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
<귀환무사 193화>
* * *
쾅!
서류에 도장을 찍는 나백의 손길이 꽤나 거칠었다. 그와 함께하고 있던 신기수사 적용백과 수석 장로 적용세의 얼굴이 무겁게 굳어 있었다.
“전면전이라…….”
적용백이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나백이 결재한 서류는 묵련과의 전면전을 선포하는 서류였다. 일단 참석은 하되 기본 기조는 전면전으로 가겠다는 뜻을 공식화한 것이었다.
정도맹의 자존심도 문제지만 이렇게 강하게 나가야만 정파무림의 뜻을 하나로 모을 수 있다는 계산에서 내려진 결정이었다.
적용세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일단 천하에 공고를 하여 전대의 고수들을 불러내는 것이 급선무가 아니겠습니까? 묵련이 빙궁과 연계해 있다면 지금의 전력으로는 그들과의 전면전은 힘들다고 봐야 합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고개를 끄덕인 적용백이 나백을 돌아보며 물었다.
“맹주께서 직접 공문을 내리는 게 좋겠소. 남은 기일이 보름에 불과하니 서둘러야 할 것이오.”
“수사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대답하는 나백의 표정이 침통하기 짝이 없었다.
다비문의 개파말고도 그에게는 커다란 걱정거리가 하나 더 있었다. 그의 내심을 알고 있던 적용세가 위로하듯 말을 건넸다.
“맹주, 설마 육전주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겠소?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 잠시 나갔을 것이오. 그러니 너무 염려치 마시오.”
“지금껏 이런 일이 없었지 않소. 일이 생겨 맹을 나갔다면 사전에 이 몸에게 보고를 했을 터인데…….”
나백이 답답한 심정을 드러냈다.
그랬다. 비영전주 육승이 갑자기 사라졌다. 하루 이틀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나흘이 지나도록 돌아오지도, 연락조차도 없자 걱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나백이 가장 믿은 육승이다. 지금 같은 중차대한 시기에 없으니 마치 손과 발이 따로 노는 것 같아 좀처럼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정도맹의 모든 전략과 전술은 육승의 머리에서 나온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에 적용백과 적용세의 걱정도 나백에 못지않았다.
“당장은 육 전주를 찾는 게 급선무이오. 혹, 놈들이 육 전주를 해하기라도 한다면 맹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처하게 되오이다.”
“육 전주가 그 정도였는가?”
적용세의 말에 적용백이 미간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나백이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적용백을 응시했다. 적용백이 나백을 향해 말했다.
“제아무리 비영전의 머리라고는 하지만 맹주의 그에 대한 근심이 지나친 듯 보여 한 말이오. 그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맹주도 다 알고 있지 않소.”
“그렇긴 합니다만…….”
“맹주가 중심이 바로 서야 하오. 누가 뭐래도 맹주는 정파를 대표하는 사람이 아니오. 이런 중차대한 시기에 한낱 전주에게 매달리는 모습은 과히 좋지 않아 보인다오.”
“송구합니다.”
적용백이 일어섰다.
“이 몸은 이만 돌아가겠소. 가서 그 늙은이들에게 전서라도 보내야겠소.”
오성을 말함이었다.
나백의 표정이 일순 밝아졌다.
“무제께서는 지금 신마성에 계신다고 하니 다른 위인들에게만 보내면 되지 않겠소. 강호가 이 지경이니 불원천리를 마다않고 달려올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맹을 대신하여 감사드립니다.”
“감사는 무슨…… 이럴 때 힘쓰라고 그동안 대우받으며 살아온 것이 아니겠소. 자, 그럼.”
적용백이 맹주실을 빠져나갔다.
적용세가 다른 말을 꺼냈다.
“신마성과의 동맹 건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대정문 때문에 어렵게 되었소이다. 조만간에 회동을 하기로 약조는 잡았지만 큰 기대는 않는 게 좋겠소.”
“흠…….”
적용세가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나백이 그런 적용세를 위로했다.
“사대천불을 비롯한 전대의 고수들이 속속 출관을 하고 있다 하니 너무 걱정은 마시오. 호법께서 그러면 내가 다 불안해지지 않소.”
“괜히 심려를 끼쳐 드렸습니다.”
“별말씀을.”
둘은 서로를 위로하며 애써 표정을 고쳤다.
* * *
정도맹은 속속들이 모여드는 사람들로 유사 이래 가장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용성과 빙궁의 침공으로 인해 각각의 문파로 돌아갔던 고수들이 다시 정도맹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강호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전대의 고수들도 나날이 그 수를 더해만 갔다. 소림은 사대천불은 물론이요, 전 전대의 십팔나한들과 구대문파의 고수들이 정도맹을 찾았다.
나백을 비롯한 정도맹의 수뇌부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역사상 이토록 강력한 세력의 집결은 삼백 년 전에 일어났던 혈겁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게다가 당대 최강자들로 불리는 오성이 영호도성을 제외하고 모조리 입성했으며 천하오객과 십도객, 십검객들 역시 극진한 환대를 받으며 정도맹의 정문을 넘어섰다.
졸지에 거처를 빼앗겨 버린 맹의 무사들은 임시로 천막을 짓고 그곳에서 기거했는데, 불평은 고사하고 하나같이 크게 고무되었다.
모두가 몰려드는 고수들로 인해 고무되어 갈 때, 비영전만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똑똑!
오동나무를 베어 만든 육승의 집무실 문을 두드리는 인물이 있었다.
약간 구부정한 허리에 평범하게 생긴 노인, 바로 사천왕의 일인이자 노야로 불리는 공야무였다.
공야무는 뒷짐을 하고서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게 누구 없느냐.”
이번엔 소리 내어 불렀다. 사실 공야무는 육승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마치 육승이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혹시 있을지 모를 주변의 눈을 의식해서였다.
주변을 둘러보던 공야무의 눈빛이 변했다. 평소의 인자하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눈빛이었다.
푸스스!
공야무의 손이 슬쩍 스치고 지나가자 고리 주변이 재로 변하며 구멍이 뻥하고 뚫렸다. 구멍 안으로 손을 들이민 공야무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구부정한 그의 육신이 그림자처럼 집무실의 가장자리로 이동했다.
책이 꽂힌 서랍 주변에 미세한 선이 사각으로 둘러져 있었는데, 공야무의 손길이 닿자 놀랍게도 벽이 밀려나며 공간이 생겼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시커먼 어둠으로 가득한 공간은 밑으로 쭉 이어져 있었다. 공야무는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통로는 꽤나 길었다.
좌우는 인공석이 아닌 천연 바위로 이루어져 있었다. 사람의 흔적이라곤 전무한 그곳을 공야무는 유심히 살피며 이동했다.
일각을 이동한 공야무는 앞을 막아서는 벽을 마주하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두 평 남짓한 공간은 좌우가 바위로 둘러진 천연의 석실이었다. 육승이 이곳으로 왔다면 어딘가 통로가 있을 것이라 짐작한 공야무는 눈에 내공을 담아 벽을 살폈다.
그러나 아무런 기관의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파스스!
공야무의 손에서 시퍼런 불길이 생겨났다.
그러자 주변이 환하게 밝아지며 일목요연하게 드러났다. 바닥을 살피던 공야무가 어느 지점에 이르러 안광을 번뜩였다. 뒤이어 허리를 숙여 바닥에서 뭔가를 집어 올려서는 날카롭게 살펴보았다.
손톱 크기의 천 조각이었다.
“놈의 것이군.”
그가 말한 놈은 아마도 육승인 듯싶었다.
흔적을 찾는 것을 포기하려고 했던 공야무는 다시 석실 전체를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 각이 흘렀을 즈음, 공야무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찾았군.”
시퍼런 불꽃으로 일렁거리던 그의 손이 벽의 중앙 부근을 미는 시늉을 하자 우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벽 전체가 회전하며 밀려났다.
순간 눈을 찌르는 태양빛이 석실 안으로 밀려들었다.
석실을 나온 공야무는 주변을 돌아봤다. 그가 선 곳은 정도맹의 뒤쪽을 두르고 있던 산의 끝머리였다.
빽빽한 소나무로 가득한 송림을 지나쳐 온 공야무는 커다란 바위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에 산의 끝이었다.
산 밑으로 저 멀리 화산이 웅장함을 자랑하며 희미한 윤곽을 보이고 있었고, 그곳을 내려가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깊은 절벽을 타고 내려가야만 했다.
그 외의 다른 길은 없었다.
“놈이 이곳으로 맹을 나섰다면 어디로 갔단 말인가?”
공야무는 한발 앞으로 나서서 절벽 밑을 내려다보았다.
높이가 적어도 백장은 되어 보이는 그곳을 훌쩍 뛰어내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고개를 저은 공야무는 다시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실수로 놈에게 나의 존재를 알려 줬다. 그 일이 만약 그분의 귀에 들어가면 내 입장에 곤란해진다. 그 전에 반드시 놈의 목을 잘라 거사에 차질이 없도록 해야 한다.”
누가 들었다면 믿을 수 없을 말이 흘러나왔다.
천하의 공야무가 눈치를 보는 자가 있었다니.
공야무는 주변을 샅샅이 뒤지며 사람이 이동한 흔적을 찾았다. 넓은 송림을 일각 동안 살핀 그는 좀처럼 흔적이 보이지 않자 초조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천하를 떨어 울리는 그가 초조함을 드러냈다면 그가 두려워하는 자의 능력이 어떠한지 능히 짐작이 갔다.
팍!
순간 공야무의 육신이 좌측으로 날아갔다.
장정의 허리만 한 두께를 자랑하는 소나무가 있었는데, 괴수의 각질처럼 두텁고 거친 소나무의 껍질이 미세하게 뜯겨 나간 흔적이 있었다.
“결코 내 손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놈.”
* * *
묵련의 대전.
천왕은 수하들의 보고를 받으며 얼굴 가득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놈들이 예상대로 한꺼번에 몰려들 생각을 했단 말이지? 어리석은 놈들! 알면서도 피하지 못하는군. 그깟 자존심 따위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정파를 자처하는 놈들의 가장 큰 약점은 바로 명분과 자존심, 그리고 남의 이목을 지나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천왕께서 놈들의 그러한 약점을 노리신 것이 제대로 주효한 듯합니다. 다만 놈들의 세가 생각보다 강력한 것이 다소 마음에 걸립니다.”
“제아무리 끌어 모은다고 해 봤자 절대 고수의 수에서 우리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깟 머리뿐인 허수아비들쯤이야 수천수만이 있은들 무슨 걱정이겠느냐. 쓸데없는 걱정은 몸과 마음을 움츠리게 만들 뿐이다. 너희들은 본 좌에 지시대로 철저히 준비만 하면 그뿐이다.”
“만반의 준비를 끝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