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7
<귀환무사 227화>
귀환무사 2부
2화
“멋지군.”
흐려진 눈으로 혁련소를 응시하는 연무진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둘은 객잔 밖으로 나섰다.
어둠이 내린 거리는 지나는 사람 하나 없이 적막했다.
“어디로 갈 텐가?”
연무진의 물음에 혁련소는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발길이 멈추는 곳까지.”
“크크! 역시 멋지군. 부럽기도 하고.”
숨을 몰아쉬니 독한 화주의 향기가 코를 자극했다.
연무진이 혁련소의 어깨를 잡았다.
“같이 가지 않겠나?”
“내가 갈 곳이 아니지. 그곳은…….”
“두려운가?”
연무진의 물음에 혁련소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미소라기엔 너무나 차가웠다.
“후후! 두려움 따윈 태어날 때부터 없었다.”
“그럼 같이 가세나. 이 연무진이 어떻게 사는지 자네에게 보여 주고 싶군. 부탁이라 생각하고 따라 주었으면 고맙겠네.”
“유람을 하려고 나온 것이 아니었나?”
“물론 그럴 작정으로 교를 나왔지만 돌아가야 할 일이 있어서…… 거부하기엔 지나치게 큰일이지.”
연무진의 얼굴이 씁쓸함으로 물들었다.
혁련소의 가라앉은 시선이 연무진을 직시했다.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는 연무진의 고독함이 그의 가슴을 찔러 왔다.
뭔가를 잃어버린 사람만이 지닌 우울함마저 그에게서 느껴졌다.
‘소문과 다르군.’
연무진은 절대 이런 모습을 보여선 안 될 존재다.
자신이 아는 그곳은 이런 모습을 보이는 자들은 절대 살아갈 수 없는 곳이다. 더욱이 연무진의 신분이라면 더더욱 이런 모습은 보여선 안 되는 것이다.
혁련소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밤하늘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고개를 돌린 그가 걸음을 놓았다.
“신강이라면 제법 시간이 걸리겠지.”
“응! 함께 갈 텐가?”
“뭐, 마땅히 갈 곳도 없으니 이번 기회에 천하의 신교를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혁련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무진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걸음을 옮기는 혁련소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그의 눈동자 또한 기쁨의 빛을 보인다.
“하하하! 역시 오늘의 패배와 술값은 억울하지 않게 되었어.”
연무진이 혁련소를 지나쳐 빠르게 앞장섰다. 그런 연무진을 응시하던 혁련소의 두 눈은 이내 감정을 묻어 버린 지극히 담담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약간의 거리를 두고 그는 연무진의 뒤를 따랐다. 앞서 걷던 연무진이 뒤를 돌아봤다.
“경공으로 가겠나?”
“바쁘게 사는 게 습관이 되어 있는 모양이군.”
“굼뜨게 사는 것보다야 낫지.”
혁련소는 피식 웃었다.
왠지 연무진의 저런 냉소적인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때, 연무진이 바닥을 차고 올랐다. 뒤이어 바람처럼 질주를 시작했다.
그가 남긴 흙먼지가 혁련소의 얼굴을 덮었다.
슬쩍 미간을 좁힌 혁련소의 육신도 이내 연무진을 쫓아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 * *
사람이 놀라면 넋이 빠지는 법이다.
눈은 초점이 없어지고 입은 저절로 벌어지며 머릿속은 비워지는 증세가 동반되게 마련이다.
단리세가의 단리중호가 지금 그런 상태였다.
그런 그의 주변으로는 단리세가의 무사들로 보이는 자들이 쓰러져 있었는데 하나같이 꼼짝을 않는 것이 죽었거나 실신을 한 듯 보였다.
웅성웅성!
화룡객잔의 모든 사람들이 한 사내를 쳐다보며 수군거렸다.
잘 벼른 칼날 같은 예기를 뿜어내는 사내는 흑발에 장검을 늘어뜨린 채 단리중호를 직시하고 있었다.
사내를 향한 단리중호의 눈동자는 두려움으로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세가의 무사들을 한 번의 손짓으로 저렇게 만든 존재는 지금껏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오대세가의 자존심이 아니라면 벌써 도주했을 자신이다.
하지만 지금껏 살아오면서 세뇌받은 삶이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명문세가의 자제라면 결코 두려워 몸을 피해서는 안 된다고 배워 온 그였다.
“비켜!”
사내의 입에서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단리중호는 사내의 말을 거역할 용기가 없었다. 지금껏 그의 발목을 잡아 왔던 세가에 대한 자존심은 그의 말 한 마디에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자신의 옆을 지나가는 사내를 단리중호는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
“쓸데없는 시비는 죽음을 부르는 곳이 강호야. 그것을 기억해라, 애송이!”
사내의 차가운 음성이 단리중호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사내의 육신은 유령처럼 모습을 감추었다.
객잔 안의 사람들이 단리중호를 보며 수군거렸다.
인상을 찌푸린 사람들도 있었고, 그를 보며 비웃는 사람들도 있었다.
‘헉! 살았어.’
그러나 단리중호는 자신이 살아 있는 것에 희열을 느낄 뿐 그들의 시선 따위는 관심에도 없었다.
객잔 안이 순간 비릿한 냄새로 진동했다. 모든 사람들이 단리중호를 쳐다보며 입과 코를 막았다.
바닥을 흥건히 적신 누런 액체, 단리중호가 지린 오줌이었다.
* * *
신강의 하늘은 중원의 그것보다 훨씬 높고 장대함을 자랑한다.
천산(天山)을 가로질러 중원의 북방에 위치한 그곳엔 천년빙설의 보호를 받으며 자리 잡은 거대한 성곽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다.
신교(神敎)!
천하만마의 성지이자 안식처인 그곳은 중토(中土)를 노리는 전귀(戰鬼)들이 핏빛 칼날을 벼르며 중원 정벌의 야망을 불태우는 곳이기도 하다.
심마(心魔) 조치양은 그러한 신교의 사대전주의 하나이자 당금 무림의 최고 수군에 들어가는 절대고수이다.
신교의 두뇌를 상징하는 그는 뛰어난 재지와 책략, 그리고 엄청난 무력의 소유자다. 수많은 절기를 일신에 탑재한 그는 신교의 실질적인 이인자의 자리에 오른 자이기도 했는데, 그런 조치양의 육신이 바닥을 파고들 듯 오체투지의 형상으로 엎드려 있었다.
조치양의 앞에는 거대한 체구를 지닌 적발 노인이 고리눈을 한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또 나갔단 말이냐?”
적발 노인의 입에서 살벌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조치양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아이들이 지키고 있었지만 워낙 경공이 신출지경에 이른 분이시라, 죄송합니다.”
“흑영대 전체가 눈을 뜨고서도 막지 못했단 말이냐?”
“잠깐 산책을 하고 오겠다고 나가시는 바람에…….”
적발 노인의 음성에서 분노가 느껴지자 조치양은 머리를 깊숙이 조아렸다.
적발 노인의 눈동자가 가볍게 흔들렸다. 시선은 조치양을 향했지만 그를 분노하게 만든 존재는 눈앞에 없었다.
“다른 전(殿)의 놈들도 알고 있겠지?”
“그렇습니다.”
“이번 일을 빌미로 극마전(極魔戰)의 출전 포기를 요구하겠군. 그렇지 않느냐?”
“초마(超魔)와 검마(劍魔) 측에서 이미 그것에 대해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보입니다. 조만간 소교주의 출전 포기와 교주님의 중립을 요구할 것이 분명하니 대책을 강구해서 사전에 그들이 손을 잡는 것 정도는 막아야 합니다.”
“놈들이 손을 잡을 확률은?”
“소교주께서 출전을 하시면 확률은 반 이상이 될 것이고 교주님께서 중립을 표방하지 않으시면 확률은 십 할입니다. 단 출전 포기와 중립 표방이 모두 이루어진다면 그들이 손을 잡는 확률은 전무합니다.”
팍!
의자의 손잡이가 가루로 흩날린다.
적발 노인의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섬광을 발하며 조치양의 숙여진 어깨를 향했다.
“시간은?”
“한 달 안에 소교주께서 돌아오셔야 모든 것이 그나마 희망이 생깁니다. 만약 그 안에 돌아오지 못하신다면 당대 극마전은 포기하셔야 합니다.”
“놈은 지금 어디에 있다더냐?”
“흑영대가 강호로 나갔으니 곧 소식을 전해 올리겠습니다. 어쩌면 지금쯤 소교주를 만났을 수도 있겠습니다.”
조치양은 고개를 들어 적발 노인을 바라보았다.
눈앞의 존재는 당대 천하제일을 바라보는, 어쩌면 이미 그 성좌에 발을 디뎠을 수도 있는 그런 존재였다.
물론 절대 넘어설 수 없는 무적의 존재가 중원에 그 위대한 육신을 웅크리고 있었지만, 그 존재는 강호의 일에 손을 끊은 지가 오래전이다.
그를 제외한 현역에서 자신의 주인을 넘어설 자,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런 존재가 지금 주체하기 힘든 분노를 보이고 있었다.
그의 분노를 사고 살아날 자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하지만 지금 자신의 주인은 어쩔 수 없는 대상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분노를 풀지도 못할 대상은 바로 신교의 소교주인 은발마검 연무진이다.
조치양은 그의 분노가 자신의 것인 양 마음이 쓰였다.
“교주님, 너무 심려 마십시오. 소교주께선 반드시 보름 안에 돌아오실 겁니다. 극마전의 중요함을 누구보다 깨우치고 계신 분이시니 그분을 믿어 보십시오.”
“조치양!”
“예! 교주님.”
“사전주(四展主)들에게 전해라. 날짜의 변경 없이 극마전을 치를 것이라고. 그리고 무진이 그놈이 제시간에 오지 않으면 출전 포기와 중립 표방 또한 지키겠다고 말이다.”
“교주님!”
조치양의 육신이 거칠게 흔들렸다.
이토록 쉽게 결정을 내릴 사안이 아니다. 그의 눈빛이 그렇게 전했으나 적발 노인은 단호했다.
“모든 것은 무진 그놈에게 달렸다. 스스로 일어서지 못한다면 내 손으로 목을 잘라 선조들께 죄를 빌 수밖에.”
적발 노인이 몸을 일으켜 대전을 나섰다.
숙여진 조치양의 어깨는 일어설 줄 모른 채 하염없이 떨렸다. 자신의 주인이 혈육보다 크게 생각하는 것이 딱 하나 있었다.
신교!
그랬다.
신교를 위해서라면 핏줄마저도 포기할 존재가 바로 자신의 주인이었다. 목을 자른다면 그렇게 하고도 남을 성정이기에 뇌어양은 가슴을 채워 오는 불안감에 한동안 그 자리를 일어서지 못했다.
* * *
둘은 빠르게 달렸다.
주변의 사물이 ‘휙휙’ 하는 소리를 내며 뒤로 지나갔다. 좌측을 달려가던 연무진이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물어 왔다.
“말씀을 전하고 가야 하는 것 아닌가?”
“괜찮아.”
“하하! 그러다가 그분에게 신강이 작살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군.”
“날 기분 나쁘게 하지만 않으면 된다.”
“그런가? 하하하하!”
혁련소의 농 섞인 대답에 연무진은 크게 웃었다.
천하의 신교가 어쩔 수 없어 하는 존재, 그 존재의 핏줄이라면 무조건 최고의 대접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웃음이 나오는 것은 그러한 존재를 벗으로 둔 것이 좋아서 그런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는 자신만의 생각일 뿐이었지만…….
“비밀로 해. 번거로운 건 질색이니까…….”
“그러지. 알려지면 교 전체가 시끄러워질 테니.”
“신교가 시끄러워지는 것은 괜찮아. 내가 잡혀가는 것이 문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