에 넣었다. 욘크가 말했다.
“돌아가시면 곧장 수련에 들어가십시오! 그 못된 놈들과의 영지전이 고작 한 달 남았습니다. 방법은 오직 영주님께서 그놈을 이기는 것뿐입니다.”
“한 달을 수련한다고 해서 내가 그 강하다는 사자검, 써튼을 이길 수 있을까? 어림도 없지. 목이 잘려 죽지 않으면 다행일 거야.”
영주의 자조는 이어졌다.
두 기사는 나약한 젊은 영주의 모습에서 자신들의 미래를 걱정했다. 그러나 내색할 순 없는 노릇. 건량을 찢어 건네주며 좋은 말로 그를 위로했다.
“분명 신이 도우실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렇습니다! 마음을 굳건하게 가지십시오! 혹, 그 안에 그분을 찾으러 떠난 기사들이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올 수도 있으니 영주님은 수련에만 정진하십시오.”
술병을 통째로 입에 처넣은 영주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돌아가지. 돌아가서 남은 한 달 동안 대책을 강구하다 보면 무슨 수가 나겠지.”
셋은 이내 전마 위로 몸을 실고는 고삐를 틀어 말 머리를 돌렸다. 전마들이 거친 숨을 토해 내며 육중한 몸을 돌릴 때였다.
츠츠츠츠…….
그들의 뒤쪽에서 이상한 소음이 들리며 공간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뭐, 뭐지?”
“설마! 테세우드 공작가의 마법사들이…….”
셋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제국 최강의 마법 병단을 지닌 테세우드가의 마법사들이 나타난다면 자신들은 죽은 목숨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재빨리 도주를 결심한 그들이 말의 옆구리를 걷어차려고 할 즈음, 강력한 빛의 폭발이 일어나며 그들의 시각을 일시적으로 앗아 갔다.
그 빛이 지독하게 강렬했기에 셋은 두 손으로 눈을 가리며 말 위에서 떨어졌다.
스르르르…….
묘한 소리를 울리며 빛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시커먼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타난 그림자들은 모두 일곱. 그 모습을 지켜보던 셋의 얼굴에 절망의 기운이 어렸다. 그림자들에게서 뿜어지는 엄청난 기운이 그들의 심장까지 흔들어 놓았다.
“영주님! 이곳은 저희들에게 맡기고 어서…….”
욘크가 롱 소드를 꺼내 들며 소리쳤다. 다른 기사도 이미 손에 롱 소드를 쥐고서 나타난 그림자들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누구냐!”
욘크가 씩씩하게 외쳤다.
느껴지는 기운은 절대 자신들이 감당할 수준을 넘어선 것. 그러나 영주에 대한 충성심으로 그는 용기를 끄집어냈다. 주변을 몰아치던 강력했던 기운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흑발을 늘어뜨린 이국적인 용모를 한 사람들이 나타났다.
* * *
“아무래도 색목국으로 떨어진 것 같습니다!”
창왕 조윤이 저만치 앞에 서 있는 영주와 욘크 등을 발견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모두가 황당한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연못에 몸을 던졌는데 빛으로 이루어진 동굴 같은 것을 통과하니 진짜로 전혀 다른 세상에 뚝 떨어진 것이 아닌가.
혁련천후가 눈빛을 가라앉히고 조윤이 가리킨 사람들을 응시했다.
생긴 용모나 복장으로 보아 색목국의 인물들이 분명해 보였다. 그들이 자신들을 향해 뭐라 소리치고 있었는데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북궁천소가 인상을 그렸다.
“진천! 네가 어떻게 좀 해 봐!”
진천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욘크 등에게 성큼 다가가며 색목국의 언어를 사용해 물었다.
“여기가 어디요?”
그러나 셋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다시 검을 겨누며 뭐라뭐라 소리쳤다. 진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색목국이 아닌가 봅니다. 말을 못 알아듣는데요?”
뒤쪽에서 혁련천후가 진천을 향해 다가갔다.
“환술을 사용해 봐.”
“알겠습니다.”
진천이 다시 성큼 셋을 향해 걸음을 놓았다.
장대한 체구를 지니고 은빛 갑주를 걸친 자가 커다란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진천의 손짓 한 번에 그는 바닥을 구르며 나가 떨어졌다.
다른 이들이 두 눈을 부릅뜨며 놀라워하는 것은 당연했다.
“내가 지금 몹시 예민하거든. 그러나 까불지 말고 그대로 가만히 있는 게 신상에 이롭다고. 응?”
남은 둘이 창백하게 질린 채,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하지만 그들도 곧 진천의 손짓에 전신이 마비되어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진천이 그들에게 환술을 사용하려 내공을 끌어올릴 때였다.
쐐애액!
공기를 찢는 파공성과 함께 무엇인가가 일행들을 향해 빠르게 날아왔다.
불꽃에 휩싸인 화살들이었다. 아니 화살처럼 생긴 불덩어리라고 해야 옳았다.
“뭐야? 저건!”
조윤이 창을 뽑아 그대로 허공을 후려치자 날아들던 불화살들이 그대로 소멸되어 버렸다.
혈도가 제압당한 영주, 드웨인 일행은 그 광경에 넋을 놓았다. 지금 날아들었던 그 불화살들은 결코 손짓 한 번으로 소멸시킬 수 없는 마법으로 만들어진 화살이었던 것이다.
“저것들은 또 뭐지?”
북궁천소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드웨인과 욘크의 표정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일단의 무리들이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는데, 그들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테세우드 공작의 권역에서 온 자들이었다.
그것도 단순한 인물들이 아닌 마법사들이 몰려나온 것이다. 나타난 자들은 모두 다섯. 그들은 다소 굳어진 표정으로 혁련천후 등을 향해 다가왔다.
“이 자식들이 감히 뉘 앞에서 불장난이야!”
왕전이 대뜸 검을 휘두를 것처럼 나서자 혁련천후가 그를 막아섰다.
지금껏 조윤과 북궁천소에 가려져 있어서 드웨인과 욘크는 처음으로 혁련천후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순간 둘의 표정이 급변했다.
놀랐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표정이었다.
제2장 낯선 세상
“저, 저분이 그분 같습니다! 영주님!”
욘크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고 넋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드웨인도 자신의 두 눈을 의심하며 혁련천후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제국에, 아니, 대륙 전체에 그 위대한 이름을 떨친 존재들,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맸던 흑발의 마검사과 생김새가 똑같았다.
다만 그 수가 너무 많다는 것이 조금은 의아할 뿐이었다.
“그런데 흑안의 마검사들은 둘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그렇군요.”
“하지만 저 얼굴…… 분명 그분이다.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던 그분이 분명해. 오! 드디어 신께서 나 드웨인의 간절한 바람을 들어주셨구나.”
드웨인이 격동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때 쓰러졌던 기사가 정신을 차리고 엉금엉금 기어 왔다. 그 역시 테세우드 공작가의 마법사들과 대치한 존재들을 번갈아 쳐다보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큰 겨레를 범했습니다. 감히 흑안의 마검사를 몰라뵙고 덤벼들었으니…….”
“어두워서 그랬으니 용서하실 거야. 그나저나 저놈들 이제 큰일 났군. 감히 저분들께 마법 공격을 퍼부었으니까 말이야.”
마치 자신의 편인 양, 로브를 뒤집어쓴 자들을 노려보던 드웨인의 눈빛이 다시 바뀌었다. 진천이 다가오고 있었다.
진천은 드웨인과 욘크 등의 눈빛이 바뀐 것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불과 조금 전까지는 적을 보듯 하더니 이제는 마치 존경하는 사부를 보는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내 손에 황금색 섬광을 끌어 담았다.
치르륵!
“난 네놈들의 언어나 알아내야겠어. 내 기운에 대항하면 뇌가 터져 죽을 수도 있으니 그저 가만히 있는 게 목숨을 살리는 길이야. 알겠어?”
그의 말을 이들이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코를 찡끗한 진천은 드웨인의 머리에 손을 가져갔다. 지금 진천은 짐승들과 대화를 할 때나 사용했던 환술을 시전하려고 했다.
말을 모르니 그 방법밖에 없었다. 물론 사람이니 짐승보다야 훨씬 수월할 것이다.
“으윽!”
드웨인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죽지는 않으니까 가만히 있어라.”
* * *
퍽!
“으악!”
북궁천소의 주먹이 한 마법사를 가랑잎처럼 날려 버렸다.
테세우드 공작가의 마법사들은 두들겨 맞으면서도 이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았다. 자신들은 비록 최상급 클래스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지간한 마스터들과 반나절은 싸울 수 있는 실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눈앞의 존재들은 반나절은커녕 시작하자마자 추풍낙엽처럼 날아갈 뿐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마법을 이용하여 공격조차 한 번 해 보지 못하고 당해 버렸다는 점이었다.
그야말로 일방적인 구타라고 할 수 있었다.
“크윽!”
마지막으로 초원에 두발을 디디고 섰던 마법사가 가슴을 움켜쥐고는 바닥으로 쓰러졌다.
쓰러진 그들의 눈에는 불신의 빛이 가득했다. 그들은 전신에 병기를 주렁주렁 걸고 있는 북궁천소를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응시했다.
저런 자가 제국에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뒤늦게 그 뒤에 오연하게 서 있는 흑발에 흑안을 한 혁련천후를 발견하고는 자신들의 처지를 수긍할 수 있었다.
“흐, 흑안의 마검사였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