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7
<귀환무사 217화>
“꼭 신호탄이 터져야 지원을 가는 것이우?”
“그래야지 않겠소. 자칫 이쪽을 비웠다가 적에게 측면을 내줄 수 있으니 말이오. 위험한 지경에 처하면 신호탄을 쏠 것이니 우린 이동 방향 그대로 전진하는 것이 좋겠소.”
조윤이 흘긋 뒤를 돌아보았다.
적용세가 이끄는 이 부대는 다른 부대에 비해 젊은 고수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청룡단과 구파의 청년 고수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하는 신마각의 무사들이 구성원의 전부였다.
은은한 긴장감을 드리운 청룡단과 청년 고수들에 비해 신마각의 무사들은 주변을 둘러보며 살벌한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
이미 마교에서부터 집단전에서는 정도맹의 질풍대와 더불어 천하제일을 논하던 그들이다.
수많은 전투를 치르면서 생사지경을 수도 없이 넘나들었던 그들이라 두려움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른 곳을 모두 노렸다면 이쪽 방향으로도 적이 올 수가 있으니 각별히 유의하며 이동한다!”
총호법 관승이 소리쳤다.
왕전이 주변을 쓸어 보며 섬뜩한 웃음을 짓는다.
“흐흐! 가급적이면 꽤 강한 새끼들이 왔으면 좋겠군. 그동안 너무 지겨웠거든.”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무조건 죽여야 할 놈들이니 한결 수월하겠어.”
조윤이 손에 잡은 창을 살펴보며 중얼거리자, 둘을 응시하던 관승은 그들의 소문을 새삼 떠올렸다.
‘싸움을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라고 하더니…….’
관승의 보기에 그들은 적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펑!
붉은 연기가 하늘에서 터졌다.
적용세를 비롯한 모두의 얼굴에 긴장감이 어린다.
“단리 노야의 부대 쪽입니다!”
“모두 저곳으로 이동한다!”
* * *
“적들이 더욱 늘어납니다!”
구절신개의 입에서 다급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신호탄을 쏘았으니 지원군이 올 게다! 그때까지 버텨야 한다!”
“노야! 진을 방원으로 변형해야겠습니다! 이대로 가면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틸 수가 없습니다!”
단리황이 대뜸 소리쳤다.
“방원으로 바꿀 것이다! 고수들이 외벽을 맡는다!”
따다다당!
정도맹의 고수들은 우박처럼 쏟아지는 암기들을 검으로 막아 내며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었다.
단리황과 제갈각은 지독하게 날아드는 암기 때문에 적진으로 뛰어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들이 자리를 비우면 암기에 희생당하는 아군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기 때문이다.
묵련의 고수들이 사용하는 암기는 단순한 암기가 아니었다.
어지간한 호신강기는 그냥 뚫어 내는 위력에다 간간이 벽련탄의 위력과 맞먹는 폭약이 장착된 암기가 섞여 있어 검으로 쳐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벌써 개방의 고수들, 상당수가 멋모르고 타구봉으로 막아 내다 폭발의 여력에 휘말려 목숨을 잃은 상태였다.
쾅!
“우악!”
“소걸!”
개방의 고수들이 피를 뿌리며 날아가는 동료를 보며 울부짖었다.
참혹하게 구겨진 단리황의 얼굴 위로 죽은 자가 쏟아 낸 핏물이 쏟아졌다.
“늙은이! 이곳을 부탁한다!”
더 참지 못한 그는 제갈각에게 수비를 부탁하고는 그대로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허공에 뜬 그를 향해 엄청난 양의 암기들이 날아갔다.
따다다당!
단리황의 검이 번득이자 불꽃이 튕기며 암기들이 튕겨 나갔다. 괜히 오성의 일인이 아니었다.
바닥에 내려서기가 무섭게 그는 한 마리 호랑이처럼 적진을 휩쓸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움직임도 그렇게 오래가지는 못했다.
묵련 측에서 적색 무복을 걸친 초로의 노인이 그를 막아서며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이내 용호상박의 접전이 시작되었다. 오성의 일인인 단리황을 맞아 전혀 밀리지 않는 적포인의 무위는 실로 놀라웠다.
제갈각의 얼굴에 초조함이 어렸다.
그는 단리황을 도울 생각으로 빠르게 주변 상황을 살폈다. 그러나 빠져나갈 상황이 아니었다.
그의 속내를 짐작이라도 한 듯이 묵련의 고수들이 그가 선 곳을 노리고 움직였다.
이곳을 비우면 그들에 의해 진이 깨어질 게 분명했다.
얼굴에 주름이 깊어지며 노성을 터트렸다.
“이놈들!”
검이 불꽃을 피워 내며 뻗어갔다. 그를 향해 달려들던 적들이 피를 뿌리며 날아간다.
그때, 진의 중심 부근에서 강력한 폭발이 일어났다.
쾅!
“으악!”
제갈각의 고개가 벼락같이 뒤로 돌아갔다. 구절신개가 울부짖는 소리를 내며 그곳으로 몸을 날렸다. 개방의 고수들 십여 명이 한꺼번에 죽어 버리는 처참한 광경이 펼쳐졌다.
집중력이 떨어진 탓에 사방에서 날아들었던 암기들을 막아 내지 못해 벌어진 참상이었다.
“신호탄! 신호탄을 더 쏘아라!”
“적들이 몰려옵니다!”
“으악!”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혈야평의 둔덕이 통째로 움직였다. 살아남은 자들의 눈에 절망이 떠오른다.
둔덕을 새카맣게 덮고서 달려오는 적들, 제갈각의 눈에도 포기라는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간다.
“모조리 이곳으로 온단 말인가…….”
몰려드는 적의 수효는 어림잡아 천여 명쯤 되어 보였다.
다른 부대 전체가 온다고 해도 승패를 가늠하기 힘든 수효였다. 제갈각은 참담한 심정으로 단리황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그는 치열한 접전을 펼치고 있었는데, 조금은 그가 우위에 선 듯 보였다. 제갈각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폭발로 인해 진은 깨어져 버렸다.
기왕 이렇게 되었다면 적진으로 뛰어들어 하나라도 더 죽이고자 작정한 그는 단리황의 지척으로 몸을 날렸다.
단리황과 접전을 벌이던 적포인의 머리가 하늘로 솟구쳤다.
접전 중에 제갈각 같은 고수의 기습을 피해 내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늙은이! 어쩌면 같은 날에 제사상을 받게 될지도 모르겠군.”
“이놈아! 죽어서도 함께 다니잔 말이냐? 난 싫다!”
둘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진다.
죽음을 예감한, 아주 슬픈 미소였다. 구절신개가 그들의 옆으로 날아왔다.
그리고 함께 따라온 자들의 수는 고작 서른에 불과했다. 칠십여 명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개방은 구절신개, 하나를 남겨 두고 전원 사망했다. 나머지는 팽가와 단리세가의 고수들이었다.
“어! 지원군이 왔습니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단리황을 비롯한 모두의 낯빛이 비로소 밝아지기 시작했다.
“힘을 내자꾸나!”
단리황의 포효가 전장을 울렸다.
* * *
“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려!”
신마각의 무사들이 전장으로 이동하던 적진의 측면을 후려쳤다.
악승이 선두에 서서 대도를 휘두르며 길을 트자 신마각의 무사들이 그를 뛰어넘어 적진으로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측면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콰지직!
“으악!”
조윤의 창이 번쩍이며 지나가자 적의 수급이 연신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악승! 적당히 부수고 저들과 합류해라!”
조윤이 날카롭게 소리치고는 적진의 선두로 몸을 날렸다. 왕전이 뒤를 쫓았다.
적의 수뇌부들을 노린 것이다. 적용세와 관승은 청룡단을 이끌고 적의 지원 부대를 무시하고 곧장 단리황이 있는 곳으로 질주했다.
꽝!
강력한 폭발이 선두에서 일어났다. 파생된 강기에 휩쓸린 묵련의 고수들이 피를 뿌렸다.
왕전과 조윤이 천 명의 앞을 막아서자 물밀듯이 몰려들던 적의 가운데가 좌우로 짝 갈라졌다.
둘은 순식간에 적진에 갇힌 형국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일부러 의도한 바였다. 둘이 적진을 헤집기 시작하자 일대 소란이 일어났다.
“으아악!”
“몰려 있어라! 한꺼번에 죽이기 쉽게! 으하하하!”
왕전과 조윤은 양 떼 속의 늑대처럼 광포하게 움직였다.
죽어 가는 적들의 수가 급속도로 늘어났다.
정도맹의 고수들도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저들을 도우라!”
그 선두에 단리황과 제갈각이 섰다.
청룡단의 무사들과 구파의 청년 정예들도 용맹스럽게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난전이 벌어지자 단리황의 부대를 몰살 직전까지 몰고 갔던 묵련의 암기들이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전투는 이내 난전으로 바뀌었다.
수효에서 압도적인 묵련일지라도 전체가 한꺼번에 전장에 투입되지는 못했기에 전황은 비등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전황은 이내 묵련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압도적인 전력의 차이는 곧 체력의 고갈로 이어졌다. 더욱이 적용세를 능가하는 수준의 고수들이 상당수 포진되어 있었기에 청룡단과 청년 고수들은 이내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씩 뒤로 밀리는 것을 본 조윤이 입술을 깨물었다.
“왕전! 저쪽을 도와야겠다.”
“그러지!”
적진의 가운데에서 폭풍처럼 몰아붙이던 둘은 몸을 빼내어 청룡단의 무사들, 앞쪽으로 떨어져 내렸다. 측면을 휩쓸던 악승도 신마각의 무사들을 이끌고 청년 고수들의 앞쪽을 막아섰다.
전투는 잠시 중단되었다.
중앙을 휩쓸던 신마각이 빠져나가자 적의 수뇌부는 일단 물러날 것을 지시했다. 덕분에 대열을 재정비할 시간이 정도맹에게 주어졌다.
단리황이 조윤과 왕전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청룡단원들은 신마각의 무사들에게 뜨거운 눈빛을 주어 감사를 대신했다.
“다른 부대들이 도착할 때까지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합니다.”
적용세가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상당한 숫자이건만 저들이 주력이 아니라는 게 문제네.”
단리황의 말에 적용세와 관승이 그를 쳐다보았다. 미간에 골이 깊어진 단리황이 말을 이었다.
“저들을 이끄는 수뇌들의 무공이 생각만큼 강하지 않네. 분명 고수들은 따로 있을 것이네. 그들이 어느 시점에서 모습을 드러낼지, 그게 걱정이네.”
조윤이 끼어들었다.
“본성과 부딪혔던 자들 중, 저자들만큼 강한 자들은 수두룩했습니다. 따라서 단리 대협의 말씀이 옳습니다. 더 강한 자들이 몰려오기 전에 모든 고수들이 와야만 싸움이 가능합니다.”
“신호탄을 보았다면 조만간, 도착할 것이오. 그 시각이 어느 정도 소요될지가 문젭니다만…….”
“도중에 적과 부딪히지만 않는다면 한 식경 이내에 집결이 가능하지 않겠소?”
“한 식경이라…….”
단리황은 적진을 흘긋 살폈다.
그의 미간에 주름이 더욱 늘어났다. 적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모두는 대열을 재정비하고 다가오는 적들을 노려보았다. 조윤과 왕전이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적의 수뇌부를 제거하는 것이라 여기고는 이내 바닥을 차고 올랐다.
싸움은 다시 시작되었다.
폭발을 일으키는 암기를 염려한 정도맹은 난전이 유리하다고 판단,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적의 선두 부근이 이내 피와 살이 난무하는 참혹한 전장으로 돌변했다.
* * *
혁련천후는 앞을 질주하는 사대천불을 바라보며 내심 감탄했다.
‘상당한 내공을 지녔군. 저 정도면 적어도 내공 면에선 십전무제보다 아래가 아니다.”
자칫, 악연으로 엮일 뻔했던 그들이다.
“상당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어요.”
독고혜의 말에 혁련천후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확실히 기사회생한 그녀는 강해져 있었다. 자신도 희미하게 느껴지는 기운을 그녀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전쟁에 대한 긴장감마저 사라지게 만드는 그것은 그녀에 대한 사랑이었다.
“저도 느껴져요, 서둘러야겠어요!”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영호수란도 느낀 모양이다. 그녀는 혁련강이 직접 천살강기를 심어 주었다.
초식면에선 다소 부족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내공만큼은 오성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올라선 그녀였다.
“란 매도 무척 강해졌어요. 마음이 놓여요.”
“언니만 하겠어요?”
“적은 강하다. 긴장을 늦추어선 곤란해.”
“우릴 지켜 줄 거잖아요. 맞죠, 언니?”
전투가 목전에 다가왔음에도 그녀들은 긴장감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혁련천후를 배려한 의식적인 행동일 수도 있었다.
셋은 달리면서도 어렵지 않게 대화를 나누었다. 어지간한 고수들도 상당히 힘들어하는 경지가 내공을 운용하는 상태에서 말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