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4
<귀환무사 204화>
* * *
폭풍의 중심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마성은 여전히 평화로웠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땀을 흘리는 무사들의 기합성으로 가득했고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도 밝았다.
새롭게 합류한 남궁세가와 백리세가의 고수들은 연무장을 뜨겁게 달구는 신마각의 무사들을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대단하군, 저 정도면 집단전 최강이라는 정도맹의 질풍대도 잡아먹겠어.”
“저기, 저 각주라는 자가 마교, 흑영대의 부대주였던 악승이라고 하더군. 소문처럼 엄청난 파괴력이야.”
“부대주가 저 정도면 마교 최강의 싸움꾼이라는 대주, 관산악은 도대체 어느 정도일까? 소문에 오왕과 친구라고 하던데, 실력도 그분들과 비슷하겠지?”
“당연하지! 천하의 오왕이 아무하고나 친구가 되겠나?”
정예들만 추려서 나온 그들이라 하나같이 고수 아닌 자가 없었지만 파괴적인 신마각의 수련 방식에 모두가 놀람과 경탄을 쏟아 냈다.
그들의 옆, 다소 떨어진 곳에 절색의 여인, 둘이 앉아 있었는데 남궁소미와 백리세가의 장녀 백리소소였다.
백리소소의 고운 아미에 살짝 주름이 생겨났다.
“놀라워, 소문보다 더욱 대단한 듯 보여. 그토록 짧은 시간에 이 정도라니…….”
“훗! 아직 이곳의 일 할도 못 보고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요.”
남궁소미의 그 같은 말에 백리소소의 커다란 눈망울이 더욱 커졌다.
“나중에 저절로 알게 돼요. 소소 언니! 우리, 저리로 가요.”
남궁소미는 백리소소의 팔을 이끌어 연무장의 건너편에 보이는 강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음이 얼어붙은 그곳은 한겨울의 정취가 그대로 묻어나는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둘은 연무장의 바깥을 걸어 강으로 걸었다.
신마각의 무사들이 그녀들을 보며 흘긋거리다가 악승에게 된통 꾸지람을 듣는다.
그 모습에 입을 가리고 웃음을 터트린 그녀들은 앞쪽에서 다가오는 사람들을 발견하고는 이내 걸음을 멈추었다.
“어디 가?”
백리관이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역시 웃음으로 맞이한 백리소소는 백리관의 뒤쪽에 선 사내를 보고는 의아한 빛을 보였다. 백리관이 재빨리 사내를 소개했다.
“인사드려, 누나! 살왕 흑야 님이셔.”
“어머!”
크게 놀란 백리소소가 자신도 모르게 놀란 소리를 냈다. 그녀를 응시하던 흑야의 얼굴이 다소 당황한 듯 보였다.
“백리소소가 살왕을 뵙습니다.”
흑야는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았다.
당황함을 재빨리 지워 낸 그는 예의 차가운 모습으로 그녀들을 지나쳐 걸었다.
그녀들에게 눈웃음을 날린 백리관이 재빨리 흑야를 따라붙었다. 그 자리에서 얼음처럼 굳어졌던 백리소소는 흑야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멋지죠?”
“응? 뭐가?”
“흑야 님 말이에요. 성주님과 가장 비슷한 분위기시잖아요.”
“성주님도 저렇게 생기셨어?”
백리소소는 혁련천후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남궁소미가 배시시 웃어 보이고는 그녀의 팔을 이끌었다.
“어서 강으로 가요.”
끌려가던 백리소소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흑야는 이미 어디론가 모습을 감추고 보이지 않았다. 순간 그녀의 눈동자에 아쉬움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 * *
스스슥!
바람에 흔들리는 수풀 사이로 일단의 인영들이 소리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 속에서 발하는 눈동자가 섬뜩함으로 번득였다.
선두에선 자가 손을 들어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이자 다른 자들이 일제히 좌우로 산개하며 움직였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의 시선이 전방의 거대한 불꽃에 고정되었다.
“역시 경계가 허술하군.”
불꽃은 정도맹의 군진이었다.
예상대로 주변을 경계하는 자들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기선 제압을 목적으로 이곳을 찾은 묵련의 광마대원들은 빠른 몸놀림으로 정도맹의 군진으로 다가갔다. 은밀하게 다가간 그들은 이십 장 거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우두머리의 눈빛이 순간 섬뜩하게 빛을 발했다. 그는 고개를 좌우로 돌려 일행들을 살폈다.
어둠 속에서 붉게 빛나는 그들의 눈동자, 우두머리는 공격준비가 끝났음을 알고는 그대로 바닥을 차고 올랐다.
파팍!
다른 자들도 검을 뽑아 들고 정도맹의 군진으로 뛰어들었다.
퍽!
“으악!”
가장 외곽에 위치했던 질풍대원 몇이 느닷없는 기습에 피를 뿌리며 쓰러짐을 시작으로 군진 외곽이 소란으로 휩싸였다.
“기습이다!”
“묵련이다!”
삐익!
예상과는 달리 정도맹의 반응 속도는 대단했다. 최초의 비명이 터짐과 동시에 광마대원들은 포위를 당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들의 눈동자엔 아무런 감정조차 떠올라 있지 않았다. 붉게 타오르는 눈동자로 몰려든 자들을 살펴보더니 입가에 웃음을 떠올린다.
“흐흐! 네놈이 강해 보이는군.”
우두머리의 눈에 비친 인물은 천하오객의 일인인 참마도 곽곤이라는 고수였는데, 그를 향해 우두머리가 몸을 날리는 것을 시작으로 광마대원 모두가 몰려든 군웅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곽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감히!”
도의 달인이라 불리는 곽곤의 참마도가 불을 뿜었다.
지척까지 달려든 우두머리의 눈동자에서 희열과 안타까움이라는 상반된 기운을 읽은 곽곤은 내심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이미 발출된 도를 멈추지는 않았다.
꽝!
콰콰쾅!
“으아악!”
연속적인 폭발이 일어났다.
그 위력이 어찌나 대단했던지 주변 대지가 지진을 만난 듯, 크게 흔들렸다.
폭발 범위 안에 들었던 고수들이 피를 뿌리며 날아갔다.
참마도 곽곤의 육신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갈기갈기 찢겨 날아갔다.
한밤의 거대한 폭발은 정도맹을 혼란으로 빠트렸다. 황급히 현장으로 달려온 수뇌부들은 아비규환의 참상에 넋을 놓았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남궁기와 사대천불이 아연실색했다.
전신을 죽어 간 동료들의 피로 칠을 한 고수가 부르짖듯 말했다.
“느닷없이 자폭을 하는 바람에…….”
“자폭을 하다니, 놈들이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스스로 몸을 폭발시키는 자살 공격이었습니다!”
남궁기의 백염이 부르르 떨렸다.
한눈에 봐도 스물은 족히 당한 듯했다. 게다가 재기 불능의 중상을 당한 고수들도 열이 넘어갔다.
“놈들이 본진으로 들어설 때까지 도대체 무엇을 했단 말이냐! 경계 책임자가 누구냐!”
남궁기의 호통에 뒤쪽에서 질풍대주 관포가 고개를 숙이며 나섰다.
부릅떠진 남궁기의 시선을 감히 마주하지 못한 관포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경계를 소홀히 한 저의 잘못입니다!”
남궁기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 군웅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고함을 질렀다.
“애당초 경계를 명하지 않은 수뇌부의 잘못이 아니오!”
“옳소! 관 대주가 무슨 잘못이 있소! 책임은 수뇌부에 있소이다!”
남궁기의 얼굴이 심하게 구겨졌다.
그러나 군웅들의 말이 옳았기에 그는 입을 닫아야만 했다.
전력을 자신한 나머지 경계에 만전을 기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광불이 군웅들을 돌아보며 나지막이 불호를 읊었다.
“아미타불…….”
“시신들을 정중히 모시고, 관 대주는 부상자들을 맹으로 후송하게나.”
현장 정리를 지시한 남궁기는 빠른 걸음으로 수뇌부의 군막으로 향했다. 광불이 뒤를 따랐다.
둘을 향해 군웅들의 야유는 한동안 이어졌다.
그러나 지금의 작은 소란은 정도맹에게 상당한 부담감을 가져다주었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자폭하는 자들의 위력을 실감했다. 그것은 곧 있을 전면전에서 상당한 행동의 제약을 가져다줄 수밖에 없다.
분란은 아주 작은 곳에서부터 일어나고 있었다.
* * *
적용백은 자신의 군막에서 침통한 모습으로 적용세의 아침 문안을 받았다.
적용세 역시 굳어진 기색이 역력했다.
“정작 중요한 시기에서 이렇듯 분열되는 모습을 보이다니…… 난감하기 그지없구나.”
“송구합니다.”
적용세가 고개를 조아렸다.
맹의 수석 장로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있던 적용세였다.
“육 전주가 빠졌다고 이 정도로 흔들릴 맹은 아니다. 이건 뭔가 잘못되었단 생각밖엔 들지 않는구나. 그래, 맹주는 뭐라고 하더냐?”
“맹주가 이상합니다. 전과는 다르게 아집으로 똘똘 뭉친 사람처럼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더욱이 오성의 두 분까지 그분을 지지하는 상황이니 난감할 뿐입니다.”
“단리 늙은이와 황보 늙은이가 맹주를 대놓고 지지한다고 하더니…….”
“두 분 때문에 다른 이들이 더더욱 말을 내놓기가 곤란한 상황입니다. 소림의 사대천불들께서도 암시적으로 그분들을 지지하는 모양새를 비추시니…….”
적용백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파였다.
“가장 큰 문제는 신마성을 반대하는 자들의 입김이 나날이 거세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도를 표방하던 문파들도 하나둘씩 그들에게 공조하는 느낌입니다.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사태를 이쯤에서 수습해야만 합니다.”
“방법이 없질 않느냐.”
적용세도 말문이 막혔다.
답답함에 탁자를 가볍게 친 적용백이 몸을 일으켰다. 적용세도 따라서 몸을 일으켰다.
잠시 군막 안을 이리저리 돌던 적용백이 짙은 숨을 내쉬었다.
“이럴 때 그분이 있었다면…….”
“그분이라시면……?”
적용백의 눈동자에 아련함이 맺힌다.
누군가를 그리워할 때 나타나는 그것을 적용세는 의아함이 가득한 시선으로 보았다.
“정도맹, 역사에 가장 뛰어났던 맹주로 기록된 그분 말이다.”
“아!”
적용세도 그제야 눈빛을 내며 가볍게 탄성을 내질렀다.
“허허! 그분이 그렇게 가시지 않았다면 이런 난국쯤이야 문제가 되겠느냐. 돌이켜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
“생존해 계신다면 돌아오시겠지요. 누구보다 천하를 염려했던 분이 아니셨습니까?”
“그래, 그랬지.”
적용백의 노안에 그리움이 짙어졌다.
천하를 주름잡는 그가 그토록 염원하는 존재, 과연 이들의 말처럼 그가 돌아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노가주님!”
누군가가 군막을 젖히며 다급하게 들어섰다.
“어인 일로 그리 호들갑이냐?”
적용백의 미간에 슬쩍 주름이 잡혔다. 들어선 자는 적용세가의 총관 적용철이었다.
해태처럼 용맹하게 생긴 그의 얼굴에 다급함이 묻어나는 것을 본 적용세가 질책하듯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 것이냐?”
“내일 아침에 대대적으로 묵련을 향할 것이라고 합니다. 방금 맹주께서 그리 결정하셨다고 합니다!”
둘이 크게 놀라 벌떡 일어섰다.
“뭣이!”
“수뇌부 회의를 거치지 않고 독단적으로 그런 결정을 내렸단 말이더냐?”
“사공 노야와 사대천불, 그리고 오대세가의 전 전대 가주들께서 힘을 보탠 듯합니다.”
적용백의 노안에 은은한 노기가 떠올랐다.
적용세도 다를 바 없었다. 자신들을 제외하고 내려진 결정이다. 하나는 정도의 우상과도 같은 오성의 일인이오, 하나는 정도맹의 주축 수뇌인 수석 장로이다.
노기를 드러냈던 적용백이 실소를 터트린다.
“허허! 참으로 우습게 돌아가는구나.”
“제가 가 보겠습니다.”
몸을 돌리려던 적용세를 적용백이 말렸다.
“그만 되었다. 내려진 결정을 번복할 수는 없지 않느냐. 그렇게 되면 혼란만 가중될 뿐이니 그냥 결정에 따르도록 하자꾸나.”
“그래도 이건…….”
“허어! 그만 되었대도!”
적용백의 언성이 다소 높아지자 적용세는 고개를 조아렸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세가의 아이들에게 가 보겠습니다.”
적용세가 급히 물러가자 적용철도 고개를 숙이고는 뒤를 쫓았다.
적용백의 미간에 새겨진 주름의 골이 더욱 깊어졌다.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에 순간 섬광이 번득였다.
“노부를 이토록 가볍게 여기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