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1
<귀환무사 211화>
“겸사겸사…….”
흑야는 찻잔을 입으러 가져갔다.
나백도 찻잔을 입으러 가져가며 묘한 빛으로 흑야를 흘긋거렸다.
찻잔을 내려놓은 흑야가 특유의 차가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전해 줄 말이 있어서 왔소. 꽤 중요한 일이라 다른 자들은 물렸으면 합니다만…….”
나백의 눈에 순간 감탄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역시 천하의 살왕답소. 지금껏 그 누구도 느끼지 못했던 아이들이라오.”
“……!”
“허허! 너희들은 그만 물럿거라.”
스스슥!
나백의 말이 떨어지자 전신을 흑포로 감싼 인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과 흑야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눈동자만을 내놓은 그들은 나백의 눈짓을 받고는 이내 밖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꽤 거슬리는 복장이군…….”
흑야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나백의 눈동자에 다시 이채가 발했다. 잠시 뚫어져라 흑야를 응시한 그가 다시 물었다.
“이젠 말씀해 보시오. 전할 것이 무엇인지…….”
흑야는 찻잔을 다시 입으로 가져갔다.
식은 차를 비운 그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얼마 전에 성으로 한 인물이 찾아왔소.”
“……!”
“꽤 거물이었소. 육승이라던가? 정도맹의 첩보를 관할하던 비영전의 전주라고 스스로 말했소.”
순간 나백의 눈동자가 섬광을 발했다.
미세하게 탁자 위의 찻잔이 흔들리는 것을 흑야는 놓치지 않았다.
“육 전주가 살아 있었단 말이오?”
“지금 주공과 함께 있소.”
흑야의 눈동자에 찬 기운이 감돌았다.
살인 직전에 나타나는 그만의 습관이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냉정함이 흔들린 나백은 그걸 보지 못했다.
“꽤 놀라운 말을 그에게 들었소. 물론 맹주께서도 알고 계시리라 믿소.”
“놀라운 말이라면……?”
“배신자가 누군지 알려 주더군.”
흑야의 말투가 바뀌었다.
나백의 눈동자에 살기가 감돌았다. 이미 상황은 더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되었다.
그는 흑야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싸늘하게 물었다.
“후후! 그래서, 나를 죽이러 왔다?”
“물론이지.”
“나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나? 여긴 정도맹의 본진이고 아직도 사람들은 나를 맹주로 굳게 믿고 있다. 뒷말을 하지 않아도 알 터인데?”
흑야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나백도 역시 몸을 일으켰다.
“알려 주지. 내가 이곳에 온 것을 아는 사람들은 너를 호위하던 묵련의 졸개들뿐이지. 당연히 사람들은 묵련이 보낸 살수에 의해 네가 죽은 것으로 생각하겠지.”
순간, 나백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그럼, 관승이…… 그랬군. 어쩐지 놈이 직접 차를 가져온다 싶었지. 후후! 이거 제대로 당했군.”
“곱게 죽어라. 나백…… 아니지, 천왕이라는 놈의 제자라고 불러야겠지?”
스르릉!
흑야가 검을 빼 들었다.
“살수 주제에 정공으로 본인을 감당할 수 있다고 여기느냐?”
“이 정도 거리를 내주고도 그런 말을 하다니, 어리석군.”
흠칫!
서걱!
흠칫하는 나백의 가슴에 시뻘건 줄이 가늘게 그어졌다. 나백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소리도 없었다. 코앞이건만 움직이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심장 어름에서 화끈한 통증이 솟아났다.
“이, 이……!”
주르륵!
가늘었던 혈선이 점점 굵어지며 진득한 피를 흘려 냈다. 나백의 눈동자가 군막 밖으로 돌아갔다.
군막을 가렸던 천이 젖혀지며 한 인물이 들어섰다.
“먼저 떠났네. 자네의 호위들은…….”
남궁기였다.
그 뒤로 관승이 들어섰다.
창백해진 나백의 얼굴이 심하게 뒤틀렸다.
무릎이 꿇어지며 이어서 두 손이 바닥을 짚었다. 관승의 대도가 번쩍 빛을 발하며 떨어졌다.
툭! 떼구르르…….
나백의 수급이 바닥을 굴렀다.
눈을 감지 못하고 죽은 그를 남궁기와 관승은 착잡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관승이 대도를 집어 던지고 의자에 앉더니 머리를 감쌌다.
“진정하거라.”
남궁기가 그런 관승의 어깨를 어루만져 주었다.
흑야가 몸을 돌렸다.
“가시려오?”
남궁기가 물었다.
“전장에서 뵙겠습니다.”
“허허! 곧 달려가겠다고 성주께 전해 주시오.”
흑야가 돌아서려 할 때였다.
쾅!
문이 강하게 열리며 나웅이 들어섰다.
그는 바닥을 구르는 조부의 수급을 발견하고는 두 눈을 부릅떴다.
“조부님!”
남궁기를 비롯한 모두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어렸다. 나웅이 부르짖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네 조부는 정파를 배신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남궁기의 말에 나웅은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조부가 왜 정파를 배신한단 말인가.
챙!
나웅은 검을 뽑았다.
“닥쳐! 감히 무림맹의 맹주를 암살하다니! 당신들이야말로 적과 한 패였구나!”
“아이야, 차후 모든 것이 명명백백 밝혀질 것이니 냉큼 검을 거두어라.”
조부의 죽음으로 이성을 잃어버린 나웅의 귀에 남궁기의 그와 같은 말은 조금도 흘러들지 못했다.
“으아아!”
나웅이 괴성을 지르며 남궁기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때 흑야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번쩍!
“컥!”
나웅이 피를 뿌리며 앞으로 꼬꾸라졌다.
흑야의 검이 그의 목에 닿았다.
“네 조부는 양의 탈을 쓴 늑대 같은 자였다. 한 번만 더 설치면 네놈도 죽여 줄 것이다, 꼬마.”
나웅은 피를 흘리며 절규했다.
“진정 조부께서 배신을 하셨단 말입니까!”
남궁기는 짙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단다. 아이야.”
“으아아!”
나웅이 고개를 젖혀 괴성을 질러 댔다.
그러더니 돌연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내리쳤다.
퍽!
맥없이 꼬꾸라진 나웅이 그대로 축 늘어졌다.
스스로 정파의 지도자를 꿈꿨던 나웅. 검후 독고혜를 잊지 못해 나날이 힘들어하던 그 나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업보로다, 업보…….”
남궁기가 탄식을 쏟아 내었다.
잠시 나웅을 내려다보던 흑야는 바람처럼 어디론가 사라졌다.
휘이잉!
열린 창을 통해 유난히 찬 바람이 들이쳤다.
* * *
정도맹이 발칵 뒤집혔다.
맹주 나백의 시신이 자신의 거처에서 발견되었다. 또한 대공자 나웅과 암영밀위라 불리던 자들의 시신 역시 나백의 군막 주변에서 싸늘하게 식은 채 발견되었다.
역사상, 정도맹의 맹주가 암살을 당한 예는 없었다. 더구나 전쟁 중에 벌어진 일이라 놀람은 극에 달했고 혼란은 필연이었다.
사천왕의 일인인 남궁기가 임시 맹주로 위임되어 사태수습에 나섰으나 일부, 극렬 반대 세력 때문에 상황은 복잡하게 돌아갔는데, 남궁기는 그것에 굴하지 않고 기존 수뇌부를 그대로 승계한 후,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전면전을 바꾸어 국지전으로 전환한다.”
첫 번째 그가 내세운 방침은 그것이었다.
“신마성과의 협력을 최우선으로 한다.”
그것이 두 번째였으며 세 번째는 반대하는 세력은 스스로 맹의 연합에서 빠져도 좋다는 게 그것이었다.
세 번째 안은 혼란을 가져왔다.
전쟁을 코앞에 두고 맹의 전력 약화를 초래할 그것에 상당수 문파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나섰으나 남궁기는 단호하게 뜻을 관철시켰다.
총호법 관승과 수석 장로 적용세, 그리고 그 누구보다 영향력이 큰 오성의 신기수사가 남궁기를 절대적으로 지지했다.
가장 강력한 반대 세력의 하나였던 하북팽가와 단리세가의 불만은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그들은 선뜻 연합에서 빠지지는 못했다.
전쟁 중에 연합에서 빠진다면 천하인들의 질타를 받을 게 분명했으며 그것은 곧, 향후 오대세가의 재편을 불러올 가능성이 높았기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남궁기의 정책을 수락해야만 했다.
어느 정도 수습이 되자 남궁기는 맹주 암살의 배후를 묵련으로 몰아가며 맹의 단합에 주력했다.
반대했던 세력들조차도 그 부분에는 흔쾌히 동의했다.
새롭게 수립된 전략과 전술로 무장한 정도맹은 부대를 팔로로 나누어 곧장 묵련의 본단을 향해 진군하기에 이르렀는데…….
* * *
챙!
“우악!”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전장의 참혹함은 독고혜의 아름다운 얼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녀도 손에 쥔 검에 적의 선혈을 잔뜩 묻히고 있었다.
“언니! 놈들이 또 몰려와요!”
영호수란이 숲을 가리키며 아미를 곱게 찌푸렸다.
독고혜의 눈동자가 숲의 건너편으로 던져졌다.
상당수의 인물들이 빠르게 전장으로 질주해 들어오는 모습이 그녀의 눈에 잡혔다.
“상당한 고수들이야. 조심하는 것이 좋겠어.”
한 번 도약에 이십 장을 날아온다.
그 정도면 오왕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봐야 했다.
그녀는 빠르게 전장을 살폈다. 최초, 보급 부대를 노렸던 적들은 이미 몰살을 당한 후였지만 그들이 쏘아 보낸 신호탄을 보고 몰려온 지원 부대와 전투를 벌이는 중이다.
“영호세가의 무서움을 보여 주마!”
“백리세가도 제법 무섭다!”
“하하! 남궁세가는 어떻고!”
영호세가의 대공자, 영호진의 몸놀림은 단연 발군이었다.
십전무제의 진신 비기를 고스란히 탑재한 그는 적들 중 강한 자들만 골라서 상대하고 있었는데. 그 옆을 백리추와 남궁세가의 대공자 남궁호재가 받치고 있었다.
전황은 이미 신마성으로 기운 지 오래다.
그러나 묵련의 고수들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죽음을 각오한 그들의 맹렬함 때문에 지금껏 전투는 이어지고 있었다.
“꽤 강한 자들이 몰려오는군.”
“그렇군요. 이제 슬슬 나서야 할 것 같습니다.”
“허허! 밥값을 하러 가 볼까요?”
아직 혁련강과 영호도성, 그리고 뇌어양과 천마사로는 전장에 끼어들지 않고 있었다.
마치 또 다른 지원 부대가 오는 것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그들은 새롭게 모습을 드러내는 자들을 향하여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각별히 조심해라! 꽤 거친 자들로 보이는구나.]
혁련강의 전음이 그녀의 귀속으로 파고들었다.
미소로 응답한 그녀는 눈빛을 발하며 다가오는 적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와 영호수란의 옆에는 진호를 비롯한 화산의 제자들과 모용단승이 검을 뽑아 들고 호위를 서고 있었다.
왕전의 특별한 지시 때문이다.
‘그분들이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네놈들은 죽은 목숨이다.’
길을 떠날 때, 왕전의 험악한 인상을 떠올린 그들은 눈빛을 발하며 적들이 접근하는 것을 경계했다.
“멈추어라!”
쩌렁쩌렁한 호통 소리가 장내를 울림과 동시에 묵련의 고수들이 썰물이 밀려나듯 뒤로 물러섰다.
그들 앞으로 스물에 달하는 자들이 허공에서 떨어져 내렸다.
모두가 새롭게 나타난 자들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동소의 섬뜩한 시선이 전장을 쓸어 보았다.
처참하게 죽어 있는 수하들의 시신을 보던 동소의 얼굴 근육이 심하게 뒤틀렸다.
자연스럽게 동소의 시선은 눈앞의 신마성에게로 향해졌다.
혁련강이 가장 먼저 동소의 시선 안으로 들어왔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동소는 문득 망망대해에서 작은 편주 위에 자신이 올라선 듯한 느낌을 받았다.
주체할 수 없는 전율이 솟아났다.
‘이자…… 누군가? 도대체 이런 기운은 무엇이란 말인가?’
동소는 자신의 주인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비교, 동소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막상막하란 이럴 때 생겨난 말이라고 그는 여겼다.
“싸우겠는가?”
혁련강이 물었다.
동소는 대답하지 못했다. 주변을 늘어선 동소의 형제, 구검마들이 발끈하며 검을 뽑아 든다.
그것만으로 동소가 가장 강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강자는 강자를 알아보는 법이다.
그러나 동소를 제외한 다른 구검마들은 혁련강의 진실한 수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동소가 입을 열었다.
“싸우지 않겠다면 물러나는 것을 허락하겠소?”
“물론 안 되겠지…….”
“닥쳐라! 건방진 놈!”
구검마의 다섯째, 유충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