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3
<귀환무사 213화>
진천의 뒤를 쫓던 자는 뇌어양의 검에 의해 두 조각으로 썰어졌다.
혁련강의 시선이 다시 동소에게로 돌아갔다.
“응?”
없었다.
순간 혁련강의 얼굴이 노기로 물들었다.
잠깐을 방심한 스스로를 자책한 그는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구검마의 또 다른 자들도 몇이 보이지 않았다.
혁련천후가 다가왔다.
“몇 놈이 도주했습니다.”
“방심했구나, 이런 고약한 경우가…….”
“일단은 정도맹으로 가는 게 좋겠습니다. 흑야가 성공했다고 하니 신임 맹주를 만나 차후에 관해 논의를 해야겠습니다.”
“그래, 그러자꾸나. 허어!”
혁련강은 꽤나 까다로운 상대가 될 동소를 놓친 것이 못내 아쉬운 듯, 얼굴을 펴지 못했다.
싸움은 이미 끝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하나같이 강한 자들이었으나 자신들과 마교의 고수들을 당해 내지는 못했다.
혁련천후는 아군을 살폈다.
몇이 부상을 입은 것 말고는 별다른 피해는 없는 듯 보였다.
그는 가장 심한 부상을 입은 장용백에게로 다가갔다. 씩씩거리며 분을 삭이지 못하는 그를 보며 옅은 미소를 비친 그는 검집에 검을 넣었다.
제법 강한 자들과의 첫 전투는 압도적인 승리로 끝이 날 분위기였다.
아직 광승과 철갑신마의 진경을 익힌 자들이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는 몰랐지만 자신감이 생겨났다.
수련의 성과는 자신의 수하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교의 고수들도 더 강해져 있었다. 그것이 그는 좋았다.
차가운 바람이 역겨운 피비린내를 쓸고 지나갔다. 얼굴을 덮은 머릿결을 치우며 북쪽을 돌아보았다.
희미하게 묵련의 성이 눈에 들어왔다.
“조만간 더 강한 자들이 모습을 드러내겠지?”
“……!”
“서둘러 정도맹의 본대로 가자꾸나. 술이라도 한잔 걸쳐야 속이 풀리겠다.”
싸움은 끝이 나 있었다.
압도적인 승리였다. 그러나 조금은 찝찝한 뒷맛을 남긴 승리였다.
동소를 비롯한 수뇌부 몇을 놓친 것이 조금은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제5장 이기려면 손을 잡아야 한다
시름과 분란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정도맹의 본대에 신마성과 청룡단, 백호단이 들어선 것은 해가 중천에 떠오를 즈음이었다.
검후와 백선녀가 가장 앞에서 그들을 이끄는 것을 본 무사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그들을 반겼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신마성을 껄끄럽게 여기는 세력들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저 새끼들 인상이 왜 저래?”
악승이 고리눈을 하고서 그런 인물들을 노려보았다. 진유가 쓴웃음을 지으며 악승을 말렸다.
곽범도 머쓱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의 사부이자 둘 만남은 사천왕의 하나인 구검신협 좌무영이 환한 얼굴로 걸어 나오는 것을 보고는 재빨리 뛰어가 허리를 숙였다.
총호법 관승이 껄껄 웃으며 다가왔다.
“껄껄! 어서 오십시오!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독고혜가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총호법님!”
“검후께선 더 아름다워지셨습니다. 어서 안으로 드십시다.”
관승의 안내로 독고혜와 영호수란은 가장 큰 규모로 세워진 군막으로 들어갔다.
물론 호위를 핑계로 화산의 제자들도 모조리 그 안으로 함께 들어갔다.
악승은 신마각의 무사들과 별도의 공간으로 안내받았다. 영호세가와 남궁세가, 백리세가의 고수들도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신마각과 함께 움직였다.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자들이 꽤 있었기 때문인데 그들은 그것을 무시하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너희들 저놈들과 무슨 원수졌냐?”
악승이 백리추를 보며 시큰둥하게 물었다.
“하하! 부러워서 저러는 것 아닙니까? 대주님처럼 훌륭하신 분과 함께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입니까?”
“이 자식이 손발이 오그라들게 헛소리는…….”
“신경 안 씁니다. 술 드시겠습니까?”
“술? 크험! 좋지!”
악승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백리관이 바람처럼 어디론가 달렸다.
그러고는 잠시 후, 혼자 갔던 백리관이 셋을 더 데리고 왔는데, 모두가 품에 술병을 가득 안고 있었다.
악승의 얼굴이 대번에 화색이 돈다.
“오호! 어디서 그 많은 술을 얻었냐?”
“주방에 제 청룡단 동기가 있어서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더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헤헤!”
“이놈들이 동기냐?”
“옙! 뭐해 인사들 드려, 대신마각의 각주님이셔!”
“무당의 도광입니다.”
“종남의 이홍입니다.”
청년들은 청룡단 소속의 무사들이었다.
다만 배급 조에 속했기에 전투에 참가했던 청룡단에는 들지 못했었다.
고개를 끄덕여 화답한 악승은 술병을 열어 거의 반병을 한 입에 마셔 버렸다.
그가 오만상을 찡그리며 요리 한 점을 집어갈 때였다.
“흥! 전시에 술판을 벌이다니, 신마성은 규율도 없는 무뢰배의 집단인가 보군.”
비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악승의 얼굴이 야차처럼 구겨지며 뒤로 돌아갔다. 막 자리에 앉아 휴식을 취하려던 신마각의 무사들이 일제히 노기를 드러내자 주변이 뜨거운 기운으로 요동쳤다.
“억!”
장대한 체구에 어깨에 거대한 대도를 두르고 섰던 청년의 입에서 묘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가 방금 악승을 비꼬았던 장본인이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주변을 요동치는 강력한 열기에 그는 자신의 입을 원망하는 중이었다.
“방금 개소리를 지껄인 게 너냐?”
악승이 성큼 청년에게로 걸어갔다.
“……!”
악승의 전신에서 광포한 기운이 발산되자 청년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움찔거렸다.
한마디로 잘못 건드린 것이다. 그저 알량한 자신의 수준으로 살펴보니 신마각의 무사들이 우습게 느껴졌던 청년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자 시비를 걸었던 터였다.
“신마성이 뭐, 어쩌고 어째? 이 개 뭐만 한 새끼가 뒈지려고 작정을 했구나!”
고리눈을 부라리는 악승의 말투나 행동은 영락없는 뒷골목 파락호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그가 손을 뻗어 청년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청년은 말 한마디 못하고서 멱살을 내주어야 했다.
“그 손 놓지 못하겠느냐?”
싸늘한 음성이 뒤쪽에서 들려오자 악승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신경질적으로 청년을 팽개친 그가 거칠게 몸을 돌렸다.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행패를 부리는 게냐?”
차가운 용모에 청색 장포를 걸친 초로의 노인이 싸늘한 눈빛으로 악승을 노려보고 서 있었는데, 주변으로 열에 이르는 자들이 같은 표정으로 악승과 신마각의 무사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술을 가져온 백리관은 내심 발을 굴렀다.
그뿐이 아니다. 백리초를 비롯한 삼대 세가의 인물들도 나타난 자들을 보며 난감한 기색들을 보이고 있었다.
“당신들은 뭐지?”
악승의 얼굴이 이내 진지하게 굳어졌다.
꽤나 강한 자들이 열이나 자신을 노려본다. 그러나 두려움은 없다.
그저 그들이 정도맹에서 제법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로 보였기 때문인데, 자신 때문에 신마성이 곤란함을 겪을까 염려해서였다.
“쥐꼬리만 한 명성을 얻었다고 눈에 뵈는 게 없는 놈이구나. 감히 노부들에게 당신이라?”
“신마성에서 네놈의 직위가 무엇이더냐!”
노인들의 돌아가며 호통을 치자 굳어졌던 악승의 얼굴이 이내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다소 긴장감을 드러냈던 눈동자도 이미 고리눈으로 바뀌어 있었다.
“경고하지. 나를 욕하는 것은 괜찮으나 신마성, 전체를 욕보인다면 사생결판을 내야 할 것이다. 늙은이들!”
“뭣이! 이, 이놈이……!”
“앞뒤 가리고 끼어들어야지. 저 뭐만 한 새끼한테 뭘 잘못했는지 먼저 물어보란 말이다.”
가장 날카롭게 생긴 노인이 분을 삭이지 못하고서 악승을 향해 성큼 다가왔다.
지독한 예기가 주변에 몰아쳤다.
“이거, 이렇게 나오면 싸우자는 거지?”
“오늘 네놈들의 오만한 콧대를 눌러 주마.”
“그래, 그럴 줄 알았다. 보아하니 우리가 잘나가는 꼴을 못 보는 족속들인 모양인데, 내가 주공께 경을 치는 한이 있더라도 늙은이, 너희들과 사생결단을 내주마!”
스르릉!
악승의 대도가 번쩍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신마각의 조장들이 일제히 악승의 곁으로 늘어서며 그들도 대도를 뽑아 들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보다 못한 백리추가 황급히 앞으로 나섰다.
“고정들 하십시오!”
“흥! 백리세가가 언제부터 신마성의 주구 노릇을 했느냐? 썩 비키지 못할까!”
“……!”
백리추는 한순간 말문이 막혔다.
명백히 백리세가를 모욕하는 발언이었다. 그때 영호세가의 대공자 영호진이 앞으로 나섰다.
“집법당주께서는 그만 화를 푸십시오. 함께 묵련을 대적하고자 모인 자리가 아닙니까?”
말투는 정중하되 표정은 제법 차가웠다.
그도 사실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신마성을 작정하고 폄하하는 그들의 태도 때문이다. 이제 영호세가는 신마성과 남이 아니다. 자신의 여동생이 신마성주의 부인이 되었으니 한 가족인 셈이다.
“오호! 영호세가도 백리세가와 뜻을 함께하는 모양이군. 그 큰 뜻에 남궁세가도 손을 보탰으니 참으로 환상의 조합이구나!”
다분히 비꼬는 어조다.
영호진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그도 불같은 성격은 악승에 못지않은 열혈호한이다. 다만 조부 십전무제 영호도성 때문에 그 성정을 누르며 살아온 그였기에 사람들이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이봐! 너희들은 빠져.”
악승이 둘에게 말을 건네고는 집법당주 냉면비검 상관소에게 성큼 다가섰다.
“이봐! 당신하고 나하고 둘이서 결정짓는 것이 좋겠군. 어때? 한판 붙을까?”
“천박하기가 개봉 밖의 거지만도 못한 놈이군. 좋다! 네놈의 그 오만한 주둥이에서 살려 달라는 말이 나오게 만들어 주마. 모두 물러서라!”
“흐흐! 그 성질하난 마음에 드는군. 너희들도 모두 뒤로 물러서라. 끼어드는 놈은 내손에 죽는다. 그리고 싸움이 끝나기 전에 고자질하는 놈도 죽을 줄 알라고…….”
모두가 뒤로 물러났다.
순식간에 중앙에 동그랗게 공간이 만들어지며 둘만이 그곳에 남았다.
챙!
상관소의 검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뽑혔다.
“알량한 명성을 좀 얻었다고 함부로 나대는 네놈들이 평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지. 엄연한 정파의 일원이었던 대정문을 피로 씻어 내고도 네놈들은 오히려 성을 내더군. 이백 명의 목숨이 네놈들에겐 고작 계집의 부상보다도 못했단 말이더냐?”
계집이란 말에 악승의 눈동자에 새파란 광망이 어린다.
“이봐! 늙은이, 그 입을 함부로 놀리다간 여기, 정도맹이 쑥대밭이 될 수도 있음을 명심하라고.”
“흥! 그 주인을 닮아 수족까지도 오만하기가 하늘을 찌르는구나. 이젠 정도맹까지 겁박을 하려 드느냐!”
상관소는 더욱 목청을 높였다.
몰려드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늘어났다. 그들은 집법당주와 마주하고 선 악승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부분이 악승을 처음 보았기 때문인데, 그들은 이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뀌었다.
“감히 맹의 집법당주에게 오만하게 굴다니, 신마성이 그렇게 대단한 집단이냐!”
“칼을 내려놓아라! 예가 어디라고 함부로 칼을 뽑고 설치는 것이냐!”
당초, 상관소와 함께 왔던 노인들이 목청을 높였다.
사람들이 모여들자 그들의 언성은 더욱 커졌다.
악승의 미간에 힘줄이 솟아났다. 이제야 노인들이 바라는 바가 짐작되었기 때문이다.
‘당했군.’
그랬다.
최초 자신을 자극했던 덩치 큰 애송이부터 눈앞의 상관소까지 일련의 상황들이 절묘하게 이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여기서 싸움을 벌이면 꼼짝없이 신마성은 정도맹에 들어와 행패를 부린 것으로 되어 버린다.
얼굴이 붉어진 악승을 보며 상관소는 득의만만하게 웃었다.
‘이런 교활한 늙은이들 같으니!’
악승은 화를 억누르려 무진 애를 썼다.
마음 같아선 그냥 처바르고 싶었지만 모여든 군웅들을 보니 차마 그럴 순 없었다.
다만 꼼짝없이 걸려든 스스로가 바보 같아서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