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3
<귀환무사 243화>
귀환무사 2부
18화
형제가 없었던 자신에게 지금에 와서야 연무진이 형제처럼 다가왔다.
부들부들!
꽉 쥐어진 주먹이 요동쳤다.
꽉 깨문 입술이 파고든 이로 인해 붉은 선혈을 흘려 냈다. 부릅떠진 두 눈에 차갑고 오연한 사내의 영상이 나타나 있었다.
“분노해라. 의지보다는 분노가 더욱 너를 강하게 해 줄 것이다.”
아버지의 말이 떠오른다.
사랑하는 것들을 지켜 주기 위해서, 약한 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강해져야 한다던 그 말이 가슴을 적셔 온다.
하지만 지금은 분노보다 냉철을 우선할 때였다.
해서 혁련소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당장은 홀로 남은 그녀를 지켜 줘야 한다.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자.’
혁련소는 연소민을 돌아봤다.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녀는 연이은 충격으로 안색마저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오. 이곳을 빠져나가는 가장 빠른 길을 알고 있소?”
“뒤쪽 천산을 오르는 길이 가장 빨라요.”
연소민도 닥쳐올 사태를 직감했는지 슬픔을 지워 내려는 기색이 보였다.
“살아들 있다면 만나게 될 것이오. 하니 이곳부터 빠져나갑시다.”
“알겠어요.”
그녀가 빠르게 앞장을 섰다.
둘은 빠른 속도로 최대한 은밀하게 움직였다. 벌건 대낮이라 은신을 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지만 최대한 조심스럽게 후진 곳만을 골라서 이동했다.
큰 전각 두 개를 지나자 상당한 높이의 성곽이 나타났다.
바로 천산과 이어진 신교의 성곽이었다. 뒤쪽이 깎아지른 절벽인 탓에 다른 곳과는 달리 경계가 다소 허술했다.
둘의 육신이 빠르게 성곽으로 날아올랐다. 동시에 삐익! 호각 소리가 울리며 성곽 위에 사람들이 쭉 늘어섰다.
“젠장!”
들킨 것이다.
혁련소는 다급히 주변을 돌아보고는 우측으로 경공을 펼쳤다.
“저곳으로!”
연소민이 뒤를 따랐다.
쐐액!
공기를 찢는 소리와 함께 수십 발의 암기와 강전이 둘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들이 허공에 몸을 띄우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떨어질 공간까지 계산한 암기 세례였다.
따다다당!
혁련소가 검을 휘둘러 날아드는 암기들을 쳐 냄과 동시에 호신강기를 펼쳐 주변에 방어막을 쳤다.
연소민 역시 은은한 호신강기를 이미 전신에 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얼마를 더 못 가 그 자리에 멈추어야 했다.
“도망을 하는 길인가?”
초마전주 염호가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상당한 강자들로 여겨지는 장한들이 횡으로 늘어서 염호를 호위했다.
연소민이 싸늘하게 소리쳤다.
“추악한 놈들!”
“후후! 추악해도 좋다. 너희 둘만 죽이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고 새로운 세상이 될 테니까.”
혁련소는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자신과 연소민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이럴 때, 숙부의 기운이 왜 느껴지지 않는단 말인가.
그때였다.
[침착해라.]
흑야의 전음에 혁련소는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흑야는 염호의 뒤쪽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의 기척을 눈치채지 못했다.
혁련소는 연소민에게 전음을 보냈다.
[최대한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하오. 내가 뛰면 함께 뛰시오.]
[놈들을 뚫고 갈 수 있을까요?]
[놈은 곧 죽을 것이오.]
[……!]
연소민은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염호는 알아주는 고수다. 혁련소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그를 당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 몰라도 너희 둘이 교를 살아서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순순히 자결을 할 기회를 주마. 아니면 넌 죽을 때까지 무사들의 노리개가 되겠지. 그동안의 정리를 감안한 나의 배려라 생각해라.”
염호가 연소민을 보며 차갑게 말을 뱉었다.
염호의 속내는 진심이었다. 야망의 이면에 조금 남아 있던 마지막 양심이었다.
혁련소가 그런 염호를 향해 씩 웃어 주었다.
“아주 오랜 후에 저승에서나 보자고.”
혁련소가 염호에게 웃어 주고는 벼락같이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동시에 연소민이 그를 따랐다.
혁련소의 빠르기가 상상을 넘어서자 염호와 장한들은 재빨리 좌우로 몸을 피해야만 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혁련소는 섬전처럼 빠른 속도로 그들의 가운데를 뚫고 성곽을 넘어섰다.
염호의 얼굴이 붉어졌다.
코앞에서 애송이를 놓치다니.
“죽여라!”
염호의 명이 떨어졌다.
그때, 혁련소가 남긴 흙먼지 속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번득였다.
뒤이어 날아든 섬광에 염호의 옆에 섰던 장한 하나가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툭! 떼구르르…….
소리조차 없이 잘려진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크게 놀란 염호가 시선을 돌려 그림자를 찾았을 땐, 이미 흙먼지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 염호의 귓속으로 싸늘한 음성이 흘러들었다.
[후후후, 살려 준 목숨. 귀하게 여겨야 할 거다, 늙은이.]
화가 난 염호가 그 말에 귀를 기울일 턱이 없다. 그는 주변을 돌아보며 내공을 담아 소리쳤다.
“놈들을 추격해라!”
삐익!
귀청을 찢는 호각 소리가 마교의 곳곳을 울렸다.
사방에서 고수들이 바람처럼 날아오르며 혁련소와 연소민이 사라져 간 곳으로 향했다.
* * *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가던 혁련소와 연소민의 앞을 가로막는 이가 있었다.
흑야였다.
느닷없이 나타난 그를 보며 연소민은 크게 놀랐다.
이미 둘은 구면이었다. 문제는 흑야가 왜 이 상황, 이 시점에서 앞을 가로막으며 나타났냐는 점이었다.
혁련소가 그녀를 안심시켰다.
“같은 편이니 걱정 마시오.”
“같은…… 편이라고요?”
“그건 나중에 따지고 당장은 이곳을 벗어나는 데 주력합시다.”
혁련소의 재촉에 연소민은 손을 들어 전방을 가리키며 말을 늘어놓았다.
“저곳을 돌아가면 중원이고, 직선으로 넘어가면 아직 그 누구도 가 보지 못했던 세상이 있다고 했어요.”
“거긴 갈 곳이 못된다.”
“숙부도 알고 계셨습니까?”
“천년금역이라고 부르는 곳이지.”
연소민이 눈을 동그랗게 했다.
설마 그가 그곳을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그녀였다. 흑야가 눈빛을 발했다.
“중원으로 간다. 그곳보다 안전한 곳은 없다.”
“알겠습니다.”
셋은 빠르게 천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인간의 힘으로는 오를 수 없는 곳이 천산이다. 하지만 셋은 어렵지 않게 천산의 중턱을 향해 경공을 펼쳐 올랐다.
그곳에서 동쪽으로 이동하면 중원의 경계에 들어선다.
“놈들이에요!”
연소민이 산 아래를 가리켰다. 뒤를 쫓는 자들이 새카맣게 몰려오고 있었다.
“꽤 철저하게 준비했군.”
흑야가 주변을 살피며 눈을 빛냈다.
대부분이 돌로 이루어진 곳에 적당한 수풀이 있었고 사내는 그곳을 보며 차갑게 웃었다.
“먼저 가거라. 곧 뒤따라가마.”
흑야가 숲으로 몸을 날렸다.
혁련소는 지체 없이 연소민을 이끌고 몸을 날렸다.
수림은 북방 특유의 침엽수로 가득했다.
능선의 위쪽으로 오르면 절벽과 천년빙설만이 존재했고, 그 위는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흑야는 숲속에서 추격하는 자들이 들어서기만을 기다렸다.
‘머리만 자르고 가야겠군.’
무리를 이끄는 자를 척살 일순위로 올린 그는 빠르게 다가오는 신교의 추격대를 응시했다.
가파른 비탈을 상당한 속도로 오르는 것으로 보아 모두가 한 가닥 하는 고수들로 이루어진 추격대였다.
선두에 염호가 있었다. 그리고 그 좌우로 적포인들이 늘어서 있었고, 청색무복을 걸친 자들이 새롭게 합류해 있었다.
‘간격에 들어서면 넌 죽은 목숨이다.’
그는 오직 염호만을 노렸다.
죽이고자 마음먹는다면 지금이라도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선 곤란했다.
위치가 드러나면 신교의 전력이 혁련소와 연소민을 노리고 달려들 것이다.
염호가 공격 사정권 안으로 들어섰다. 흑야의 눈동자가 광채를 뿜었다.
빛의 속도가 이럴까. 흑야의 검이 소리 없이 염호를 향해 날아갔다. 그것은 흑야를 고금최강의 자객으로 올려놓은 최강의 살인 무예였다.
퍽!
비명조차 없었다.
염호의 육신이 어깨에서 허리까지 그대로 떨어져 나갔다. 볼 것 없이 즉사였다.
초마전주라는 거물의 죽음치고는 참으로 어이없고 허망한 결과였다.
그러나 상대가 어둠의 제왕이라는 흑야임을 안다면 억울하지 않으리라.
“헉!”
염호가 죽는 것을 보지도, 느끼지도 못했던 자들이 바닥을 적시는 선혈을 보고는 허파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경고다! 추격은 여기까지다. 더 쫓는다면 너희는 한 놈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한다.]
차가운 음성이 그들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저쪽이다!”
청색무복을 걸친 자들이 일제히 수림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무지막지한 기운들이 숲을 향해 짓쳐 들었다.
콰지지직!
나무와 흙이 허공으로 치솟으며 시야를 가렸다. 그때 좌측에 섰던 자가 목이 잘리며 바닥을 굴렀다.
그가 죽는 것과 거의 동시에 그 옆의 인물이 허리가 두 동강으로 썰어졌다.
모두가 대경질색을 하며 물러섰다.
도대체 어디서 뭐가 어떻게 날아와 동료들을 죽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시 싸늘한 목소리가 울렸다.
[돌아가서 전하라. 더 이상 추격하면 신교를 세상에서 지워 주겠다고.]
“쥐새끼처럼 숨어 있지 말고 모습을 드러내라!”
고수 하나가 고함을 질렀다.
전신을 용맹한 기세로 무장한 그는 대도를 쥐고서 수림을 향해 달려들 태세였다.
순간 그의 옆 공간이 일렁이더니 그의 육신에서 피가 튀었다.
“크악!”
대도를 쥔 오른팔이 작살을 맞은 생선처럼 펄떡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른 자들이 일제히 그쪽으로 칼을 휘둘렀다.
콰콰콰!
팔을 잃은 자의 육신이 동료들의 강기에 의해 산산조각으로 흩어지며 주변이 강력한 폭발에 휩싸였다.
동료의 죽음에도 아랑곳 않고서 모두는 기대하는 눈빛으로 그곳을 쳐다봤다.
그러나 동료의 육신 조각 외에 보이는 것은 없었다.
[마음이 바뀌었다. 모두 이곳에서 죽어 줘야겠다.]
차가운 전음과 함께 흑야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말처럼 여기 있는 모두를 죽일 심산이었다. 이유는 없다.
그냥 살기가 동해서였다.
“가랄 때, 갔어야지.”
“네놈은 누구냐? 감히 신교를 건들고도 살아남길 바랐더냐!”
여전히 신교의 고수들은 용맹을 잃지 않았다.
흑야의 미간에 주름이 생겨나며 차가운 웃음이 입가에 걸렸다.
“신교 따위가 뭐라고.”
“미친 새끼! 죽여 주마!”
신교의 고수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