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
<귀환무사 190화>
천후는 그저 담담히
군웅들 사이에서 한 인물이 불쑥 튀어나오며 마차를 막아섰다. 그런 인물의 뒤쪽에서 스물에 달하는 인물들이 따라서 모습을 나타냈다.
그들이 나타나자 왕전에게 얻어터졌던 자들이 재빨리 다가가 고자질을 했다. 그중 하나가 큰 소리로 외치며 나섰다.
“멈추어라!”
“뭐야, 저것들은 또.”
왕전이 나서려고 할 때, 혁련천후가 담담히 말했다.
“시끄럽게 하지 말고 적당히 해라.”
“예, 주공.”
대답을 하기가 무섭게 왕전은 앞을 막아선 자의 멱살을 잡아 저만치 던져 버렸다. 가랑잎처럼 날아가더니 객잔의 벽을 뚫고 들어가 버렸다.
우지끈!
“우악!”
왕전이 그들을 향해 으름장을 놓았다.
“한 번만 더 까불면 그땐 대갈통을 뚝 떼어 줄 테다. 망할 새끼들!”
하찮은 파락호들 따위가 감당할 수 있는 왕전이 아니었다.
그때였다.
“아미타불! 백주에 이 무슨 행패인고!”
“나무관세음보살…….”
황색 승복을 걸친 승려들이 장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홉 개의 계인을 이마에 찍은 그들을 본 영호도성의 눈동자가 미미하게 흔들렸다.
그의 눈동자는 승려들의 허리춤에 고정되어 있었다.
놀랍게도 승려들은 검을 차고 있었다. 승려가 검을 차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하지만 저렇듯 대놓고 차고 다니는 경우는 없다.
무학의 본산이라는 소림의 천 년 역사에도 단 네 명밖에 없었는데, 천하는 그들을 가리켜 사대천불(四對天佛)이라 부른다.
소림 역사상 가장 강한 고수들도 인정받았던 그들은 이십 년 전, 돌연 은거에 들어가 지금껏 강호에 그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영호도성은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정녕 소림의 사대천불이란 말인가.’
영호도성도 사대천불을 본 적은 없었다. 비슷한 연배이지만 활동 시기가 달랐던 까닭에 마주친 경우가 없어서였는데, 영호도성은 그들이 사대천불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사대천불 중 누군가가 흑야를 보더니 대뜸 이렇게 말했다.
“살기가 골수에까지 미쳤도다.”
불법을 지닌 그들의 눈에 살수의 길을 걷고 있는 흑야의 기운이 곱게 느껴질 리 만무했다. 사람의 목숨을 가장 빠르고 간단하게 죽이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는 살수 본연의 특이한 기운은 심오한 불문의 정공을 익힌 소림승들에겐 상극이나 다름없다.
사대천불 정도면 당연히 깊숙이 갈무리한 기운 정도는 파악할 능력이 되었다.
흑야 또한 그 자리에 걸음을 멈추고는 승려들을 응시했다.
‘강자들이다.’
흑야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보는 순간 전신에서 찌릿찌릿 전율이 생겨났다.
본능이 전해 오는 느낌이 맞아떨어진다면 저들은 지금껏 자신이 만났던 그 누구보다 강한 고수들일 것이다.
물론 혁련천후와 혁련강은 예외다.
“놈! 냉큼 정체를 밝히거라!”
대뜸 눈을 부라리자 흑야는 어이가 없었다. 강하다고 해서 위축될 그가 아니다. 하물며 그가 가장 싫어하는 소림의 승려가 대놓고 자신을 아이처럼 대하니 눈빛에 살기가 도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것들이 미쳤나.”
왕전이 도끼눈을 하고서 앞으로 나섰다.
흑야도 사대천불을 노려보며 일부러 살기를 드러내었다. 해 볼 테면 해 보라 식이었다. 혁련천후는 뒤쪽에서 사대천불을 무심히 바라볼 뿐 어떤 반응도 비치지 않았다.
사대천불역시 혁련천후와 영호도성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아미타불! 하나같이 살기를 머금고 있다니, 시주들의 정체가 참으로 궁금하도다.”
“이봐! 헛소리 그만하고 너희들의 정체부터 밝히시지. 아니면 목탁을 부숴 버리기 전에 냉큼 꺼져!”
왕전이 살기등등하게 나서자 사대천불의 낯빛이 점점 더 노여움으로 물들어 갔다.
사실 왕전은 사대천불인지 모르고 있었지만 그들이 고수라는 것쯤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더 거칠게 나서는 건 소림사에 대한 좋지 않은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이유는 오직 왕전만이 알 뿐이지만.
무심한 눈으로 사대천불을 주시하던 혁련천후가 드디어 나섰다.
“우리에게 볼일이라도 있소?”
사대천불의 시선이 비로소 혁련천후를 향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고 했던가. 혁련천후의 전신을 빠르게 훑어본 사대천불의 눈빛이 굳어졌다.
혁련천후가 한마디 더 했다.
“살기를 운운하려거든 말을 가려서 하는 게 좋을 거요. 내가 보기엔 당신들도 다 살기를 지녔으니까.”
“그대 역시 살기를 지녔구나. 허면 모두가 다 사파의 악도들인가?”
“그저 살기를 지닌 것만으로 사파를 운운하다니, 그렇다면 지금 당신들도 살기를 품고 있으니 사파의 무리들로 보면 되겠군. 그럼 똑같은 입장이 되는 건가.”
“교활한 말재주를 지녔도다.”
“난 적어도 당신들처럼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사람을 판단하진 않는다. 감히 무슨 자격으로 저 친구를 해하겠다는 건지 나를 납득시킨다면 없었던 일로 해 주겠다.”
혁련천후는 이미 사대천불과 한바탕 싸울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과거 천하에 쫓겨 생사를 넘나들 때, 가장 앞장서서 자신을 죽이려 했던 곳이 소림사였다. 가뜩이나 과거의 감정이 좋지 않은데 살기를 운운하며 해하니 마니를 거론하니 심정이 뒤틀려 버린 것이었다.
“갈!”
가장 장대한 체구를 지닌 승려가 사자후를 터트리며 검에 손을 가져갔다.
“땡중 새끼. 그 검을 뽑으면 다시는 부처님께 염불을 외지 못하게 해 주지.”
왕전이 대도에 손을 가져가며 사납게 외쳤다.
“뭣이라!”
순간 주변이 싸늘한 기운으로 요동쳤다. 더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영호도성이 앞으로 나섰다.
“영호세가의 도성이라고 합니다. 혹시 대사들께선 소림의 사대천불이 아니신지요?”
그가 나서자 승려들의 고개가 일제히 그에게 돌아갔다.
도성이라는 이름에 그들의 눈동자가 가볍게 흔들렸다. 천하에 누가 그 이름 앞에 놀라지 않겠는가. 비록 자신들보다 배분이 아래라고는 하지만 오성의 최강자가 영호도성이다.
“십전무제, 영호 시주셨구려. 빈승들은 무제께서 말씀하신 그 사대천불이 맞소이다. 한데 무제께선 저들과 일행이셨소?
“제 혈육과 같은 사람들이지요. 다소 오해가 있은 듯합니다만…….”
영호도성이 그렇게 나오자 사대천불이 서로를 쳐다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정파의 상징과도 같은 오성과 일행인 사람들과 다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선뜻 물러나기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불법을 수행하는 수련승과는 달리 그들은 철저한 무승들이어서 승려보다는 강호인에 가깝다고 봐야 했다.
힘을 숭상하는 강호인들은 스스로 물러서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데, 그러한 강호인들의 습성이 사대천불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사대천불의 속내를 짐작한 영호도성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저들은 신마성의 사람들입니다. 비록 익힌 무공이 정공이 아니어서 자칫 살기로 비칠 수도 있으니 천불들께선 부디 오해를 푸시기 바랍니다.”
“신마성!”
사대천불이 일제히 크게 놀랐다.
비록 세상에서 그 모습을 감추고 은거했던 그들이지만 신마성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 왔던 터였다. 당대 최강이라 불리는 일존에 버금가는 신마성주와 그를 추종하는 오왕과 그 외의 고수들에 대한 소문은 더 이상 소문이 아닌 살아 있는 신화로 떠오르고 있었다.
하물며 중원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사련과 용성이 그들에 의해 무너지지 않았던가.
영호도성은 사대천불이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고 있음을 간파하고는 재빨리 혁련천후를 향해 돌아섰다.
“성주! 이분들은 소림의 전 전대 사대천불이시오. 하니 부디 노여움을 가라앉히도록 하시오.”
영호도성은 일부러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그가 그렇게 나오자 혁련천후도 속으로는 살짝 당황했다.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이 기세를 누그러뜨려야 한다.
“혁련천후라고 하오.”
짤막하게 인사를 건넸다.
사대천불의 신분이 밝혀졌음을 감안하면 무례하다고 볼 수도 있었지만 전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그의 행동이나 분위기는 지극히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광불이라고 하오. 아미타불.”
“혈불이외다.”
넷이 차례로 자신의 승명을 밝혔다.
사대천불의 무게감을 감안하면 파격적인 태도였지만 결코 비굴해 보이지도 않았다.
혁련천후의 눈동자에 가벼운 경탄의 빛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저 정도 명성에다 배분이면 이렇듯 쉽사리 태도를 바꾸기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하물며 싸우기 직전까지 갔던 상황이 아닌가.
영호도성이 비로소 안도의 숨을 쉬었다.
“천불들께서는 어디로 가시는 길이신지요?”
“허허허, 흉흉한 소문이 돌기에 산문을 내려왔다오. 허면 시주들께서는 저곳에 대한 소문을 듣지 못하셨소이까?”
사대천불의 맏이, 광불(狂佛)이 손을 들어 산의 정상 부근을 가리키며 말했다. 모두의 시선이 광불이 가리킨 방향으로 돌아갔다. 순간 모두가 놀란 빛을 보였다.
광불이 가리킨 곳은 화산과 밀접한 지역에 솟아 있는 제법 높은 산이었는데, 그곳에 엄청나게 큰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
“저게 뭐야?”
영호수란의 눈이 동그래졌다.
광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곳을 살피던 사문의 제자 하나가 전하기를 수천에 달하는 무림인들이 속속 모여든다고 했소이다. 그중에는 측정이 불가할 정도의 고수들도 여럿 있다고 하는데, 정공을 익힌 자들은 아닌 것 같다고 하더이다. 해서 사실인지 확인을 해 볼 요량으로 산문을 내려왔소이다.”
혁련천후는 광불의 말을 들으며 의구심을 금치 못했다.
‘그 정도 대규모 인원이 움직이는데, 정도맹은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알았다면 자신들에게도 정보가 들어왔어야 했다.
불과 얼마 전에 육승이 다녀갔지 않은가.
“허면 이 늙은이들은 그만 가 봐야겠소. 다들 가는 길에 무사하시기 바라겠소. 아미타불.”
사대천불이 산을 향해 움직이자 모두는 그 자리에서 산을 응시했다.
혁련천후는 산정상의 건물을 응시하며 슬쩍 미간을 좁혔다. 당장에 떠오른 것은 묵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어쩌면 놈들일지도 모르겠군.’
그때 영호도성이 다가왔다.
“잘 참았네. 원래 저분들이 사마의 무리들이라면 치를 떠는 분들이어서 다소 섣부르게 오해를 했던 모양이네.”
혁련천후는 그저 담담히 웃었다.
“빨리 가요.”
영호수란의 재촉에 모두는 마차에 올라 이동을 재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