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
<귀환무사 189화>
쐐액!
비록 혁련강이 두려워 도주하던 그였지만 그 또한 결코 만만치 않은 절대 고수이다. 당연히 검강은 빨랐고 그 파괴력 또한 대단했다.
그러나 혁련강은 검강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쳤다. 그러자 손유의 검강이 연기처럼 소멸되어 흩어졌다.
손유의 절망감이 골수에까지 미치는 순간이었다.
혁련강은 주저 않고 손유를 향해 천살강기를 발출했다.
“내세에는 부디 좋은 인간으로 환생하거라!”
손유는 자신의 목을 향해 날아드는 천살강기를 보고서도 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피할 수도, 피하고 싶지도 않았다.
퍽!
잘린 머리가 솟구쳐 올랐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부릅뜬 두 눈은 현실을 부정하려는 듯 붉게 충혈이 되어 있었다.
주인을 잃어버린 몸뚱이가 몇 번을 펄떡거리다가 축 늘어졌다.
한때 천하를 공포로 몰아갔던 손유는 이렇게 그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손유의 시신 옆으로 혁련강과 주치를 비롯한 용성의 고수들이 떨어져 내렸다.
주치를 비롯한 모두는 망연자실 넋을 놓았다. 주치의 붉게 충혈이 된 눈이 혁련강을 향해 돌아갔다.
“함께 지옥으로 가자꾸나! 이노옴!”
“으아아!”
다른 자들도 괴성을 지르며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혁련강은 피하지 않고 오히려 정면으로 뛰어들었다. 이미 그의 주변은 광포한 천살강기로 난무하고 있었다.
“크아아아!”
도륙이 시작되었다. 혁련강에게는 아직 남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용성이 손을 잡고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묵련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도륙에 가까운 격돌은 반 시진 동안 이어졌다. 무참히 죽어가는 동료들을 보면서도 용성의 고수들은 누구 하나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게 모두가 다 죽고 오직 주치만이 남았을 때, 혁련강은 비로소 천살강기를 거두었다. 검을 쥔 오른팔을 잃은 주치는 원독에 찬 표정으로 혁련강을 노려보았다.
“너희와 손을 잡은 놈들에 대해서 털어놓거라. 이놈!”
“죽어 지옥에서 네놈을 기다리고 있겠다. 일존…….”
저주를 퍼부은 주치가 돌연 피를 토하며 꼬꾸라졌다.
순간, 혁련강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주치는 독단을 깨물고 자결을 택한 것이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혁련강은 한동안 주치의 주검을 내려다보다가 힘없이 돌아섰다.
그런 그의 몸에서 피가 흘렀다.
천하의 일존도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임을 나타내는 순간이었다.
* * *
혁련강에 의해 용성의 마지막 불꽃마저 꺼져 버린 날, 혁련천후와 일행들은 영호세가를 나서 신마성을 향한 귀환길에 올랐다.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마차에 몸을 실은 영호수란의 분위기는 확연히 전과 달라져 있었다. 항상 쾌활하며 밝았던 그녀였지만 어딘가 모르게 우울함이 공존했었던 그녀였다.
그러나 지금은 밝지도, 쾌활하지도 않았다.
평온함. 마치 세상에 걱정이 없는 듯한 평온함만이 그녀에게서 느껴졌다. 혁련천후의 사랑을 얻어서가 아니겠는가.
그녀는 마차의 앞쪽에서 말을 몰아가는 혁련천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살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이 순간 그녀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여겼다.
그때 마차의 우측을 호위하며 이동하던 왕전이 말을 몰아 마차에 바짝 다가왔다.
“작은 주모! 배고프지 않소?”
화끈!
왕전의 그와 같은 말에 영호수란의 얼굴이 이내 붉어졌다. 전이었다면 냅다 되받아쳤을 그녀지만 지금은 전혀 그러지 못했다.
그것도 변화의 하나였다. 뒤이어 진천이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거든다.
“작은 주모! 기념으로 거나하게 한턱 쏘는 게 어떨지…….”
“명만 내리면 술집은 내가 찾을 수 있는데.”
흑야마저 거들고 나서자 영호수란의 표정이 짐짓 매섭게 변했다.
“자꾸 장난칠 거예요?”
“이렇게 되는 데 이 몸의 공이 결코 작지 않음을 잊어선 곤란한데…….”
“내 공도 적지 않지요.”
“허허허!”
마차 안에서 영호도성의 웃음이 흘러나왔다.
어쩌면 영호수란 못지않게 기분이 좋을 그였다. 자신이 생명처럼 여겼던 손녀가 천하에서 가장 훌륭한 배필을 얻었으니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그때 혁련천후가 한마디 했다.
“속도를 높여라.”
“예!”
두두두!
일행은 상당한 속도로 관도의 옆으로 펼쳐진 평원을 질주했다. 겨울이라 벼를 모두 베어 버린 탓에 그들의 질주는 거침이 없었다.
그 속도로 한 시진을 달린 그들은 어느덧 섬서성의 경계가 보이기 시작하자 다소 속도를 늦추었다.
평원이 끝나며 숲이 나타났다.
말이라면 상관이 없었지만 마차 때문에 일행은 사람들이 다니는 관도로 올라섰다.
해가 하늘의 가운데 걸린 시각이라 오가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당연히 속도는 더욱 느려졌다.
영호수란이 혁련천후의 등을 보며 소리쳤다.
“배고파요.”
잠시 다른 생각에 잠겼던 혁련천후는 그 소리에 아차 했다. 그만 영호도성을 깜빡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호세가를 나온 지 한나절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이런…….’
진천이 앞으로 말을 몰며 나섰다.
“객잔에 들르겠습니다.”
혁련천후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진천이 방향을 우측으로 틀었다.
잠시 후, 진천이 돌아와 일행을 객잔으로 안내했다. 거리 전체가 객잔으로 늘어선 고을은 상당한 인파로 북적였다. 추운 한겨울임에도 객잔이나 거리 할 것 없이 사람들로 넘쳐 났다.
“촌구석에 웬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거지?”
왕전이 주변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고을의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사람들의 숫자가 많았다.
게다가 대부분이 칼이나 병기를 두른 강호인들로 보였다. 의아함을 보였던 일행은 이내 진천이 안내한 객잔으로 들어섰다.
초대형 만두 전문이라는 커다란 편액이 걸린 객잔이었는데, 그곳은 인근에서 가장 규모가 컸으며 시설도 무척이나 깨끗했다.
자리에 앉아 주변을 돌아보던 영호수란이 눈을 반짝거렸다.
“저 아저씨 부자가 다 되었네?”
객잔의 입구에 놓인 계산대에 앉은 뚱뚱한 주인은 지난날 청진이 주문했던 초대형 만두를 최초로 만들었던 그 왕팔이었다.
기름진 얼굴에 제법 값비싼 비단으로 몸을 두른 왕팔은 누가 봐도 전형적인 갑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머금은 채 끊임없이 드나드는 고객들을 접대하느라 왕팔은 정신이 없어 보였다.
혁련천후는 잠시 과거를 떠올리고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떠올렸다.
화산의 제자들과 영호수란, 그리고 모용단승과 탁철이 함께했던 그날이 생생하게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제법 긴 시간이 흘렀군.’
그때 자신은 천하에 대한 복수심으로 불타오를 때였다. 만약 화산의 제자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자신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어쩌면 복수에 몸부림치며 반쯤 살인마가 되어 있을 것이다.
“오! 이게 누구십니까?”
전신을 땀으로 목욕한 왕팔이 그 육중한 몸을 들썩이며 다가왔다.
덕분에 주변 공기마저 후덥지근하게 느껴졌다.
왕팔은 혁련천후를 향해 넙죽 허리를 굽혔다. 자신을 갑부로 만들어 준 은인을 그가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화답한 혁련천후를 향해 왕팔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오늘 귀한 분께서 오셨으니 음식 값은 받지 않겠습니다. 무엇이든 마음껏 주문하십시오. 아, 물론 술은 본 객잔의 최고급으로 모시겠습니다! 아하하!”
왕전과 진천의 입이 길게 찢어졌다.
잠시 후, 초대형 만두를 비롯한 각종 요리들이 산더미처럼 탁자에 놓였다. 혁련천후 때문에 왕팔이 손수 요리한 것이라 그 향기부터가 달랐다.
식사를 하던 왕전이 저잣거리를 살펴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코딱지만 한 고을에 사람들이 뭐가 이렇게 많아.”
“그러게요.”
“게다가 대부분이 무림인이다. 제법 강한 자들도 많고…… 뭔가 이상한 냄새가 나는데.”
흑야가 혼잣말을 하듯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혁련천후와 영호도성도 그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영호도성이 혁련천후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의도적으로 기운을 감추려고 애쓰는 자들이 많은 데다가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자들도 더러 있네. 만약 저들이 하나의 세력이라면 상당한 전력으로 볼 수 있지 않겠나.”
“그렇습니다.”
“놀랍군. 이처럼 작은 고을에 저만한 고수들이 득실거리다니, 이건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이 분명하겠지. 더욱이 구대문파나 정도맹 소속으로 보이는 무사들은 하나도 없지 않은가?”
“나가서 알아 오겠습니다.”
흑야가 일어서려고 하자 혁련천후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라면 신경 쓸 필요 없다.”
일어서려던 흑야가 도로 자리에 앉았다. 정도맹이란 단어가 거슬렸던 혁련천후는 눈빛이 차갑게 변해 있었다.
영호도성이 그런 혁련천후를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도맹의 산하 문파였던 대정문과 관련해 검후가 어떠한 해를 입었는지 알고 있던 그로서는 그러한 반응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식사를 끝낸 일행은 극구 음식 값을 사양하는 왕팔에게 은자를 찔러 주고는 객잔을 빠져나왔다.
오후가 지나고 땅거미가 질 무렵이 되었음에도 거리는 사람들로 여전히 북적거렸다.
객잔의 마방으로 걸음을 옮기던 일행은 마차 주변을 둘러싸고 선 무리들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험상궂은 인상들을 한 무리들은 마차 주변을 서성거리며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왕전의 눈썹이 대뜸 위로 올라갔다.
“이것들이.”
인상으로만 따진다면 왕전보다 결코 못하지 않은 자들이었다. 그들 중, 얼굴에 흉측한 흉터를 지닌 장한이 성큼 앞으로 나오며 왕전의 위아래를 기분 나쁜 눈초리로 노려보더니 되레 눈을 부라리며 왕전을 위협했다.
“뭐야! 이 새끼는?”
당연히 가만히 있을 왕전이 아니다.
퍽! 퍽!
그저 가볍게 친 주먹에 장한들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저만치 날아가 떨어졌다.
“줄줄이 사고가 터지더니, 이제는 별 이상한 놈들이 다 까불고 설치네.”
영호수란이 곱게 미간을 찡그리며 왕전에게 물었다.
“죽였어요?”
“내가 무슨 살인마요?”
“아니면 됐구요. 난 또 죽인 줄 알았잖아요.”
마차가 막 출발하려고 움직일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