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4
<귀환무사 214화>
그때 차가운 음성이 모두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이군.”
모두의 고개가 뒤쪽으로 돌아갔다.
악승이 허리를 굽히고 신마각의 무사들도 일제히 가슴에 손을 대고 예를 취했다.
상관소의 눈동자에 순간 지독한 원한과도 같은 기운이 스치고 지나갔다.
흑색 장포에 흑발을 늘어뜨리고 허리엔 장검 하나를 두른 사내, 이젠 강호무사들에게 유행처럼 번져 버린 복장의 혁련천후가 무심한 눈으로 상관소를 응시하며 다가섰다.
깊게 가라앉은 두 눈은 대해처럼 무겁고 고요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용암처럼 뜨겁게 달구어진 사내가 그와 함께 있었다.
“고작 계집이라고 했는가? 상관소!”
십지신검 독고무였다.
그는 성큼 앞으로 나서며 곧장 상관소를 향해 걸었다.
“십지신검!”
“내겐 생명과도 같은 아이다. 그 아이가 네놈, 사촌에 의해 목숨을 잃을 뻔했다. 이백 명의 생명보다 내 동생이 소중하다고 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대정문은 강호를 침략한 부상막과 손을 잡고 불순한 의도로 그 아이를 노렸다. 설마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상관소!”
“……!”
혁련천후가 독고무의 어깨를 슬쩍 잡았다.
눈빛으로 그를 만류한 그가 앞으로 나섰다. 정작 소문으로만 들었던 신마성주를 코앞에서 보게 되자 몰려들었던 군웅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숨죽여 그를 지켜봤다.
“집법당주라고 했나?”
오만했다. 그러나 그것을 오만이라 여기는 자, 아무도 없었다.
“시비를 걸면 붙어 주는 곳이 강호다. 나를 노리고, 내 가족을 해하면 반드시 복수하는 것이 강호인이다. 난 강호의 율법에 따랐을 뿐이다. 상관소!”
상관소는 입을 열지 못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원한이 있다면 언제든 도전해라. 단!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이나 말을 한다면 내가 먼저 검을 뽑을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혁련천후는 몸을 돌렸다.
상관소는 움직이지 못했다.
꿈에서도 증오했던 대상이 코앞에 나타났건만 막상 그를 보니 손과 발이 오그라들어 움직일 수 없었다.
“그 말대로라면 당신들의 손에 죽어 간 누군가의 동료들이 당신들을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단 말이오!”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혁련천후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모두가 그를 주목했다.
그의 입술을 뚫고 나온 말은 지극히 짧고 단호했다.
“그게 강호다!”
* * *
신임 맹주이자 사천왕의 일인인 남궁기는 혁련강과 혁련천후에게 미안함을 나타냈다.
연무장에서의 일을 들었던 까닭이다.
“죽은 자들의 입장에서 그럴 수도 있음을 부디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구려.”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렇게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니 고맙소이다!”
혁련강과 남궁기의 대화를 지켜보던 수석 장로 적용세가 두 손을 모아 감사를 표하고는 다소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맹의 전서에 의하면 묵련이 성문을 열고 나섰다 합니다. 그 수가 무려 삼천에 이른다 하니 조속히 대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강호의 세력으로 보기엔 엄청난 대병력이다.
남궁기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급적이면 국지전을 벌이려고 했는데, 놈들이 저렇게 나온다면 어쩔 수 없이 전면전으로 흐를 수밖에 없겠군.”
관승이 나섰다.
“전면전은 관의 눈길을 받게 됩니다. 자칫 무림 전체가 곤란한 지경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방법이 없질 않느냐? 놈들이 저렇듯 떼거리로 몰려든다면 우리도 그에 맞게 대처할 수밖에!”
“……!”
묵묵히 찻잔을 기울이던 혁련천후가 나섰다.
“전투에 투입할 만한 인원이 몇이나 됩니까?”
“모두 모은다면 일천 정도가 될 것이오.”
모자라도 한참은 모자란 숫자다.
영호도성이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난처하게 되었군.”
“문제는 군웅들이 그들의 무서움을 모르고 있다는 것에 있소. 전대의 고수들과 전 전대의 기인들의 합류로 그들은 승리를 자신하고 있소. 전투가 벌어져 비세로 몰린다면 급격한 사기의 저하로 이어질 것이 분명하오.”
남궁기의 말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혁련천후가 다시 나섰다.
“놈들은 혈야평에 본대를 둘 것입니다. 그 외에는 삼천의 병력이 한꺼번에 움직일 만한 공간이 없으니 분명 그곳에 본대를 두고 우리의 움직임을 살피려고 들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간은 충분합니다.”
“시간이라면……?”
“방도를 마련할 시간 말입니다. 지금 그것에 대해 논의하고 있으니 맹주께서는 부대 편성부터 해 주십시오. 물론 신마성과 몇몇 세가는 독자적으로 움직입니다. 그것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육 전주라면 반드시 해법을 내놓을 것이오. 그러니 정도맹은 정도맹대로 서둘러 주시오. 본 성도 자체적으로 방안을 마련하겠소.”
혁련강의 말에 정도맹의 수뇌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육승이 살아 있음을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라면 기대할 만했기에 모두는 다소 굳었던 얼굴들을 풀었다.
그때 대전의 문이 열리며 무사 하나가 빠르게 들어섰다.
전신을 흑색천으로 두른 그는 비영전 소속의 무사였는데 남궁기가 아닌 혁련천후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급보입니다! 호북과 호남, 그리고 산동 쪽에서 수천에 달하는 무리들이 이곳으로 향하고 있다 합니다!”
모두가 크게 놀랐다.
지금껏 말없이 앉아만 있던 신기수사 적용백이 물었다.
“급보라면 그들이 설마 적이란 말이냐?”
“산동 쪽의 정도맹 소속 문파들이 그들에 의해 무너지고 있습니다. 벌써 무너진 문파가 여섯에 이른다고 합니다!”
“뭣이라!”
정도맹의 수뇌들은 경악에 가까운 표정들로 변했다.
혁련천후를 비롯한 신마성도 표정이 경직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사실이라면 그야말로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삼천도 버거운데 또 다른 수천의 병력들이 몰려든다면 승패는 불을 보듯 훤한 것이다.
“급보입니다!”
대전의 문을 통해 또 다른 비영전 소속의 무사가 빠르게 들어섰다.
모두가 굳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역시 혁련천후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산동에서 발호한 적들이 모조리 몰살을 당했다고 합니다!”
“뭣이! 그게 사실이더냐?”
“투왕께서 기마병단을 이끌고 그들을 모조리 제압하시고는 이곳으로 오시는 중이라고 합니다! 한데……!”
“계속해 보아라!”
“투왕께서 이끄는 기마병단의 수가 무려 오만에 이른다고 합니다.”
모두가 다시 놀람으로 눈을 크게 했다.
오만이면 어지간한 국가를 정벌할 때에나 쓰이는 대군이다. 그것도 보병이 아닌 기병이라니…….
혁련천후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남궁기가 놀라서 물었다.
“투왕이 혹 나라의 군사들을 이끌고 오는 것이 아니오?”
나라의 군이 무림문파 간의 세력 충돌에 개입하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중차대한 문제였다.
쌍방 간의 승패를 떠나 무림의 존립, 그 자체를 위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혁련천후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는 나의 수하이자 벗입니다. 무림에 해를 끼칠 인물은 아닙니다.”
“하면, 기병전단 오만을 이끌고 이곳으로 오는 연유가 무엇이오?”
남궁기는 여전히 놀란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혁련천후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하지만 그는 끝끝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혁련강이 나지막이 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이렇게 되면 적 하나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소.”
그러나 다른 이들은 결코 웃지 못했다.
* * *
쾅!
“으악!”
청룡언월도가 지나간 자리엔 핏물만이 자욱했다.
담대소천은 고개를 들어 전방으로 시선을 던졌다. 흑색 무복을 걸친 자들이 맹호처럼 날뛰며 기마병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강호인들이었다.
제아무리 훈련으로 다져진 장수라도 그들을 당해 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흑색무복을 걸친 자들을 상대하는 장수들은 달랐다.
말을 버리고 땅으로 내려선 그들은 여럿이 하나를 상대하며 난전을 벌였다.
이미 곳곳에 죽은 자들이 흘린 피가 대지를 질퍽하게 적셔 놓았다.
흑색 무복을 걸친 자들과, 갑주를 걸친 장수들의 시신이 처참하게 한데 뒤섞여 있었다.
담대소천의 눈동자가 불꽃으로 일렁거렸다.
퍽! 퍽!
청룡언월도가 핏빛 안개를 만들어 냈다.
목이 잘려 죽어 가는 자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산 자를 가려 내어 숨통을 끊어라!”
평소의 담대소천이 아니었다.
그는 한 마리 야수와도 같이 난폭하고도 무자비한 살수를 펼쳐 냈다.
전장에 뛰어들면 죽음의 사신으로 돌변한다는 소문이 무색할 정도였다.
그를 향해 달려들던 자들의 육신이 허공에서 산산조각으로 흩어졌다.
우웅!
담대소천의 전신에서 가공할 기운이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부관들이 쓰러져 꿈틀거리는 적의 목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장군! 적들이 도주합니다!”
부관 하나가 손으로 북쪽을 가리켰다.
서른 정도로 보이는 자들이 북쪽 산악지역으로 도주하는 모습이 담대소천의 눈에 잡혔다.
당초 오백이던 적들이다.
그러나 반 시진 가량의 전투에서 거의 몰살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는 드디어 꼬리를 빼고 있었다.
군병들의 피해도 결코 적지 않았다.
일천에 가까운 군병들이 적에게 목숨을 잃었다. 담대소천은 분노했다.
“여기서 기다려라!”
쾅!
그의 육신이 대지를 박차고 북쪽으로 쏘아졌다.
거리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짧은 시간에 좁아졌다. 부관들은 번쩍이는 빛들을 보며 눈을 호흡을 죽였다.
도주하던 적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광경이 생생하게 그들의 눈을 통해 뇌리로 전달되었다.
그들에게 담대소천은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초인으로 보였다.
“엄청나다…….”
누군가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담대소천이 돌아오는 데 걸린 시각은 고작 이각에 불과했다.
부관들이 한쪽 가슴에 손을 대어 그를 경배했다.
“다른 곳의 놈들은 어찌 되었느냐?”
“발호한 세 곳 중, 두 곳은 이미 전멸시켰습니다만, 한 곳은 섬서로 접어들었다고 합니다.”
“좋아! 모두 섬서로 간다!”
두두두!
천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 * *
거대한 깃발이 바람에 펄럭인다.
이 장 너비의 한가운데는 묵련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는데, 그것을 쥔 무사의 눈동자는 정도맹의 본대가 있는 혈야평의 건너편을 향해 던져졌다.
우드득!
죽은 자의 육신이 섬뜩한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시신을 밟은 자의 전신은 광포한 마기로 넘실거렸다.
“천왕이시여!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황금색 갑주를 걸치고 보기에도 섬뜩한 대부를 양어깨에 두른 장한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적발 적염의 인물에게 머리를 조아린다.
“기령이 죽었다, 하후광!”
“복수를 명하시면 놈들의 목을 바치겠습니다!”
“놈은 어리석었다. 본좌의 말을 들었더라면 죽지 않아도 되었을 터인데…….”
“……!”
“하후광! 아이들을 보내라. 철갑신마의 무서움을 놈들에게 보여 주고 오너라!”
“명을 받듭니다!”
하후광이 거대한 몸을 일으켰다.
팔 척에 이르는 장신에 울퉁불퉁한 근육은 천하 역사를 연상시켰다.
그의 어깨에서 황금색 대부가 번쩍 빛을 발했다.
“철갑의 후예들은 앞으로 나서라!”
그의 명이 떨어지자 열에 이르는 거인들이 앞으로 나섰다.
모두가 하나같이 거대한 대부를 양손에 틀어쥐고 있었는데, 마교 멸망의 주역인 철갑신마의 후예들이 바로 이들이다.
그들 말고도 스물에 달하는 자들이 뒤쪽에 늘어서 있었다.
그들은 앞선 자들과는 달리 엄청나게 넓은 대로를 가슴에 품고 있었다.
“나와 함께 정도맹의 심장을 박살 내러 간다! 모두 출진 준비를 갖추라!”
거인들이 하후광의 뒤쪽에 횡으로 늘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