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
<귀환무사 203화>
평범한 그들에겐 정파, 사파는 의미가 없었다. 그저 두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사천왕 남궁기가 엄명을 내려 함부로 기운을 발산하는 것을 자제시켰지만 고을을 지나칠 때마다 두려운 시선을 보내는 것엔 변함이 없었다.
꽈르릉!
맑았던 하늘에 뇌전이 몰아쳤다.
그리고 이어진 빗줄기는 이내 한 치 앞을 가늠하기 힘들 정도의 폭우로 돌변했다.
한겨울로 보면 무척 보기 드문 현상에 흉조라 웅성대는 인물들이 늘어났지만 부대는 이동을 멈추지 않았다.
정도맹을 출발한 지 하루가 지나서 이르게 된 용산이라는 작은 산에서 그들은 첫 번째 군진을 차렸다. 그들은 척후를 맡았던 질풍대주 관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휴식을 취했다.
식사를 끝내고 달이 하늘의 가운데에 오를 즈음, 군진의 중앙에 마련된 수뇌부들의 군막에서 회의가 열렸다.
맹주 나백을 위시하여 사천왕인 남궁세가의 남궁기와 소림의 공각선사, 그리고 구대문파의 장문인들과 오대세가의 가주들이 그곳에 모였다.
당대의 장문들보다 배분이 더 높은 전대의 고수들은 일부러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장문인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한 나름대로의 배려였다.
쏴아아!
폭우는 그칠 줄 모르고 대지를 적셨다.
꼬박 반나절이 지나고서 끝이 난 회의는 뚜렷한 방안을 도출하지 못하고서 다음 날로 미루어졌다.
마땅한 공격 방법을 찾지 못한 각 문파의 수장들은 육승의 부재를 통탄했다.
나백의 권한으로 나웅이 비영전을 물려받았지만 그를 보는 사람들의 시각은 곱지 못했다.
비록 정도맹 최고의 기재라고는 하지만 비영전의 광범위하고도 특수한 업무들은 모두들 그가 감당할 것이 아니라고 여겼다.
회의를 마친 각 파의 수장들은 각자의 군막으로 돌아갔다.
고문을 맡고 있는 화산의 태허장문도 화산의 군막으로 돌아가 장로들과 각주들을 불러 놓고 자체 회의에 들어갔다.
화산에서 차출된 고수들의 수는 서른이었는데, 장로들과 각주들, 그리고 질풍각의 대원들이 전부였다.
신마성에서 수련 중인 매화무적 진유도 합류한 상태였는데, 진호를 비롯한 다섯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신마성에 남았기 때문이다.
태허가 다소 굳은 얼굴로 좌중을 돌아보았다.
“큰일이구나. 전쟁이 코앞인데 지금껏 마땅한 전략조차 수립이 되질 않고 있으니…….”
진유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기존의 집단전 방식을 고수한다고 들었습니다만…….”
“맹주의 뜻이 확고하니 난감할 수밖에…… 육 전주의 부재가 이토록 크게 다가올 줄은 몰랐구나. 허허! 그 뛰어났던 사람이 그렇게 가 버릴 줄이야…….”
“안타까운 일입니다.”
화산의 수뇌부들도 다른 이들처럼 육승이 죽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신마성에 줄곧 있었던 진유도 육승이 신마성에 있음을 몰랐다.
그가 신마성에 오기 전에 화산에 돌아갔던 탓이었다.
더욱이 육승의 존재 여부를 철저히 비밀에 부친 신마성이었기에 신마성이 본격적으로 전쟁에 뛰어들기 전까지는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당장 속도를 내면 이틀 거리에 불과한데, 그 전에 확실한 전략을 수립해야 할 터인데…… 이대로 전면전을 벌인다면 그 피해가 엄청나지 않겠소?”
장로 태송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좌중을 돌아보았다. 진유가 눈빛을 발하며 입을 열었다.
“사숙조와 함께 움직이는 게 어떻겠습니까?”
“허허! 우리야 당연히 그분과 함께하면 좋겠다만, 현 상황에서 우리만 쏙 빠져나갈 수가 없지 않느냐? 가뜩이나 신마성에 대해 입을 놀리는 자들이 늘어나는 시점에서 괜히 그분께 누를 끼칠 수도 있으니 그 점은 곤란하구나.”
“신마성도 곧 전쟁의 중심으로 뛰어들 것입니다! 당연히 그분과 함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법 단호한 어조로 진유가 힘주어 말하자 모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유가 말을 이어 갔다.
“솔직히 맹이 미덥습니다. 전쟁이 코앞에 닥친 마당에도 각각의 입장만을 고수하며 분열을 보이는 저들입니다. 제대로 된 전략조차 수립 못한 상태에서 이대로 전면전이 벌어지면 상당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 더욱이 사숙조께서도 깊숙이 관련된 전쟁입니다. 사문의 제자로서 그분을 돕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것은 그분의 신분을 천하가 알고 모르고와는 상관없는 우리만의 일입니다!”
진유의 목소리에 힘이 더해졌다.
태허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잠시 고민에 빠졌던 태허가 두 손으로 탁자를 세게 짚으며 일어섰다.
“네 말이 옳구나! 어떻게 회생한 사문이더냐. 쇠락 일로를 걷던 우리에게 빛이 되어 주신 사숙이시다! 천하가 뭐라고 하든, 우린 그분께 달려가 함께 생사를 나누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느냐! 그래! 네 말대로 화산은 사숙께 가자꾸나!”
태허의 얼굴에 떠오른 결연한 빛은 이내 모두에게로 전염되었다.
다소 상기된 얼굴이 된 진유가 호기롭게 외쳤다.
“제가 지금 당장 사숙께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담담한 음성이 군막의 입구에서 들려왔다.
모두가 놀란 빛으로 일제히 입구로 시선을 던졌다. 군막의 입구가 열리며 차가운 겨울바람이 안으로 몰아쳤다.
느릿하게 들어서는 인영을 보고는 낯빛이 환하게 밝아진 모두가 허리를 숙였다.
“어서 오시오! 창왕!”
“그동안 강녕하셨습니까? 장문인!”
조윤이었다.
모두에게 가볍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 조윤은 진유의 옆자리에 앉았다.
장로 태송이 한껏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이곳까진 어인 일이시오? 혹, 사숙께서 보내셨소?”
“주공의 뜻을 전하러 왔습니다.”
“오! 그러시오? 그래, 그게 무엇이오?”
혁련천후의 뜻을 전하겠다는 조윤의 말에 모두가 몸을 앞으로 내밀며 조윤을 빤히 응시했다.
입가에 옅은 미소를 떠올린 조윤이 장문인 태허를 보며 입을 열었다.
“조금 전, 진유가 한 말처럼 하셔야겠습니다.”
“사숙께서 정녕 그러셨단 말이오?”
“당장에라도 서둘러 오라고 전하셨습니다. 화산의 위험을 그냥 보고 계실 분이 아님을 아시잖습니까.”
조윤이 스스로 없었던 뒷말을 붙였다. 아니나 다를까, 태허를 비롯한 화산의 인물들이 대번에 감동의 빛을 나타냈다.
장로 태송이 몸을 벌떡 일으키며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 당장 갑시다! 장문인!”
“허허! 이미 밤이 늦었소이다. 내일 해가 뜨는 대로 수뇌부에 통보하고 떠나도록 하십시다. 그래도 그들에게 기별은 하고 가야 하지 않겠소?”
태허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조윤도 태송을 바라보며 눈가에 주름을 만들었다. 달이 떨어지고 동이 트자 화산은 신마성으로 가겠다는 기별을 넣고는 그대로 정도맹의 부대에서 떨어져 나왔다.
“비겁하다! 적을 눈앞에 두고 제 몸만 빼낼 작정이냐!”
“우우!”
곳곳에서 비난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들은 의식하지 않았다.
그들이 정도맹 군영의 끝부분을 지나갈 때였다. 일단의 무리들이 그들의 뒤를 따라붙었다.
“잠깐만!”
선두에서 장대한 체구를 지닌 중년인이 큰 소리로 그들을 불러 세웠다. 조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감히!”
스르릉!
그들의 뜻을 불순하게 여긴 조윤이 창을 뽑으려다 말았다.
무리들은 남궁세가와 백리세가의 고수들이었는데, 남궁소미가 그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소녀, 소미가 창왕을 뵙습니다.”
조윤이 굳어졌던 낯빛을 풀고는 그녀의 예를 받았다.
그는 그녀와 함께하는 자들을 쓸어 보았다. 하나같이 형형한 안광을 발산하며 서 있는 모습이 꽤나 듬직해 보였다.
“남궁세가도 신마성과 함께하겠습니다! 조부님의 뜻으로 결정되었으니 부디 거절치 말아 주십시오!”
“백리세가도 함께하겠소! 적을 섬멸하는데 정도맹이면 어떻고 신마성이면 어떻겠소! 기왕이면 세가의 아이들이 있는 신마성과 함께하겠소!”
장대한 체구의 중년인이 큰 소리로 조윤을 보며 외쳤다.
조윤은 한눈에 그가 누군지 짐작했다.
당대 백리세가의 가주임과 동시에 호남의 최강자인 백리승이 바로 중년인의 신분이었다.
조윤은 순간 난감했다.
이들이 함께하리라곤 생각조차 못했던 일이다.
그러나 조윤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과 남궁소미와의 인연이 결코 작지 않았기 때문이며, 백리세가는 대공자, 백리추와 백리관이 지금 신마성에 있었으니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전쟁이 시작되면 그때 봅시다!”
백리승이 큰 소리로 군웅들을 보며 소리쳤다.
무심한 눈길을 군웅들에게 던졌던 조윤이 북쪽을 향하자 모두는 그의 뒤를 쫓았다.
제2장 대전쟁의 서막
묵련의 대전은 언제나처럼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곳에서 누군가 다급한 어조로 말을 하고 있었다.
“놈들이 혈야평의 진입을 미루고 있는 데다 일부 세력이 연합을 깨고 나갔다고 합니다. 예상대로 놈들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습니다! 명을 내려 주시면 기습전으로 놈들의 예봉을 꺾겠습니다!”
송곤은 편안한 자세로 태사의에 깊숙이 몸을 묻고 앉은 천왕을 흘긋 쳐다보고는 고개 숙이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천왕이 느릿하게 눈을 뜨며 몸을 비스듬히 세웠다. 가늘게 떠진 실눈이 섬뜩함으로 번득였다.
“놈들이 한곳에 똘똘 뭉쳐 있다고 들었다. 기습이 가능하다고 여기느냐?”
“허를 찌르자는 것입니다. 오백이 한곳에 모였으니 분명 기습 따윈 생각조차 않을 그들입니다. 광마대원, 몇을 보내시어 놈들의 거점에서 자폭만 성공한다면 충분히 크게 흔들어 줄 수 있습니다!”
“송곤!”
“하명하십시오!”
천왕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부르자 송곤은 머리를 조아렸다.
“네 생각만큼 정도맹은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다. 그 멍청한 놈 때문에 전대의 늙은이들이 모조리 은거를 깨고 몰려 나왔다면 북해빙궁 정도는 하루 만에 쓸어 내고도 남을 전력이다. 어쩌면 우리의 주적인 신마성보다 더 강력한 세력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지. 하니 쓸데없는 생각은 머리에서 지워 내라.”
“하오나, 전면전 이전에 놈들의 지나친 사기를 어느 정도는…….”
“후후! 그냥 내버려 둬라. 물론 역사상 최강의 세력을 모았으니 기세등등하겠지. 하나, 막상 전쟁이 시작되고 상상 못할 힘을 느끼는 순간, 놈들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게 되어 있다. 그러니 놈들의 사기 따위는 무시해라. 그건 그렇고 놈들의 움직임은 어떠하냐?”
순간 송곤이 머뭇거렸다.
천왕의 눈동자에 섬광이 번득였다가 사라졌다.
“태도를 보니 일이 벌어진 모양이군?”
“죄송합니다! 철수하면서 남겨 놓았던 아이들이 모조리 죽임을 당했습니다.”
“모조리?”
“놈들이 우리의 주력이 빠지는 것을 노린 듯합니다.”
송곤은 내심 두려웠다.
그러나 의외로 천왕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것이 더욱 송곤을 두렵게 만들었다. 잠시 송곤을 차갑게 응시하던 천왕이 눈을 감으며 몸을 깊숙이 묻었다.
“예정대로 놈들을 철저히 고립시켜라. 송곤!”
“공야무의 죽음으로 이미 그렇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요성제에게 소식을 띄워라. 전군을 이끌고 혈야평으로 오란다고 말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할 자입니다.”
천왕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걸렸다.
“후후! 신강 이북을 몽땅 준다고 하면 움직일 것이다.”
송곤의 눈에 놀람이 떠올랐다.
말이 신강 이북이지 그곳은 어지간한 나라의 수배에 맞먹는 광활한 넓이를 자랑한다.
그것을 모조리 주겠다니…….
“그 광활한 곳을 전부 말입니까?”
“어차피 대륙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서둘러라!”
송곤은 하는 수 없이 물러났다. 그가 대전의 문고리를 잡아갈 때였다. 천왕의 부름이 다시 이어졌다.
“송곤!”
“……!”
송곤이 몸을 돌려 천왕을 바라보았다.
“네 말대로 놈들의 사기를 조금은 죽여 놓을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아이들을 보내 가볍게 인사 정도만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