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2
<귀환무사 212화>
혁련강이 아닌 동소에게 화가 난 것이다.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혁련강에게 기가 죽은 듯 보이는 그가 이해되지 않는 유충이다.
혁련강의 시선은 동소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동소도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대만 목숨을 내어 놓는다면 물러가도 좋네.”
혁련강의 그 같은 말이 구검마 들의 분노를 불러왔다. 그들이 한 발 앞으로 나서자 주변이 폭풍 같은 기운으로 요동쳤다.
영호도성과 뇌어양, 천마사로가 혁련강의 옆으로 나섰다. 동소의 눈동자가 또다시 심하게 흔들렸다.
그제야 그들을 본 것이다.
‘신마성의 주력이 모조리 이곳에 있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저자는…….’
그랬다.
동소는 혁련강의 얼굴을 몰랐다. 그랬기에 그의 신분이 더더욱 궁금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영호도성과 마교의 수뇌부들을 보니 그가 누군지 짐작되었다.
“신마성주의 조부…… 맞소?”
“틀리지 않았네.”
순간 구검마들의 육신이 한차례 흔들렸다.
어쩌면 천하최강 일존, 견오와 비교되는 강자를 이제야 알아본 그들이다.
동소는 긴장감보다는 의문이 해소된 것에 대한 시원함이 느껴지는 야릇한 경험을 하고 있다.
혁련강이 일 보를 내디뎠다.
“그대들의 주인과 그대들, 그리고 세상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네.”
주변이 은은하게 진동을 시작했다.
그가 한 발 더 내디뎠다.
“일존 견오라고 들어 보았는가?”
“……!”
진동은 모든 이들의 옷깃을 흔들 정도로 서서히 강력해지고 있었다.
소나무의 솔방울들이 후두둑 바닥으로 떨어졌다.
혁련강의 세 번째 걸음이 동소의 전방 이 장 거리에서 멈추었다.
“그의 이름은 혁련강, 바로 노부일세.”
쿠쿵!
피아를 막론하고 모두가 놀랐다.
신비에 쌓였던 천하최강자의 현신을 모두는 두 눈으로 똑똑하게 보고 있었다.
스르릉!
집을 빠져나오는 백색의 대도는 이미 천살강기를 두르고 있었다.
혁련강의 입가에 떠올랐던 미소가 사라지며 광포함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이제 그만 지옥으로 갈 때가 되었구먼. 허허허.”
스슥!
* * *
쾅!
혁련강의 기세에 압도되었던 묵련의 고수들, 뒤쪽에서 산천초목이 흔들리는 폭발성이 터져 나왔다.
모두의 고개가 그곳을 향해 돌아갔다.
“비켜!”
시커먼 그림자가 가공할 속도로 양측의 중앙 접점 지역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 방향에 섰던 묵련의 고수들이 움찔하며 좌우로 갈라섰다.
쿠아앙!
그림자가 지나간 주변의 사물들이 후폭풍으로 휘청거렸다.
“성주!”
“어머!”
곳곳에서 놀람과 반가움의 목소리가 울렸다. 뒤쪽에 섰던 두 여인이 빠르게 그림자에게로 뛰어왔다.
혁련천후였다.
그의 허리에는 한 인물이 축 늘어져 있었는데, 바라보던 동소의 얼굴이 더없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본단을 침투했다가 도주했던 그가 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모두 죽었단 말인가?’
결코 적지 않은 인원이 그를 추격했었다.
그러나 그는 멀쩡한 모습으로 이곳에 나타났다.
혁련천후는 혁련강에게 전음을 보냈다.
[놈들의 자폭 위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소수만이 놈들을 상대하고 나머지는 뒤로 물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놈들도 자폭을 한단 말이냐?]
[어쩌면 천왕이라는 그자도 최후의 순간엔 그리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혁련강의 얼굴이 굳어졌다.
영호도성과 뇌어양, 그리고 천마사로가 둘의 옆으로 다가왔다. 장용백도 재빨리 그 옆으로 자리했다. 그들만으로 적을 상대하고자 했다.
혁련천후는 고개를 돌려 검후를 바라보았다.
[모두를 이끌고 정도맹의 본대와 합류해. 곧 뒤따라갈 테니…….]
[저도 이젠 강해졌잖아요, 돕겠어요.]
[당신은 저들을 보호해야지…….]
독고혜가 주변의 젊은 무사들을 흘긋 돌아보고는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눈빛으로 혁련천후를 그윽하게 쳐다보고는 미소로 대답했다.
[알았어요. 조심하는 거, 잊지 말아요.]
[당신들 때문에라도 조심해야겠지.]
마지막 전음은 영호수란에게도 전해졌다.
슬쩍 얼굴이 붉어진 영호수란이 혀를 쏙 내밀어 보이고는 독고혜의 손을 잡고는 뒤로 물러섰다.
* * *
꽈르르르…….
대지가 울렸다.
빠르게 정도맹의 본대와 합류하기 위해 이동하던 모든 이들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우…… 저게 인간의 힘으로 가능한 건가.”
“엄청나다.”
뇌전이 몰아치듯 번쩍이는 빛들로 난무하는 전장을 바라보며 젊은 무사들은 가빠지는 숨을 억눌렀다. 지금 저곳엔 자신들이 꿈꾸는 경지를 밟은 초인들이 즐비했다.
당대 최강자 일존 혁련강에다 결코 그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 어쩌면 무사들의 가장 큰 추앙을 받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신마성주 혁련천후가 있다.
그리고 마도의 대종사 뇌어양과 그를 추종하는 마도 최강자들이 지금 자신들을 대신하여 적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진천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후후! 놈들이 완전히 얼이 나갔습니다.”
“그럴 만도 하지, 당대를 주름잡는 분들을 한꺼번에 보았으니 정신이 하나도 없을 거다.”
“만만한 놈들이 아닌데, 상대를 잘못 만나는 바람에 맥을 못 추는군요.”
“지금껏 버티는 것도 용한 거지.”
그때 악승이 다가왔다.
전장에 끼어들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던 그는 험악한 표정으로 모두에게 소리쳤다.
“무슨 경극 관람하러들 왔냐! 빨리빨리 움직여!”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모두가 깜짝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한 손에 대도를 들고 고리눈을 한 악승, 모두는 그가 조금 전 묵련의 부대와 전투를 벌일 때 보여 주었던 용맹을 떠올렸다.
덕분에 자신들의 피해를 줄일 수 있었으니 소속이 달랐지만 하대로 말한 것에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영호수란의 음성이 뒤를 이었다.
“신임 맹주께 얼른 인사드려야 하지 않나요? 서두르세요.”
진승이 재빨리 뛰어왔다.
“저희들이 호위를 맡겠습니다!”
진호가 혀를 끌끌 차며 퉁명스럽게 말을 꺼낸다.
“야, 인마! 호위는 우리야. 이게 어디서 자리를 넘봐.”
“고생하셨는데, 좀 쉬시죠? 사형!”
“됐거든?”
독고혜의 얼굴에 포근한 미소가 떠오른다.
“서둘러요. 신임 맹주께 합류하겠다고 전서를 보냈으니 지금쯤이면 벌써 다 와 가실 거예요.”
“청룡단은 두 분을 호위한다!”
진승이 고함을 지르자 진호의 눈썹이 하늘로 올라간다.
그러나 진승은 그의 험악한 시선을 외면하고는 재빨리 앞으로 뛰어나갔다.
소천왕 곽범이 진유와 함께 다가왔다.
화산의 제자들을 바라보는 곽범의 시선이 꽤나 감탄에 차 있었다. 그는 조금 전 전투 중에 보았던 이들의 움직임을 결코 잊지 않고 있었다.
영웅대회에서의 선전에 당시, 그는 제법 놀랐었다. 하지만 그때와는 비교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이들은 성장해 있었다.
게다가 그들과 함께하고 있는 모용세가의 대공자 역시 자신조차도 감당할 자신이 선뜻 나지 않을 정도로 고수의 냄새를 물씬 풍겨 내고 있었다.
‘신마성의 보호 때문인가? 이 정도면 소림을 잡을 날도 머지않았어. 놀랍군, 놀라워…….’
더 이상 천대받던 화산이 아니었다.
당장 이들 다섯에 씩씩하게 앞을 걸어가는 청룡단주 진승만 하더라도 어지간한 구파의 장로들과 막상막하의 수준으로 보였다.
게다가 아직 드러나지 않은 미지의 전력까지 감안하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소림의 자리를 위협할 정도로 성장했다고 봐야 했다.
더욱이 신마성이 그들을 보호하고 있었으니…….
곽범이 진유를 돌아보며 그의 어깨를 툭 쳐 주었다.
“자네 꿈이 이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군. 축하하네.”
“하하! 그런가?”
“부럽기도 하고 시샘도 난다네. 천하를 울리는 분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화산이라니…… 솔직히 시샘이 더 난다고 봐야겠지?”
“솔직히 그 부분은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네. 저분들이 아니었으면 우리 화산은…… 하하! 그만하지. 난 두 분께 그만 가 봐야겠네.”
진유가 곽범의 어깨를 슬쩍 만져 주고는 빠른 걸음으로 앞을 걸어가는 독고혜와 영호수란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가 가자 진호를 비롯한 화산의 제자들이 슬쩍 자리를 비켜 주었다.
호위의 책임은 진유가 도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곽범이 심호흡을 크게 했다.
“후!”
그러고는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모두 속보로 이동한다!”
* * *
동소는 자신의 절기를 극성으로 펼쳐 냈다.
하지만 기운의 범위는 자신의 육신을 보호하는 데 그쳤다. 그가 수비에만 급급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신이 마주한 상대가 혁련강이었기 때문이다.
번쩍!
혁련강의 검이 살벌한 기운으로 번득였다.
도저히 피할 수 있는 속도가 아니었다. 검으로 막아 낼 정도는 간신히 되었다.
그러나 부딪히면 속이 뒤틀릴 정도로 강력한 충격을 받아야만 했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뜨거운 액체를 쏟아낼 겨를조차 동소에겐 없었다. 이건 강해도 너무 강했다.
꽝!
“우욱!”
기어코 동소가 피를 쏟아 내며 주르륵 뒤로 물러섰다. 발목까지 땅속에 들어간 그는 황급히 몸을 빼내 더 뒤쪽으로 물러난 다음에야 혁련강을 바로 볼 수 있었다.
“빌어먹을…….”
입가에 묻은 피를 손으로 닦을 생각조차 못하고서 다가오는 혁련강을 직시했다.
옆에서 피를 뿌리며 죽어 가는 수하들의 처절한 비명이 동소의 귓속을 울렸으나 그는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혁련강의 고요한 눈동자가 동소를 똑바로 향했다.
“자폭이라도 할 셈이더냐?”
“……!”
“그대 정도면 더 이상의 싸움은 무의미함을 알 텐데…….”
“후후! 그 말은 나더러 스스로 자진을 하라는 소리냐?”
“무사답게 죽을 기회를 보전해 주겠다. 검을 깨우친 자에 대한 예우라고 해 두지.”
동소의 얼굴 근육이 심하게 뒤틀렸다.
순간적으로 그 말에 유혹을 느낀 자신이 무척이나 생소했다.
“후후! 무사다운 죽음이라…… 잊고 있었군. 나도 무사라는 것을…….”
“악당이 되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만, 그대가 죽는 것엔 변함이 없다.”
동소의 흔들리던 눈동자가 어느 순간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러더니 서서히 붉게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것을 놓칠 혁련강이 아니었다.
[모두들 자폭에 대비하라!]
전음으로 모두에게 위험을 알린 그는 동소의 움직임을 면밀히 주시했다.
그때 뒤쪽에서 강력한 폭발이 일어났다.
쾅!
혁련강과 동소의 육신이 강력한 후폭풍에 휘말려 휘청거렸다.
혁련강의 고개가 급히 뒤로 돌아갔다. 주변이 뿌연 피안개로 자욱했다.
“이런 빌어먹을 새끼들! 쿨럭! 쿨럭!”
장용백이 가슴을 움켜쥐며 비틀거리는 모습이 눈에 잡혔다.
갈기갈기 찢어진 장포 사이로 선혈이 빗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폭발의 범위에서 완벽하게 몸을 피하지 못한 그는 전투가 불가할 정도의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그를 향해 구검마의 하나가 득달처럼 달려들었다. 대도를 손에서 놓아버린 장용백은 그것조차 느끼지 못한 듯,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대고는 선혈을 게워 냈다.
“감히!”
차가운 일성이 터지며 시커먼 그림자가 장용백의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꽝!
“우욱!”
구검마의 하나가 용수철이 튕기듯 빠르게 뒤쪽으로 날아갔다. 간신히 쓰러지는 것을 견뎌 낸 그는 자신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을 쳐다보았다.
흑발을 휘날리며 오연하게 서 있던 혁련천후가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는데, 그 속도가 그야말로 빛처럼 빨랐다.
순식간에 그의 얼굴이 크게 확대되더니 목에서 화끈한 통증이 생겨났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이었다.
“진천! 장 전주를 보호해라!”
진천이 싸우던 상대에게 장력을 퍼붓고는 장용백의 곁으로 뛰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