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7
<귀환무사 207화>
관승의 얼굴에 짜증이 묻어났다.
수뇌부에 대한 불만의 표시였다. 관승이 짜증스러운 몸짓으로 몸을 돌리자 진가경을 제외한 모두가 그의 뒤를 따랐다.
동료들이 완전히 숲을 빠져나가자 진가경은 재빨리 구겨진 채, 버려진 전서를 집어 들었다.
[제일부대 전멸, 제팔부대 전장 이탈. 질풍대 심각한 피해. 모든 부대는 적의 기습을 경계하며 본대로 귀환할 것을 명한다. 이 전서를 받은 부대는 인근의 다른 부대에게 연락 요망!]
“일부대라면 무당과 곤륜의 고수들인데, 그들이 전멸을 당했다니…….”
진가경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무당과 곤륜은 알아주는 강자들이 즐비한 곳이다. 그런 문파가 주축이 된 부대가 전멸을 당했다니…….
진가경은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새삼 전쟁의 무서움이 피부로 느껴졌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도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주변을 살폈다.
스르륵!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들이 내는 소리조차도 진가경에겐 섬뜩함으로 다가왔다.
그때 좌측 숲에서 시커먼 그림자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후후! 쥐새끼들처럼 빨리도 사라졌군.”
“누, 누구냐!”
대경한 진가경이 대도를 겨누며 소리쳤다.
“이놈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군.”
털썩!
“헉!”
바닥을 구르는 수급들, 조금 전 척후를 나갔던 고수들의 것이 분명하자 진가경은 두 눈을 부릅떴다. 백발을 길게 늘어뜨린 인물이 느릿하게 진가경을 향해 다가왔다.
전신에서 느껴지는 칙칙한 죽음의 기운은 진가경의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들었다.
“아깝군. 관승, 놈의 목을 자르려고 왔는데 말이야. 아쉽지만 네놈의 목으로 손맛을 즐겨 보지.”
다가오는 인물의 얼굴을 본 진가경이 흠칫했다.
섬뜩함으로 번득이는 인물의 눈동자는 시커먼 색이 전혀 보이지 않는 백안이었다.
그는 의지와는 상관없이 떠오르는 한 인물 때문에 몸을 떨었다.
“설마, 백안검귀…….”
“후후! 노부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다니, 그것으로 네놈이 살아날 확률은 전무해졌다.”
상대가 움직였다.
백안검귀라는 섬뜩한 별호를 지닌 그는 진가경이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지옥문이 열렸다. 애송이들아, 흐흐흐!”
* * *
질풍대주 관포는 하나둘 모여드는 부대들을 응시하며 거친 어조로 말을 쏟아 냈다.
“오란다고 오는 작자들이나, 한 번 당했다고 철수시키는 작자들이나…… 빌어먹을!”
“대주!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이까짓 상처쯤이야 별것 아니다. 그나저나 신마성에 관한 정보는 어찌 되었다더냐?”
“아직, 아무런 정보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관포가 잔뜩 인상을 그렸다.
“그러게 왜 쓸데없는 짓거리들을 해 가지고서는…… 하여튼, 뭐 하나 제대로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군.”
수뇌부에 대한 불만이 누구보다 강한 관포였다.
관포의 시선이 다시 회군하는 부대들을 향해 던져졌다. 마지막으로 관승이 이끄는 부대가 본진의 정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관포가 몸을 일으켜 그곳으로 다가갔다.
관승은 자신의 친형이다.
멀리서 보니 형의 얼굴도 자신처럼 불만으로 가득했다. 당연히 그 속내가 어떠한지 짐작했다.
다가오는 관포가 부상을 입은 듯 보이자 관승이 눈빛을 발하며 물었다.
“다쳤느냐?”
“다치긴요, 그냥 슬쩍 긁혔습니다. 그런데 몇이 보이지 않습니다.”
“척후를 보냈다. 곧 돌아오겠지. 그건 그렇고 신마성에 대한 소식은 좀 있더냐?”
“감감합니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관포에게 관승은 어깨를 툭 쳐 주고는 그를 지나쳐 수뇌부들의 군막으로 걸음을 놓았다.
“거긴 왜 가십니까? 성질만 날 텐데…….”
“쓸데없는 불평일랑 집어치우고 얼른 가서 치료나 받아! 곧 다시 출전할 수도 있으니까.”
관포는 씁쓸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부상자들을 위해 마련된 거대한 천막은 상당한 사람들이 신음을 흘리며 누워 있었다.
순간 관포의 얼굴이 구겨졌다.
“젠장!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이렇듯 피해를 입다니…….”
자신의 질풍대도 열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그나마 적용백이 위기의 순간에 도와줬기 때문에 그 정도였다.
부상자들의 면면을 보니 구파의 소속들이 대부분이었다. 오대세가의 인물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빌어먹을 인간들! 정작 중요한 시기에선 몸을 사리기 바쁘니…… 젠장! 퉤!”
가래침을 뱉은 관포는 부상자들의 치료에 여념이 없는 의료진을 찾았다.
평소 안면이 있던 의원에게 자신의 팔을 내밀던 관포가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어! 명보진인이 아닌가?”
그랬다.
몰살을 당했다고 전해진 무당의 고수들, 넷이 정문으로 들어서고 있었는데, 곤륜의 장로도 함께하고 있었다.
주변이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그들에게로 몰려갔다.
“무사하셨군요, 진인!”
관포가 진심 어린 걱정을 나타내자 명보진인은 씁쓸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관포가 다시 물었다.
“놈들의 주력과 부딪힌 겁니까?”
명보진인이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곤륜의 장로가 대신 대답했다.
“신마성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도 지금쯤 고혼이 되었을 것이네.”
“예! 신마성이 도왔단 말씀입니까?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다네.”
관포가 다급히 다시 물었다.
“이곳으로 오고 있답니까?”
“아니네, 그들은 따로 움직인다고 하였네. 말이 많은 이곳에 올 이유가 없지.”
대답하는 곤륜의 장로는 무척 힘이 빠진 기색이 역력했다.
실례를 깨달은 관포가 황급히 수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장로님들을 서둘러 군막으로 모셔라!”
“아니네, 그냥 거처로 돌아가 쉬고 싶네. 신경 쓰지 마시게.”
곤륜의 장로는 힘 빠진 모습으로 곤륜이라 적힌 군막으로 걸음을 놓았다.
모두 죽음을 당한 곤륜이기에 군막엔 그저 수발을 들 목적으로 따라온 하급 무사 몇이 있을 뿐이었다. 안타까움으로 고개를 저은 관포가 명보진인을 향해 가볍게 머리를 조아렸다.
“진인께서도 그만 쉬시지요.”
“수뇌부들은 어디 있는가?”
“지금쯤 중앙 군막에 모여들 계시겠지요.”
대번에 관포의 어조가 심드렁하게 바뀌자 속내를 짐작한 명보진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관포의 어깨를 슬쩍 어루만져 준 그는 다른 장로들과 함께 본진의 중앙으로 걸음을 놓았다.
그들을 바라보는 관포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드디어 움직였군. 진유, 놈도 함께 왔겠지?”
그는 막역지우인 매화무적 진유를 떠올렸다.
신마성이 왔다면 화산도 왔을 것이다.
심드렁했던 관포의 얼굴이 다소 밝게 퍼졌다. 그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 중, 일부를 제외한 상당수가 그와 같은 표정을 보였다.
* * *
혁련천후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활한 혈야평을 바라보며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혁련강이 다가오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저곳이군. 저곳 때문에 전면전을 택한 모양이야. 어리석은…….”
“어리석은 게 아닙니다. 의도한 바로 움직이는 것이지요.”
“그렇구나, 놈의 정체를 깜박했구나.”
뇌어양이 다가왔다.
그 옆에 평범한 용모를 지닌 중년인이 함께하고 있었는데, 얼굴 모습을 바꾼 육승이었다.
“매복을 하기가 딱 좋은 곳이오. 더욱이 평야가 끝나면 산악지대가 곧장 이어지니 더더욱 놈들의 입장에선 이곳에서 상대하려고 들 것이오.”
“생각보다 놈들의 움직임이 수동적이군. 정도맹이 달려들기만을 기다리는 형국으로 보이는데, 뭔가 다른 뜻이라도 있다는 건가?”
“전혀 뜻밖입니다.”
육승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당초 그들이 전쟁 양상을 전면전으로 이끌려 했던 것은 국지전이 벌어졌을 경우, 끝을 짐작하기 힘든 중원의 저력을 두려워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그들이 예상 밖으로 느린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정도맹의 정보망이 붕괴된 것 때문인 듯합니다.”
혁련강이 이채를 발하며 육승을 응시했다.
“조금 더 쉽게 말해 보게.”
“지금 정도맹은 묵련에 대한 정보를 캐낼 정보망이 사라졌습니다. 반대로 묵련은 정도맹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유리한 입장에 놓였습니다. 국지전은 정보력과 속도가 승패를 좌우합니다. 당연히 정도맹의 움직임은 모조리 묵련에게 보고될 것이니 승패는 불을 보듯 훤하지 않겠습니까?”
혁련천후를 비롯한 모두가 육승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혁련천후가 육승에게 물었다.
“정도맹의 전략, 전술이 바뀔 것이라 보시오?”
“놈은 분명 그렇게 할 것입니다. 전면전을 고집하면 맹 내에서 상당한 반대에 부딪히겠지요. 하지만 비영전의 붕괴로 묵련이 여유가 생겼으니 분명 국지전으로 수정할 게 분명합니다. 당장은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이득이니 가급적, 수뇌부의 비위를 거스르는 행동은 자제하려고 들 것입니다.”
그자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모두는 알고 있었다.
육승이 분한 표정을 지으며 울분을 삭였다.
“정말, 너무나도 어이없게 완벽하게 속았습니다!”
“허허! 최후에 이기는 자가 진정한 승자가 아니겠는가? 그러니 그만 마음을 다스리게.”
혁련강이 좋은 말로 육승을 달랬다.
혁련천후가 눈을 가늘게 하고서 혈야평의 너머를 응시했다.
광활한 그곳 너머에 우뚝 솟아 있는 산의 정상에 묵련의 본단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흑야!”
부름에 흑야가 빠르게 다가왔다.
“놈을 제거해라.”
“정도맹의 그놈 말입니까?”
“꽤 힘들 수도 있다.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그대로 물러나라.”
육승이 다가오며 얼굴을 굳혔다.
“놈의 주변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고수들이 철벽경호를 하고 있습니다. 혼자로는 너무나 위험합니다.”
흑야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그는 혁련천후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다음 육승을 향해 차갑게 웃어 주었다.
“다녀오겠습니다.”
흑야가 정도맹으로 떠났다. 혁련천후는 이어서 조윤을 불렀다.
혁련강이 다가오며 물었다.
“놈들을 흔들 생각이더냐?”
“정보도 얻을 겸, 겸사겸사 다녀오겠습니다. 그동안 이곳에서 쉬고 계십시오.”
오왕과 진천, 사공진무가 다가왔다.
당연히 검후와 영호수란도 혁련천후의 곁으로 다가왔다.
혁련천후의 시선이 그녀들에게로 향했다.
“이곳에서 조부님과 함께 기다려. 그리고 진무는 이곳에 있어. 어쩌면 이곳으로 적의 대부대가 들이닥칠 수도 있으니 그때 너의 능력이 필요할 것이다.”
사공진무가 머리를 긁적이며 뒤로 물러섰다.
“저도…….”
뭔가 말을 하려는 영호수란을 독고혜가 눈빛으로 말렸다.
그러고는 환하게 웃으며 혁련천후를 바라보았다.
“다녀오세요.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마세요.”
그 누구보다 함께하고픈 그녀가 그렇게 나오자 다른 이들은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절대 조부님의 곁에서 떠나지 마라.”
“그럴게요.”
옅은 미소로 화답한 혁련천후는 혁련강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후, 이내 혈야평으로 뛰어들었다.
* * *
“정도맹, 질풍대의 무사들입니다.”
이동하던 일행들은 곳곳에 쓰러져 있는 시신들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조윤이 허리를 숙여 죽은 자들을 살폈다.
“쾌검에 당했습니다.”
시신을 살펴본 조윤이 눈빛을 발했다.
죽은 자들의 상처 부위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만약 음한공에 당했다면 상처 부위가 얼었을 테지만 전혀 그런 흔적은 없었다.
왕전이 발로 죽은 자를 뒤집었다.
가슴에서 어깨 뒤까지 일 검에 긋고 지나간 듯, 상처는 매끈했으며 반쯤 떨어진 채 너덜거렸다.
그럼에도 피를 흘린 흔적은 결코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면 부상막의 최정예들보다 빠르고 강한 놈이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미간을 찌푸리는 왕전에게 혁련천후가 물었다.
“살수의 수법이냐?”
“아닙니다, 살수라면 이렇듯 필요 없는 상처 따윈 만들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