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6
<귀환무사 226화>
귀환무사 2부
1화
제1장 혁련소, 연무진을 만나다
산동의 중심에 솟아 있는 태산(太山)은 그 영험함이 하늘에 닿은 곳이라 알려진 천하에 으뜸가는 명산이다.
고대 제국의 황제들이 하늘을 받드는 봉신의 제를 지내는 곳이기도 한 태산은 서쪽을 가르는 황하와 동쪽에 펼쳐진 동해의 기운까지 어우러진, 그야말로 하늘과 닿아 있는 성산으로 불리기에 충분했다.
높이보다는 그 신비스러운 영험함으로 세상의 으뜸으로 인정받는 그곳의 초입에 서로 상반되는 기운을 지닌 두 청년이 마주하고 있었다.
자연의 한 부분인 양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서로에게 검을 겨눈 그들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노려보는 자와 그저 담담하게 쳐다보는 자는 얼굴 역시 눈빛처럼 상반된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백색 장포에 갈색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청년은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은발 청년을 담담한 빛으로 바라보았다.
은발 청년의 빼어난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는데 상대를 노려보는 그의 눈빛은 당혹, 불신, 분노 등으로 복잡하게 어우러져 있었다.
“믿을 수 없군.”
은발 청년의 입에서 묵직한 음성이 흘러나온다.
입을 열자 거친 숨결이 갈색 머리 청년의 얼굴까지 닿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상대가 대꾸를 하지 않자 은발 청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후후후! 천하에 너 같은 자가 있다는 걸 알았다면 서둘러 강호로 나오지 않았을 것을…….”
스스로에 대한 자책이 묻어나는 목소리. 그러나 갈색 머리 청년은 여전히 입을 닫은 채 은발 청년을 직시하고만 있었다.
그런 그의 분위기는 태산을 뽑아 그 자리에 박아 놓은 듯, 넘을 수 없는 철벽을 연상시켰다.
은발 청년의 얼굴이 실룩거렸다.
“이름 석 자 정도는 알고 싶군. 적어도 첫 패배를 안긴 상대의 이름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나?”
대답이 없다.
은발 청년이 다시 말했다.
“오만한 것인가? 아니면 성정이 과묵한 것인가?”
여전히 상대는 대답이 없다.
은발 청년은 화가 치밀었다. 패배에 대한 분노보다 당장의 무시에 대한 감정이 우선하자 다시 검을 섞고픈 욕구마저 들었다.
“강자의 아량마저 없다는 건가. 그렇다면 죽을 때까지 다시 싸울 수밖에.”
“이름이 그렇게 중요한가.”
비로소 상대가 반응을 보이자 은발 청년의 수려한 눈썹이 슬쩍 꿈틀거렸다.
“내겐 중요하다.”
“혁련소. 그게 내 이름이다. 이제 되었나?”
담담한 음성이 갈색 머리 청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화를 내려던 은발 청년이 낯빛을 바꾸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린아이 같은 빠른 감정의 변화다. 대체적으로 이런 종류의 사람은 순수하거나 정반대인 경우가 많다.
은발 청년의 표정이 다시 바뀌었다.
분명 처음 듣는 이름이다. 그러나 혁련이라는 성이 주는 무게감은 그의 성난 눈동자를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그의 이름을 듣자 불현듯 하나의 존재가 떠올랐다.
자신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존재, 고금을 통틀어 가장 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그 존재와 청년의 성이 같았다.
그리고 언젠가 한 번 보았던 그와 눈앞의 청년은 무척 닮아 있었다.
눈동자의 흔들림이 더욱 강렬해졌다. 그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묵직하게 가라앉는 느낌을 준다.
그는 그런 존재였다.
“비슷한 이름을 지녔군. 그분과…….”
갈색 머리 청년의 눈동자가 이채를 발했지만 이내 본연의 심유함으로 가라앉는다.
스르릉!
검집에 검을 넣어 버린 은발 청년이 깊은 숨을 내쉬고서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그대의 이름, 가슴속에 새겨 놓겠다. 그리고 오늘의 패배도…….”
은발 청년이 몸을 돌렸다.
그가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려 할 때까지도 혁련소는 그를 보고만 있었다.
걸음을 옮기던 은발 청년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패배한 자의 그것으로 보기 힘든 환한 미소가 그의 얼굴을 덮고 있었다.
“이름 정도는 물으리라 기대했는데, 패자의 이름 따윈 알고 싶지 않다는 것인가?”
혁련소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종잡을 수 없는 상대의 감정 변화 때문이다.
“말이 많은 친구군.”
“첫 패배가 사람을 이렇게 만드는군. 그런 그대는 당연히 이런 내 마음을 모르겠지? 패배를 모르고 살았을 테니…….”
“지금까지 수십 번을 싸웠지. 하지만 이긴 것은 이번이 처음이야.”
“……뭐?”
그 말에 은발 청년의 얼굴이 불신으로 물들었다.
자신은 자신이 속한 곳에서도 꽤 강자에 속한다. 이미 절정을 넘어선 자신이다.
그런 자신을 눈앞의 청년은 일각 만에 검을 거두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결코 만만치 않는 고수라고 봐야 했는데, 고작 이번이 첫 승리라니…….
자존심이 한 번 더 구겨지는 순간이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더 비참해지는군.”
“승패가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지.”
“득도한 고승처럼 말하는군. 마음이 쓰리지만 강자들의 사치라고 봐야겠지?”
혁련소의 눈가에 슬쩍 주름이 잡혔다.
잠시 은발 청년을 담담한 빛으로 쳐다본 그가 입을 열어 물었다.
“이름은?”
“누워서 절 받는 것이 이런 기분일 줄은 처음 알았군.”
씁쓸하게 미소를 지어 보인 은발 청년이 다시 몸을 돌렸다.
“연무진! 기억해 두게. 나의 이름 석 자를…….”
중얼거린 은발 청년, 연무진이 패배의 흔적을 남기고서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가 사라져 간 방향을 응시하던 혁련소가 몸을 돌렸다.
“신교라…….”
천하만마의 지배자로 군림하는 신교주 연유극, 그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으니 그의 이름이 사라져 간 청년의 이름과 같았다.
은발마검(銀髮魔劍) 연무진.
자신에게 패배하고서 사라진 바로 그 청년이었다. 그는 잠시 연무진이 사라져 간 방향을 쳐다보며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응시했다.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이 서서히 어둠을 두르기 시작했다. 지평선 너머에서 붉은 석양이 하루의 생을 마감하고 떨어져 내린다.
‘지금쯤이면 들통이 나도 났겠군.’
관옥 같은 얼굴에 슬쩍 그늘이 진다.
미간을 슬쩍 좁힌 그가 이내 전방으로 시선을 던졌다.
황제의 오만함을 닮은 듯, 그 고고함을 드러낸 태산의 장중한 그림자 위로 붉은 태양이 완연한 아름다움을 뽐내며 걸려 있었다.
‘잡히면 수련동이야. 이번엔 스스로 돌아갈 때까지는 절대 잡히지 않겠다.’
뚜벅! 뚜벅!
그가 붉게 타오르는 석양 속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그의 육신은 석양의 품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 * *
화룡검(火龍劍) 뇌우(雷雨)는 당금 천하의 이름난 고수이자 전대 무림맹의 호법을 지닌 위인으로, 악을 보면 참지를 못한다고 소문난 열혈호한이자 중원 최고의 객잔 화룡루의 주인이기도 했다.
무림맹의 호법직을 은퇴한 그는 무림인의 본분은 마다하고 숙수의 길을 걷고 있는 특이한 위인이기도 했다.
타고난 재주가 있었던 탓인지 명성만큼이나 그의 요리 솜씨 또한 대단했으니 화룡객잔은 그로 인해 연일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화룡객잔은 모두 삼 층으로 이루어진 꽤 큰 객잔이다.
일반 고객들을 주로 받는 일, 이 층과는 달리 이름난 무림의 고수이거나 지역의 유지들이 주로 애용하는 삼 층은 그 음식값이 상당히 비쌈에도 불구하고 빈자리가 없었다. 모두가 화룡검 뇌우의 명성 탓이다.
상당히 넓어 보이는 객잔 안은 갖가지 기화이초를 심어 놓은 분재와 뛰어난 장인들의 작품들로 인해 한껏 고급스러움을 자아냈는데, 그런 삼 층 객잔에 바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창가의 탁자에 백색과 흑색 장포를 입은 청년들이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갈색 머리에 백색 장포, 은발에 흑색 장포를 걸친 청년들은 좀처럼 보기 힘든 특이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는데 눈에 띄는 그들의 용모 때문에 객잔 안의 다른 인물들은 이따금 그들을 힐끔거렸다.
그들은 바로 태산의 초입에서 결투를 벌이고 헤어졌던 혁련소와 연무진이었다.
“후후! 이런 게 인연이라고 하나. 이곳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은발 청년, 연무진이 혁련소를 보며 웃음을 흘린다. 묵묵히 술잔을 기울이는 혁련소는 그저 바깥을 힐끔거릴 뿐 대화엔 무관심해 보였다.
쪼르륵!
따르는 술이 잔에 부딪치는 소리가 유난히 연무진의 귓속을 크게 울렸다.
연무진이 술잔을 들어 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마시게. 술은 내가 사지.”
“패배하고 술까지 사면 억울하지 않나?”
“크크! 그렇군. 하지만 마음에 드는 친구를 만난 것으로 대신하면 그다지 억울할 것도 없겠지.”
“친구를 사귄다는 것이 그다지 쉬운 것은 아니지. 그리고 너와 친해지고 싶은 생각이 내겐 없으니 친구라는 말, 함부로 하지 마!”
“자네 마음이야 어떻든 나완 상관없어. 난 그저 내가 좋으면 그것으로 다인 놈이니까.”
“세상 편하게 사는군.”
투덜거린 혁련소가 술잔을 입으러 가져갔다.
뜨거운 화주가 뱃속을 달구자 저절로 눈가에 주름이 생겨났다.
탁!
술잔을 내려놓은 연무진이 혁련소를 직시했다.
“어디 갈 곳은 있나?”
“발길이 닿는 곳이 전부 갈 곳이지.”
“크크! 내가 제일 부러워하는 말을 하는군.”
혁련소가 고개를 들어 연무진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가에 슬쩍 이채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어울리지 않는 말이군.”
“어울리지 않는다?”
“천하만마의 주인이 될 자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지.”
“알고 있었나?”
“그 이름에 은발을 지닌 자가 또 있을까.”
연무진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술잔을 기울인 그가 중얼거리듯 입을 놀렸다.
“신교의 소교주는 모든 것을 다 가지는 자리로 보는군. 뭐, 교주의 위에 오르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까짓 것들은 이미 오래전에 지워 버렸지. 지금은 그냥 낭인처럼 살고 싶을 뿐, 검 한 자루에 화주 한 병이면 그저 즐거울 뿐이야.”
연무진의 관옥 같은 얼굴에 그늘이 진다. 술잔을 기울이던 혁련소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이질감.
자신과는 전혀 다른 그 무언가가 연무진에게서 강하게 느껴졌다. 둘은 묵묵히 술잔을 기울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탁자를 덮어 가는 술병들은 늘어만 갔고 열을 넘어갈 때가 되어서야 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열어 놓은 창을 통해 바람이 들어오자 혁련소의 갈색머릿결이 흩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