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
<귀환무사 202화>
* * *
딸그락!
“드세요.”
찻잔을 내려놓는 손길이 철석간장을 그대로 녹여 버릴 만큼 희고 고왔다.
손길의 주인공은 심신을 상쾌하게 해 주는 향기를 남기고는 얼음처럼 차가운 사내의 곁에 가서 앉았다. 천상의 선녀가 지상으로 내려왔다면 저런 모습일까?
육승의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저, 저 정도였던가…….’
소문은 그녀가 천하제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육승은 소문이 달랐음을 깨달았다.
천하제일이라는 말로 논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하물며 그런 여인이 둘씩이나 있었으니 육승은 호흡을 크게 하며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켜야만 했다.
“몸은 나으셨소?”
혁련천후가 들어섰다.
육승은 저절로 머리를 조아렸다.
“모든 게 신마성과 성주님의 덕분입니다.”
정도맹에서 그 누구에게서도 느껴 보지 못했던 압도적인 기운이 그에게서 느껴졌다. 육승은 ‘이런 것이 바로 제왕의 기도구나’라고 생각했다.
“후회하지 않겠소?”
“……!”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은 어쩌면 지옥을 향한 것일 수도 있소.”
“그 끝에 강호의 안녕이 있으니 절대 후회하지 않습니다. 부족한 저를 받아 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육승의 머리가 더욱 깊게 숙여졌다.
“부탁이 있다고 들었소만…….”
“저와 목숨을 함께했던 아이들이 있습니다. 천하의 각처에서 목숨을 걸고 강호의 안녕을 위해 지금도 사지를 넘나드는 그 아이들을 받아 주십시오!”
혁련천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육승에게 다가오는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독고혜와 영호수란도 육승에게 다가왔다.
“천하엔 그대가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들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수하들을 데려올 방법은 있소?”
“저희들만의 특별한 연락 체계가 있습니다. 그것까지는 놈들도 모를 것입니다.”
육승의 얼굴에서 간절함을 읽은 혁련천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믿는 그대만큼이나 나도 그대를 믿소. 그들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신마성은 문을 열 것이오.”
“감사합니다! 성주님!”
육승이 의자에서 몸을 빼 바닥에 엎드렸다.
그러나 항거할 수 없는 잠력이 밀려와 그의 몸을 일으켰다.
“귀하는 결코 작은 존재가 아니오. 하니 앞으로는 함부로 머리를 조아리지 않아도 괜찮소.”
“……!”
육승의 두 눈이 격동으로 인해 흔들렸다.
아름다운 음성이 이어졌다.
“축하드려요. 전주님!”
“엉뚱한 곳에서 식구가 되었네요. 앞으로 잘 지내요.”
* * *
“헉! 헉!”
도량은 하늘을 보며 대자로 누웠다.
조금 전보다 더한 고통이 전신을 엄습했지만 얼굴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관산악이 고개를 저으며 그를 응시했다.
“헉! 헉! 이 정도면 화산의 제자들과 견줄 만합니까?”
“그래, 인정한다. 자식아!”
“헉! 헉! 약속은 지키셔야 합니다! 대주님의 모든 것을 주시겠다는 그 약속 말입니다!”
“내가 그런 약속을 했었나?”
“제 마음입니다! 헉! 헉!”
“뭐?”
관산악은 어이가 없어 도량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때 그의 뒤쪽에서 아름다운 음성이 들려왔다.
“제자를 얻으셨군요, 축하드려요!”
“사부가 완전 건달 같아.”
늘어졌던 도량이 벌떡 일어섰다.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그는 뒤쪽에서 걸어오는 혁련천후를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은 혁련천후는 관산악을 보며 말했다.
“많이 늘었나 보군.”
“아직 멀었습니다.”
영호수란이 끼어들었다.
“사부가 부실한 것 아니에요?”
“크흠! 아무리 좋은 사부라도 제자가 아둔하면 방법이 없지요.”
“쳇! 비겁한 변명.”
고개를 숙인 도량의 얼굴이 슬쩍 뒤틀렸다.
도량을 쳐다보던 혁련천후가 눈빛을 발했다. 다소 차가운 음성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왜 그 검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냐?”
“수련 중이라…….”
“네 형은 잠을 잘 때에도 그 검을 품었다고 들었다. 무당의 혼이 녹아 있는 검이니 천수가 다해 죽는 그날까지 곁에 두어야 한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도량이 고개를 조아리자 혁련천후는 다시 관산악을 보며 말했다.
“곧 전쟁이 시작된다. 그 전에 죽지 않을 만큼 강해져야 한다. 네 모든 것을 풀어서라도 그렇게 만들어라.”
“알겠습니다.”
도량의 어깨를 툭 쳐 준 혁련천후는 혁련강의 거처로 걸음을 놓았다.
독고혜가 관산악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좋은 소식이 들리더군요, 관 대주님.”
“아, 뭐…….”
관산악이 얼굴을 붉히며 머뭇거렸다.
독고혜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국수는 제가 말게요.”
“속도위반이나 하지 마세요.”
영호수란의 그 말이 이어지자 관산악은 어쩔 줄을 몰랐다.
머리를 긁적이던 관산악은 다시 도량을 응시했다. 그러더니 심드렁하게 말했다.
“네놈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사부 노릇을 하게 생겼군. 좋아! 너 오늘부터 죽었다고 복창해라.”
“좋습니다! 갑니다!”
도량의 손엔 무당의 검이 쥐어져 있었다.
까가강!
* * *
펑!
거대한 불꽃이 밤하늘을 밝히더니 소멸되어 갔다.
신마성을 포위하고 있던 묵련의 고수들이 그 불빛을 보고는 얼굴이 굳어졌다.
총사를 맡았던 구검마의 둘째 태용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정도맹이 움직였다. 감시 병력만 남기고 모두 혈야평으로 이동한다!”
태용의 명이 떨어지자 일천에 달하던 묵련의 병력들은 소수만을 남겨둔 채 빠르게 서쪽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상당한 수의 병력이 이동함에도 불구하고 소리조차 없었다.
남은 자들은 여전히 날카로운 눈빛으로 신마성을 살폈다.
어둠 속에서도 환하게 빛나는 신마성은 거인의 그것처럼 거대했다. 그때 유달리 날카로운 인상을 지닌 장한이 나지막이 말했다.
“누가 나옵니다!”
다른 자들이 빠르게 장한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의 눈에 신마성의 정문을 통해 빠져나오는 한 인물이 잡혔다.
상당한 거리였지만 워낙 환하게 불을 밝혀 놓았던 탓에 인물의 얼굴이 생생하게 보였다.
흑발을 늘어뜨리고 허리에 검을 두른 인물은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는데, 우연인지 그 방향이 자신들이 은신하고 있는 백어산의 능선 쪽이었다.
모두가 눈빛을 발하며 인물을 유심히 살폈다.
“살왕의 인상착의와 같습니다!”
예의 그 장한이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남은 자들을 이끄는 우두머리의 얼굴이 대번에 굳어졌다.
자신이 보기에도 분명 살왕 흑야의 인상착의와 같았다.
“빌어먹을! 하필이면 모두 돌아간 이때에 나오다니…….”
진정 살왕이라면 자신들 전부가 달려들어도 어찌할 수 없는 상대다.
지금 남아 있는 자들은 경계를 목적으로 했기에 하위에 드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하물며 지금은 밤이 아닌가.
살왕이 작정하고 하나하나 죽이고자 달려들면 살아날 방법은 없다고 봐야 한다.
수하 하나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전서를 보낼까요?”
“서둘러라! 그리고 다른 놈들도 움직일 수 있으니 놓치지 말고 살펴야 한다!”
* * *
홍무는 백어산의 능선을 흘긋 쳐다보며 각오를 다졌다.
[실전만큼 좋은 수련은 없다. 가서 몇 놈의 목만 따고 오도록.]
흑야가 그에게 한 말을 떠올렸다.
신호탄이 터지고 그 이후, 묵련의 고수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음은 실시간으로 신마성의 수뇌부에 전달되었다.
하지만 움직임을 경계하는 자들이 남았을 거라 짐작한 흑야가 자신에게 실전 수업을 지시한 것이다.
‘좋아! 살왕께 전수받은 모든 것을 오늘 제대로 펼쳐 보이겠다!’
머리 모양에 복장까지 흑야를 흉내 낸 홍무는 다소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어둠 속에 잠긴 백어산을 향해 걸었다.
조금을 걷자 송림이 나왔다.
제법 높은 나무들 탓에 능선에 은신한 묵련의 고수들이 그를 보기란 각도상으로 불가능했다.
홍무의 육신이 그 자리에서 유령처럼 모습을 감추었다.
그가 모습을 감춤과 동시에 시커먼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화산의 제자들과 모용단승, 그리고 도량이었다.
그들 역시 실전을 경험하기 위해 나선 것이었다.
“제법 많은 수가 남았을 거다. 가급적 죽일 수 있는 놈들은 모조리 죽여 놓자!”
“함께 이동하실 생각입니까?”
“당연하지. 곧 있을 전면전을 대비해서 그렇게 하라는 가짜 사부들의 지시가 있었다. 유기적인 협공을 익히라는 뜻이겠지.”
진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모두는 빠르게 산을 타고 능선을 향했다.
* * *
서걱!
어둠 속에서 시퍼런 검광이 번득이더니 수급 하나가 바닥을 굴렀다.
주변을 함께하던 죽은 자의 동료들이 기겁을 하고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흩어지면 죽음이다! 한곳으로 뭉쳐라!”
벌써 열이 넘어가는 자들이 보이지 않는 칼에 의해 명을 달리했다.
묵련의 고수들은 어둠 속에서 자신들을 살육하는 자가 흑야라고 확신했다.
그는 막는다고 막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퇴각하라!”
우두머리는 신마성의 움직임을 경계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잊고 철수를 명했다.
여기 있다가는 모조리 싸늘한 주검으로 변하는 것은 시간문제라 여긴 것이다.
잔뜩 경계하며 이동하던 그들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인영들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흠! 꽤 머릿수가 많군. 제대로 싸울 맛이 나겠어.”
“그다지 강해 보이는 놈들은 아니라서 별로야.”
나타난 인물들이 자신들을 가볍게 여기자 묵련의 고수들은 어둠 속의 살왕에 대한 두려움을 잊고서 발끈했다.
“개자식들이 뒈지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고작 다섯이다! 쓸어버려!”
우두머리의 명령이 떨어지자 좌우로 산개하며 넷을 에워쌌다.
막상 그들이 전의를 드러내자 상당한 기운이 주변을 감돌았다. 상대를 가볍게 보았던 진호의 얼굴이 슬쩍 굳어졌다.
그러나 이내 투기를 풀풀 풍겨 내며 검을 뽑아 들었다.
도량의 검이 유달리 어둠 속에서도 빛을 뿜었다.
시퍼런 검광이 섬뜩함을 자아내며 검신 전체를 두르고 있었는데, 달빛에 반사되는 것만으로 그 정도의 빛을 발산한다면 천하에 보기 드문 명검임에 분명했다.
그리고 누구보다 먼저 도량이 움직였다.
달려드는 그에게서 관산악의 거친 모습이 투영됨을 화산의 제자들은 느꼈다.
어둠 속에서 검을 감추고 있던 홍무는 느닷없이 나타난 넷을 보며 분통을 터트렸다.
모처럼 잡은 실전 기회가 그들 때문에 수포로 돌아가자 살수의 기본마저 저버리고 숲에서 뛰쳐나왔다.
“이런! 썅!”
홍무는 누구보다 난폭하게 달려들었다.
* * *
정도맹의 정문이 열리며 도합 오백에 달하는 고수들이 묵련의 본단을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수십 개의 부대로 나뉘어 출발한 고수들은 경공을 펼치지 않고 보통의 걸음으로 남쪽을 향했다.
그 선두에 정도맹주 나백과 살아남은 사천왕의 둘이 모든 부대를 이끌었다.
좌우는 기라성 같은 전대의 고수들이 형형한 눈빛을 발하며 걸음을 맞추었고 각 파에서 차출된 정예 고수들이 뒤를 받치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고수 아닌 자가 없는, 그야말로 사상 최강의 전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강호 존망의 전쟁을 위해 길을 떠난 그들이었지만 표정은 자신감으로 넘쳐 났다.
모두가 새롭게 합류한 전대의 고수들 때문이었다.
푸드득!
놀란 새들이 전쟁의 서막을 알리기라도 하듯 사방으로 비상했다.
그들이 뿜어내는 기운에 길을 가던 민초들이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