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
<귀환무사 240화>
귀환무사 2부
15화
혁련소는 내심 갈등이 생겨났다.
연소민의 아름다운 자태가 순간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녀를 얻을 수 있다면 뭐를 해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웃기는군. 그녀는 호위를 부탁하고, 그 아버지는 혼인을 부탁하고, 그만큼 뭔가가 있다는 것인데…… 아, 이거 뭐가 꼬여도 단단히 꼬였구나.’
내심 한숨을 쉰 혁련소가 물었다.
“만약 제가 따님과 혼약을 한 후, 무진이 깨어나면 교주의 위를 물려주고 떠나는 것은 문제 되지 않습니까?”
“그건 문제없다. 극마전은 당대를 끝으로 영원히 사라진다. 그것이 없어지면 교주가 차기 교주를 임의로 추대해도 문제 되지 않는다.”
“그럼! 좋습니다! 교주님의 부탁을 들어주지요. 뭐, 저야 예쁜 색시도 얻고 천하의 안녕을 위해 일조를 하는 것이니 그다지 손해 볼 건 없군요. 다만 따님이 찬성할지 그게 걱정일 뿐입니다. 그리고 형식적으로 승낙한다는 것을 잊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혼인은 차후, 따님과 제가 결정하는 것으로 하지요. 뭐, 저도 따님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 아이는 천하에 누구와도 견주어도 결코 떨어지지 않는 아이다. 어쨌든 부탁을 들어줘서 고맙구나. 이 일은 결코 잊지 않겠다!”
감사의 뜻을 드러내는 연유극에게 미소로 화답한 혁련소는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홀로 남은 연유극의 얼굴이 일순 비통함으로 물들어 갔다.
“교를 위해서라면 내 목숨조차 버릴 수 있느니. 나를 용서하거라. 아이야…….”
신교를 위해 딸을 희생시켰다.
제아무리 철혈의 심장을 지는 연유극이라도 연소민에 대한 아픔은 어쩔 수가 없었다.
* * *
“남아 있기로 했단 말이냐?”
혁련소는 뒤쪽에서 들려오는 차디찬 목소리에 돌아보지 않고서 웃으며 답했다.
“꽤 괜찮은 조건 아닙니까? 어디서 그런 미녀를 얻겠습니까.”
흑야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주공이 아시면 불호령이 떨어질 수도 있다.”
“에에! 아버지도 어머니 때문에 꽤 속 썩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설마 같은 사나이로서 아들의 이런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까요.”
“두 분의 사랑은 세상을 울린 지고지순한 것이었다. 너처럼 이런 막돼먹은 것이 아니다.”
“사랑에 방식이 있답니까? 나중에 돌아보면 다 지고지순한 겁니다.”
흑야의 미간에 주름이 잡힐 때, 혁련소가 장난기를 싹 거두며 말했다.
“이곳이 사실 꽤 복잡하더군요. 교주가 저를 끝까지 잡으려고 하는 이유가 재밌기도 하고…… 뭐, 다른 세력들이 교를 장악하면 그들이 아마 중원으로 진출할 것 같더군요. 연 교주는 그것을 막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듯 보이는데 제가 도와주면 신교의 중원 진출도 막아 주고 겸사겸사 좋은 것 아닐까요?”
“그래서 혼사를 허락했느냐.”
“겸사겸사라고 했잖습니까.”
흑야가 딱 잘라 말했다.
“중원엔 신교 따위가 설 자리는 없다. 주공께서 그것을 원치 않는다면 그들은 영원히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다.”
“그야 당연하지요. 하지만 야망에 들뜬 자들이 그런 것을 생각할 리 없지요. 그들은 아버님도 넘어설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한다고 하더군요. 뭐 웃기는 말이기는 하지만 뭔가 믿는 구석이 있으니 아버님과 숙부들이 버티고 있는 중원을 넘보는 것 아니겠어요?”
흑야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지금 내가 신호를 보내면 이곳은 일주일 안에 잿더미로 만들 수 있다.”
“에이,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이곳까지 오는 데 육 일이 걸린다. 쓸어버리는 시간은 고작 반나절이면 충분해.”
광오했다.
천하의 신교를 반나절 만에 쓸어버린다니, 하지만 혁련소는 흑야의 말이 틀리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아이가 네게 호위를 부탁한 사유는 알고 있느냐?”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게 더 궁금하거든요. 느낌으로 보아 그녀는 이곳을 빠져나가려고 하는 듯했거든요. 왜 그런지 알아 봐야겠는데…….”
말끝을 흐린 혁련소가 흑야를 묘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흑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금부터는 모든 일에 공짜는 없다.”
“예에?”
“하나씩 네 부탁을 들어줄 때마다 뭔가 내놓지 않으면 해 주지 않을 생각이다.”
“숙부 맞습니까?”
“숙부를 종처럼 부려 먹는 너보다는 낫다.”
그 말을 끝으로 흑야의 모습은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연소민의 가출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사라진 것임을 알고 있는 혁련소는 침상에 벌렁 누웠다.
천장에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이런 걸 두고 횡재라고 하는 거겠지.’
입이 귀밑까지 벌어졌다.
한참을 혼자 희희낙락거리던 혁련소가 잠이 든 것은 만월이 하늘의 가운데 떠오른 때였다.
* * *
“휴…….”
장미 잎을 붙여 놓은 듯, 붉디붉은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한숨을 흘러 냈다.
만월의 빛을 받으며 창가에 선 연소민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먼 곳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고고한 만월의 빛에 반사된 그녀의 얼굴은 마치 밤하늘을 가르는 선녀의 그것을 보듯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엉뚱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재밌는 사람이었어. 나빠 보이지도 않았고.’
문득 그녀는 혁련소를 떠올렸다.
차가운 얼굴과는 달리 장난기 어린 그의 행동과 분위기를 떠올리자 그녀의 입가에 자신도 모르는 웃음이 걸렸다.
그러나 이내 예의 우울함으로 돌아온 그녀는 만월을 바라보며 뭔가를 골몰히 생각했다.
그때였다.
만월의 한가운데 시커먼 점이 나타났다. 서서히 커지기 시작한 그것은 이내 사람의 형태로 변해 갔는데 연소민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 인영이 자신을 향해 직선으로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인영의 전신에서 뭔가 번쩍하는 것이 보였다.
‘암습!’
순간 그녀의 육신이 팽이처럼 회전하며 거처의 지붕을 뚫고 올라갔다.
동시에 그녀가 섰던 자리에 수십 발의 암기들이 박혔다.
챙!
자신의 허리띠를 풀자 그것이 곧 검으로 변했다.
“누구냐!”
그녀는 싸늘한 눈빛으로 자신의 앞에 떨어진 인영을 노려봤다.
전신을 흑포로 두르고 두 눈만을 내놓은 인영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웃고 있는 것이다.
“역시, 신교주의 딸답군. 지금껏 나의 암습을 피해 낸 계집은 네가 처음이구나.”
“네놈의 암기술을 자랑하려고 나를 찾은 것은 아닐 테고, 어디서 온 누구냐!”
“어리석군. 물어보면 대답할 거라고 생각하느냐? 흣흣!”
“당연히 대답해야지.”
차가운 음성이 복면인의 뒤에서 들려왔다. 복면인의 고개가 벼락같이 뒤로 돌아갔다.
그곳에 흑발을 늘어뜨린 흑야가 유령처럼 나타나 있었다.
“네놈은 누구냐!”
“대답할 거라 여기고 물었냐?”
놀란 것은 연소민도 마찬가지였다.
저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접근하도록 전혀 기척조차 느끼지 못한 것이다.
흑야의 차가운 눈동자가 연소민을 향했다.
“너를 좋아하는 놈 때문에 왔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나를 좋아하는 놈?’
연소민은 순간 어리둥절했다.
그녀는 흑야를 다시 쳐다봤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이미 복면인을 향하고 있었다.
“운이 없다고 생각해라. 하필 내가 있을 때 암습을 생각하다니.”
“기고만장이 지나친 놈이군. 그 입이 조금 후에도 놀려지는지 두고 볼까?”
복면인의 손이 벼락같이 앞으로 뻗어졌다.
흑야는 목을 향해 날아드는 복면인의 손을 지켜보다가 손을 뻗어 가볍게 후려쳤다.
복면인의 손이 방향을 잃고 흑야의 얼굴을 옆, 허공을 때렸다.
그때 흑야의 팔에서 번쩍 하는 섬광이 일어났다.
서걱!
섬뜩한 소리가 들리며 복면인의 육신이 기우뚱거렸다. 뒤이어 잘린 머리가 떨어지고 주인을 잃은 몸뚱이가 무너지듯 쓰러졌다.
쿵!
연소민은 입을 가리며 나오려던 비명을 간신히 막았다.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이야 무림인인 그녀에겐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흑야가 보여 준 수법은 비명을 지르기에 충분할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킨 그녀가 물었다.
“교의 인물은 아니군요. 누구신가요?”
흑야의 눈동자에 슬쩍 이채가 나타났다.
‘사는 곳과는 달리 꽤 깨끗한 눈을 지니고 있었군. 저 정도면 놈이 반할 만도 하겠어.’
그의 눈에도 연소민은 무척 아름다웠다.
젊은 날, 자신의 주모보다는 못했지만 당대에 최고라 불릴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미모였다.
“누구신가요? 대답하지 않으면 침입자로 간주하겠어요.”
“침입자?”
“당연히 제게 신분을 밝히지 않으면 침입자로 봐야지요.”
“널 도와준 사람에게 지나친 것 아니냐?”
“도와준 것은 감사해요. 하지만 당신의 도움이 없었다면 제가 험한 꼴을 당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하군요.”
흑야의 눈가에 슬쩍 주름이 잡혔다.
이 여인, 누군가를 무척 닮아 있었다. 잠시 생각했던 그는 닮은 대상을 떠올리고는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그렇군. 둘째 주모와 그 성격이 똑같아. 이거, 이러면 말려야 되는데…….’
천하최강의 말썽꾼이자 사고뭉치를 떠올린 그는 혁련소를 말려야 한다는 엄청난 사명감에 휩싸였다.
“아름다운 꽃치고는 가시가 너무 많군.”
“뭐예요?”
“때가 되면 내가 누군지 알게 될 테니 오늘은 이만 가도록 하지.”
스슥!
흑야가 유령처럼 사라졌다.
연소민은 두 눈을 뜨고도 그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었다. 놀랍도록 대단한 경공술에 연소민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교의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어. 그렇다면 외부인인데, 대체 어쩌다가 교가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
이곳은 신교의 가장 중심이 되는 지역이다.
외부인이라면 절대 들어올 수 없는 곳이 이곳인데 흑발 사내는 제집처럼 왔다가 그냥 사라졌다.
아버지가 떠올랐다. 교를 위해 자식마저 돌보지 않는 그가 죽도록 미웠지만 가슴 한구석에서 진한 슬픔이 올라왔다.
모든 것이 싫어 교를 떠나려는 결심이 옅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입술을 꼭 깨물며 눈빛을 빛냈다.
‘지긋지긋해, 이런 삶은…… 떠날 거야.’
* * *
날이 밝았다.
혁련소는 연유극과 함께 천마전을 찾았다.
미리 나온 자들이 있었는데 초마전과 검마전의 전주들과 장로들이 굳은 얼굴로 대전을 들어서는 둘을 응시했다.
“교주를 보고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하극상이 아닙니까?”
혁련소가 작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연유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장로회의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그 정도의 예외는 가능한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