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5
<귀환무사 205화>
* * *
짙은 안개가 대지를 두르자 시야는 전방 오 장으로 좁혀졌다.
제아무리 천하고수라도 십 장 이상을 본다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자욱한 안개는 바람이 불어도 걷히지 않았다.
철그럭!
선봉에 선 질풍대원들의 눈빛이 형형한 안광으로 번득였다.
휘이잉!
늦겨울을 재촉하는 찬바람이 불어와 그들의 얼굴을 쓸고 지나갔지만 그들의 입에선 뜨거운 입김이 뿜어졌다.
대도를 뽑아 들고 선두에서 이동하던 질풍대주 관포가 손을 들어 모두를 세웠다.
스슥!
뒤쪽에서 부대주 둘이 소리 없이 관포의 옆으로 다가왔다.
관포의 손가락이 좌우를 가리키자 둘은 안개 속으로 스며들며 모습을 감추었다.
안개 사이로 거대한 바위가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바위 가운데를 가르고 새겨진 글씨를 보는 순간, 관포의 얼굴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혈야평!
피의 대지라 불리는 죽음의 공간이 저 바위를 넘어가면 시작되는 것이다.
관포가 다시 오른팔을 들어 올려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다른 대원이 곁으로 다가왔다.
“수뇌부에 전해라. 혈야평이 시작되었다고…….”
눈빛으로 대답한 대원이 빠르게 이동한 반대편으로 몸을 날려 사라졌다.
동시에 안개 속으로 사라졌던 부대주들이 돌아왔다.
“매복은?”
“반경 오백 장 이내에만 백 명에 육박합니다.”
관포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혈야평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곳이다.
고작 오백 장 이내가 그 정도라면 그 넓은 평원에 매복한 적의 수효가 어느 정도인지 능히 짐작되었다.
관포가 눈빛을 발했다.
“이곳에서 기다려라! 내가 직접 살펴보고 오겠다.”
“조심하십시오! 대주!”
관포의 육신이 빠르게 안개 속으로 스며들었다. 잠시 후, 관포가 돌아왔다.
굳은 그의 얼굴을 쳐다본 질풍대원들의 얼굴도 경직되어갔다.
“젠장! 일단 본대로 돌아간다!”
관포가 뒤로 물러날 것을 지시하자 질풍대원 모두는 빠르게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마지막으로 관포가 바닥을 차고 오르려고 할 때였다.
“후후! 정도맹의 사냥개, 질풍대주 관포가 아닌가?”
안개 속에서 죽립을 내려쓴 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관포가 몸을 돌리며 대도를 뽑아 들었다.
이미 몸을 날렸던 질풍대원들도 적의 출현을 느끼고는 다시 관포의 옆으로 돌아왔다.
“묵련의 잡종들인가?”
“후후! 정도맹의 개들보단 혈통이 좋지.”
죽립인들에게선 여유가 느껴졌다. 천하에 그 용맹을 떨치는 질풍대원 전체를 보면서도 그들은 한 치의 긴장감조차 보이지 않았다.
“지금부터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지. 네놈들이 그 서막을 알리는 제물이 되는 영광을 누리겠군. 관포!”
“후후! 누가 제물이 될지는 두고 봐야지.”
관포가 흉맹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돌격전에서는 그 누구보다 용맹을 떨쳤던 그였다.
그만큼 담대한 담력을 지녔으며 그것을 뒷받침하는 파괴적인 무공 또한 갖춘 관포였다.
주변이 순식간에 싸늘한 기운으로 난무하기 시작했다.
탁!
채챙!
누군가의 발에 걸린 돌이 소음을 내며 구르는 것을 시작으로 양측은 서로를 향해 몸을 날렸다.
“쳐라!”
“모조리 핏물로 만들어 줘라!”
까가강!
* * *
백어산의 능선이 질퍽한 선혈들로 적셔졌다.
죽은 자들의 육신이 곳곳에서 끊임없이 핏물을 흘려 내며 주변을 지옥의 아수라장으로 변모시켰다.
퍽!
마지막으로 죽은 자의 등을 밟고 선 사내의 시선이 북쪽을 향해 던져졌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에 강렬함이 어렸다.
“시작이군.”
바람이 불어와 흑발을 쓸고 지나갔다.
얼굴을 덮은 검상들이 그의 지나온 삶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중원으로 돌아온 이후, 최초로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낸 혁련천후는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며 웃는 사람들…….
“신마성과 함께해 준 것에 감사드립니다. 보답은 놈들을 쓸어 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허허! 우리와 함께해 주시는 것에 감사드리오! 보답은 성주를 돕는 것으로 하겠소이다.”
뇌어양의 주름진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 차갑던 살로의 얼굴에도 희미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젊은 청년 무사들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영호세가와 백리세가, 그리고 남궁세가의 무사들은 끓어오르는 가슴을 억누르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전설에나 들어오던 정마대전보다 더한 전쟁에 자신들이 참전하는 것이다. 뜨거운 혈기는 그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흐흐! 죽을 준비들은 되었나!”
북궁천소가 무사들을 바라보며 광포한 미소를 지었다.
처처척!
무사들은 검을 들어 가슴에 붙였다. 그것은 신마성과 함께하겠다는 맹세였다.
휘이잉!
바람이 불어온다.
신마각주 악승이 든 거대한 깃발이 바람에 펄럭인다.
신마성!
강호의 역사를 새롭게 새겨 나갈 그 이름이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북쪽을 바라보며 말없이 섰던 혁련천후의 옆으로 여신을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여인들이 다가오며 양손을 살며시 잡는다.
“때가 되었구나.”
혁련강이 다가왔다.
장포를 벗어 버린 그는 태양에 반사되어 번쩍이는 붉은 철갑을 전신에 두르고 있었다.
혁련세가의 가주를 나타내는 상징과도 같은 그것은 그 옛날 천하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세 마두와의 승부 이후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내가 두르는 마지막 갑주이니라. 다음부터는 네가 이 자리를 지켜야 하느니.”
“그리하겠습니다.”
혁련강이 투구를 머리로 가져갔다.
천상의 신장이 이러할까. 검을 버리고 거대한 백색의 도를 어깨에 두른 그의 전신에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주변을 요동쳤다.
“악의 종자들을 섬멸하러 가 보자꾸나.”
* * *
퍽!
보이지 않는 칼날이 스치고 지나가자 질풍대원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대주 관포의 몸놀림은 성난 호랑이와도 같았다. 수하들의 죽음은 그를 피에 굶주린 악마로 변모시켰다.
“개새끼들!”
꽝!
막아섰던 죽립인의 육신이 쏘아진 화살처럼 튕겨 나가며 나무에 박혀들었다.
다른 대원들이 꿈틀거리는 죽립인의 몸을 그대로 썰어 냈다. 관포가 거칠게 고개를 돌려 전장을 돌아봤다. 합류한 정도맹의 고수들 역시 새롭게 합류한 적들을 맞아 난전을 벌이고 있었다.
“적용 노야를 도와라!”
관포가 고함을 질러 명령을 내리자 질풍대원들이 우측으로 빠져나갔다.
그곳엔 혼자서 여럿의 죽립인을 상대하는 중년인이 있었는데, 바로 신기수사 적용백이었다.
퍽! 퍽!
적용백의 주변에서 피보라가 일었다.
오성의 일인인 그가 살의를 담고 펼쳐 내는 수법은 가공할 만했다.
한 번 휘두름에 적의 수급이 그대로 떨어져 나갔다. 질풍대원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그를 둘러쌌던 적들은 모조리 바닥에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나는 되었으니 다른 이들을 도우시게!”
“예!”
부대주 사마염은 대원들을 이끌고 이내 옆의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적용백의 날카롭게 빛나는 눈동자가 전장을 천천히 쓸어 보았다. 전황은 아군에게 압도적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무겁게 굳어 있었다.
‘이런 식의 난전은 놈들의 자폭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흩어져서 각개전으로 나가야 한다!’
그의 염려는 결코 틀리지 않았다.
쾅!
“우악!”
좌측 전장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며 청성의 고수들이 피를 뿌리며 날아갔다.
적용백의 얼굴 근육이 심하게 뒤틀렸다. 오 장을 날아가 떨어진 청성의 고수들은 볼 것 없이 즉사였다. 다만 한번 당해본 수법이었기에 사망자가 둘이라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한곳에 뭉치지 마라! 흩어져라!”
적용백이 내공을 담아 소리쳤다.
정도맹의 고수들이 재빨리 산개하며 간격을 벌렸다. 하나같이 고수들만 차출되었기에 반응 속도는 대단했다.
쾅!
폭발이 이어졌다.
이번에도 몇이 피를 뿌리며 날아갔다.
하지만 결과는 전과 달랐다. 피를 뿌린 자들은 폭발을 일으킨 자의 옆에 있던 묵련의 동료들이었다.
“놈들이 도주한다! 쫓아서 섬멸하라!”
“모조리 죽여라!”
자폭이 통하지 않자 묵련의 고수들이 혈야평으로 뛰어들었다.
죽은 자들이 소속되었던 문파의 고수들이 이를 갈며 그들을 추격했다.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기는 풀숲이 광활하게 펼쳐졌다.
그 속으로 뛰어든 묵련의 고수들이 사방으로 산개하며 도주하자 뒤를 쫓던 일부 정도맹의 고수들도 각각의 방향으로 추격했다.
적용백의 눈이 급격히 치켜 올라갔다.
“추격을 멈추어라!”
“멈추시오!”
적용백의 외침을 들은 군웅들이 추격을 말리고자 소리쳤지만 복수심에 불타는 그들은 이내 혈야평의 숲 속으로 사라져 갔다.
안타까운 눈빛을 거둔 적용백이 주변을 돌아보며 물었다.
“다른 부대들은 어찌하고 있느냐?”
“곳곳에서 놈들과 산발적인 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사대천불이 계신 부대는 적의 주력과 마주쳤다고 합니다!”
“주력과 말이냐?”
“조금 전 위급 상황을 알리는 적색 신호탄이 그곳 상공에서 터졌습니다.”
적용백의 얼굴에 놀람이 떠올랐다.
사대천불은 오성에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는, 어쩌면 내공만큼은 더 강하다고도 볼 수 있는 절대 고수들이다.
그러한 사대천불이 이끄는 부대가 적색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면 그들보다 더한 강자가 출현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놈들이 초전부터 제대로 나올 속셈이구나!”
관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첫 집결지까지 이동하려면 속히 떠나셔야 합니다!”
“일단, 적들을 추격해간 사람들에게 지원군을 보내고 그들이 돌아오면 출발한다.”
“알겠습니다.”
빠르게 물러난 관포가 고수들 몇을 이끌고 혈야평으로 뛰어들었다.
적용백은 숲으로 사라져 가는 고수들을 바라보며 낯빛을 굳혔다.
왠지 모를 불길함이 엄습했다. 그는 고수들이 사라져 간 숲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역시 불길함은 적중했다.
숲이 크게 흔들리더니 요란한 쇳소리와 불꽃들이 사방으로 피어올랐다.
쾅!
바닥을 차고 오른 적용백의 육신이 혈야평의 숲 속으로 뛰어들었다.
* * *
구검마의 다섯째 조건은 얼굴 가득 비웃음을 품고 서서 정도맹의 고수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약 반 시진 전에 가장 후미를 이동하던 정도맹의 부대를 급습한 그는 몰살을 눈앞에 두고서 여유가 넘쳤다.
“후후! 무당과 곤륜이 고작 이 정도였나.”
그들이 급습한 부대는 무당과 곤륜의 고수들로 이루어진 부대였다.
맹공을 가하는 묵련의 고수들을 간신히 막아 내던 무당의 고수 하나가 단말마를 지르며 쓰러졌다.
“으악!”
“명기!”
명 자 돌림의 무당 장로가 쓰러지는 것으로 살아남은 자들은 고작 다섯에 불과했다. 그중 넷이 무당의 인물들이었고 곤륜은 하나뿐이었다.
주변을 압박하는 묵련의 수는 오십을 넘어갔다. 압도적인 상황에도 무당과 곤륜의 고수들은 용맹하게 그들과 맞섰다.
달려들던 묵련의 고수 몇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그것을 본 조건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지며 스스로 앞으로 나섰다.
“머저리 같은 놈들! 비켜라!”
그가 나서자 묵련의 고수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길을 터주었다. 검을 뽑아 든 조건의 전신에서 가공할 만한 기운이 줄기줄기 발산되었다.
“그냥 곱게 뒈지면 될 것을…….”
“닥쳐라! 묵련의 잡종아!”
“후후! 좋아, 그 기상만큼은 인정해 주지. 그 대가로 네놈들은 노부 혼자서 상대해 주마. 물론 나를 이기면 네놈들을 그대로 보내 주겠다.”
“오만방자하기가 하늘을 찌르는 놈이구나! 허튼소릴랑 집어치우고 어서 덤벼라!”
무당의 장로 하나가 고함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