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무사-198화 (196/425)

# 198

<귀환무사 198화>

“묵련의 사자인가?”

“그렇소.”

“맹주 나백이네.”

“이름을 밝히지 못함을 이해하시오.”

흑의 노인은 여전히 당당했다.

스슥!

암영밀위의 검이 노인의 목에 닿았다. 살짝 베어진 곳이 가느다란 핏줄기를 흘려 냈다. 그러나 흑의 노인은 여전히 당당한 태도로 나백만을 응시했다.

“용건은?”

“천왕께서 이것을 전해 드리라고 하셨소.”

품에서 붉은 첩지를 꺼낸 노인이 주변을 슬쩍 쳐다보았다. 다른 이들이 봐선 안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행동이었다.

그 의미를 알아챈 남궁기의 얼굴에 은은한 노기가 떠올랐다. 그때 나백이 남궁기를 향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용서하십시오.”

자신만 보겠다는 뜻이었다.

흑의 노인을 날카롭게 노려보던 남궁기와 암영밀위들이 밖으로 나갔다. 묵묵히 그들을 지켜보고 섰던 나백이 흑의 노인을 직시했다.

“읽어 보고 태우라고 하셨소.”

흑의 노인이 서찰을 그에게 건넸다.

서찰을 받은 나백은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읽어 가는 와중에 그의 얼굴은 돌처럼 무겁게 굳어졌다. 지켜보던 흑의 노인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나백을 응시했다.

끝까지 읽은 나백이 싸늘히 물었다.

“설마 이곳에 오면서 이것만 달랑 들고 오지는 않았을 테지?”

“그것뿐이었소, 후후후.”

“그렇게 웃지 마라. 죽여 버릴 수도 있으니까.”

“나는 천왕의 사자요. 당신에겐 그러한 권한이 주어지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흑의 노인은 옅은 미소까지 머금은 채, 나백을 직시했다. 잠시 둘 사이에 불꽃이 튀겼다. 매섭게 흑의 노인을 노려보던 나백이 돌연 다른 것을 물었다.

“천왕께서는 모든 것을 이루셨느냐.”

“물론이오.”

“너희, 구검마(九劍魔)들도 마찬가지겠지?”

“당연하오.”

알 수 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그러다가 나백의 입가에 의미 모를 미소가 언뜻 비쳤다.

“나는 어떠리라 보느냐.”

“……!”

“이 나백은 과연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느냔 말이다. 공손개!”

흑의 노인의 이름이 나백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공손개라 불린 노인의 얼굴이 처음으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는 나백의 눈동자 깊숙한 곳에 어린 광포한 기운을 보았다. 그래서인지 지금껏 당당했던 기세가 한풀 꺾였다.

나백이 한마디 더 했다.

“돌아가서 답을 기다려라.”

제8장 뜻밖의 손님

휘이잉!

거센 바람에 아름드리 거목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 위에 진천이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누워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도 이리저리 흔들렸지만 나뭇가지는 조금도 휘어지지 않았다.

그런 그의 뒤쪽에 매화무적 진유와 신마각주 악승이 있었다. 지금 그들은 묵련의 사자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관도를 주시하고 있던 악승이 진천을 보며 회의적인 표정을 지었다.

“놈이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이곳으로 온다니까.”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내 직감이지.”

악승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진유도 진천을 보며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가자고 해서 함께 따라나서기는 했지만 악승의 말처럼 묵련의 사자가 반드시 이곳을 지나간다는 보장은 없었다.

“오면 말해라.”

“잠이 옵니까?”

“눈만 감으면 그대로 직방이다.”

악승이 대번에 고리눈으로 변했다.

아예 팔짱까지 하고서 눈을 감는 진천을 보며 그는 내심 나무를 확 잘라 버리고 싶은 충동마저 느꼈다. 하지만 그랬다간 맞아 죽을 수도 있어서 애써 참아야 했다.

둘을 지켜보던 진유가 피식 웃었다.

언제나 터지면서도 대들기를 포기하지 않는 악승이 그의 눈에는 그저 대단하게만 보였다. 때로는 악승의 그러한 패기가 부러울 때도 있었다.

자신에게는 없는 것이니까.

[귀신은 뭐 하는지 모르겠소. 저런 인간 안 잡아 가고.]

[귀신도 부려 먹을 분이잖소. 하하!]

[하긴…….]

그때 진천이 눈을 떴다.

“악승아!”

“또 왜 부르십니까?”

“주공께서 내게 전수하신 무공이 하나 있거든.”

“……뭡니까?”

“고금을 통틀어 전음을 도청하는 분은 오직 그분뿐이지.”

“……예?”

악승은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설마 하는 눈빛으로 진천을 응시했다. 진유도 설마 진천이 전음을 엿들을 수 있을까 하는 표정을 지었다.

기지개를 편 진천이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며 악승을 쳐다보았다.

“난 네가 귀신을 그토록 보고 싶어 할 줄은 미처 몰랐다.”

“……!”

악승이 재빨리 뒤로 훌쩍 날아갔다. 진천이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오라는 시늉을 했다.

“말로 할 때 이리 와라.”

“치사하지 않습니까? 전음을 엿듣다니 말입니다!”

“그 말, 주공께 꼭 전해 주마.”

“……!”

악승이 하마터면 나무에서 떨어질 뻔했다.

진유가 둘을 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다가 무심결에 관도의 끝을 응시하더니 낯빛이 급변했다.

“옵니다.”

진천과 악승의 시선이 재빨리 관도의 끝을 향해 돌아갔다. 묵련의 사자 공손개가 관도를 따라 걸어오고 있었다. 그저 평범한 걸음걸이처럼 보였는데 한 걸음에 일 장씩 쭉쭉 미끄러지는 놀라운 신법을 펼치고 있었다.

“제법인데?”

“생포가 가능하겠습니까?”

악승의 물음에 진천은 대답하지 못했다.

저 정도면 생포가 아니라 죽이기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그냥 죽여 버릴까?’

더욱 강해진 진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손개를 생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선뜻 생기지가 않았다. 그만큼 공손개에게서 발산되는 기운은 대단했다.

진천이 고민을 하는 와중에 공손개는 그들이 은신하고 있는 거목의 아래를 지나가고 있었다.

진유가 진천을 바라보았다. 악승도 어떻게 할지를 눈빛으로 물었다.

진천이 눈빛을 발하며 전음을 날렸다.

[일단 친다!]

[예!]

전음이 떨어짐과 동시에 진천이 쌍장을 벼락같이 아래로 뻗었다. 강맹한 기운이 공손개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진유와 악승도 허공으로 뛰어오르며 공손개를 향해 검강을 날렸다.

셋의 합공이 고스란히 공손개의 육신을 노리고 날아갔다.

쾅!

콰지직!

흙먼지가 자욱하게 치솟으며 공손개를 가려 버렸다.

“아직 살아 있어!”

발이 땅에 닫기가 무섭게 진천은 흙먼지 속으로 냅다 뛰어들었다. 그 안에서 섬뜩한 기운이 진천을 향해 날아왔다.

까가강!

진유와 악승은 적당한 거리 밖에서 흙먼지 속을 주시했다. 검과 검이 부딪히자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눈부신 섬광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까가강!

“큭!”

누구의 것인지 모를 외마디 신음이 터졌다.

뒤이어 누군가 흙먼지 밖으로 뛰쳐나왔다. 공손개였다. 흙먼지 밖으로 나온 공손개의 신색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장포는 갈기갈기 찢어져 속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곳곳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진천이 그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괴물 같은 놈일세.”

진천과 진유, 그리고 악승을 차례로 쓸어 본 공손개가 뭔가를 알았다는 듯 안광을 번뜩였다.

“이제 보니 신마성의 잡졸들이었구나.”

불리한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공손개에게서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신마성에 대한 적개심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로잡아서 물어볼 게 있었는데, 생각을 바꿨다.”

“……뭐?”

“그냥 죽여 줄게. 너 정도라면 사로잡다가 우리가 다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태허라는 늙은이가 네놈들에게 나에 대한 정보를 준 모양이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닐 텐데?”

스스슥!

진천이 다시 움직였다.

생포는 포기했다. 그냥 죽이겠다고 작정을 한 이상 손속에 사정을 둘 필요는 없었다. 해서 그의 두 손에서 윙윙거리며 피어오른 섬광은 조금 전까지와는 차원이 달랐다.

공손개의 얼굴이 긴장감으로 물들었다.

자신은 묵련에서도 최고의 고수에 속하는 구검마(九劍魔)의 일원이다. 일대일로는 오왕도 상대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는 오왕에 버금간다는 환영마객 진천과 결코 무시 못할 두 명이 더 있다.

싸워서 이길 확률은 없다고 봐야 한다.

‘도주하고 본다.’

도주를 결심한 공손개는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그런데 그 대상이 진천이 아닌 진유였다.

“위험하다!”

진천이 급히 외쳤다. 막 달려들려고 자세를 갖추던 진유는 느닷없는 기습에 황급히 뒤쪽으로 몸을 뺐다.

그때였다.

공손개가 그의 머리를 넘어 엄청난 속도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런!”

진천이 빠르게 공손개의 뒤를 쫓았다.

* * *

사박!

낙엽 위를 스치듯 질주하던 적설모가 순간 어딘가에서 날아든 섬광을 얻어맞고 갈기갈기 찢겨 날아갔다.

퍽!

“꽤나 성가신 것들이군.”

“그러게. 벌써 열 마리도 더 죽였는데도 끊임없이 나타나다니.”

흑야를 비롯한 오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슬쩍 미간을 찡그렸다.

엄청난 수의 적포인들이 꾸역꾸역 올라오고 있었다.

“많이도 몰려온다.”

“후후후, 그동안에 당한 숫자가 적지 않으니 제대로 열을 받은 모양이지.”

북궁천소가 조윤에게 물었다.

“정면으로 칠 생각이냐?”

“그건 곤란하다. 지금처럼 암습 위주로 하나하나 처치하는 게 더 낫다.”

“이래나 저래나 많이 죽이면 되는 거 아니냐. 자! 사냥을 다시 시작해 볼까?”

“흐흐흐, 좋지.”

모두는 다시 숲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이 모습을 감춘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묵련의 고수들이 그곳에 몰려들었다. 선두에 선 노인이 죽어 있는 적설모를 발견하고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어떤 놈들인지 잡히기만 해 봐라!”

벌써 며칠 사이에 백이 넘어가는 무사들이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을 공들여 사육한 적설모도 열 마리 이상이 죽어 버렸다.

절정 고수의 흔적도 어김없이 찾아내는 적설모이기에 손실은 엄청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적의 흔적조차 찾아내지 못했으니 책임자인 도광의 분노가 하늘을 찌를 법도 했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모든 것이 천왕에게 보고가 들어갔다는 점이었다.

지금 주변을 둘러보는 노인은 바로 천왕이 직접 이곳으로 보낸 자인데, 바로 구검마의 일원인 조진(趙?)이라는 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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