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
<귀환무사 188화>
제5장 사대천불과의 만남
강을 통해 모처로 이동하던 용성의 주인 손유는 난데없이 쏟아진 폭우로 인해 강물이 거칠게 변하자 배를 버리고 육로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도중에 흩어졌던 수하들이 속속들이 합류하면서 그 수가 백여 명에 이르자 천왕에게로 가고자 했던 생각을 바꾸어 자신들만이 기거할 수 있는 은신처를 마련하기로 결심했다.
용성의 사대장로 중 하나인 주치가 손유에게 ‘어차피 세력이 약해진 상태에서 천왕을 찾아간다면 자칫 수모를 당할 수도 있으니 그럴 바에야 적당한 곳에 은신하여 시간을 두고 세력을 키운 다음, 신마성에 복수를 하는 편이 좋겠습니다’라고 건의한 것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천왕에게 일방적으로 끌려 다닐 것을 우려하고 있었던 손유로서는 당연히 주치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백여 명에 달하는 무리가 은밀하게 기거할 은신처를 구하는 것은 그리 쉽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산중에 숨어 지내자니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고, 장원을 구입하자니 그 정도 크기의 장원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자금도 마땅치 않았다. 급하게 쫓겨 오느라 가진 황금을 죄다 잃어버린 탓이었다.
방법은 소규모 무파를 찾아가 힘으로 제압하여 근거지를 빼앗는 것이었는데, 대상을 물색하던 그는 송가장이라는 작은 무파를 발견하고는 그곳을 근거지로 삼기로 결심했다.
혹시라도 소문이 날 것을 우려한 손유는 주변에서 기회를 엿보다가 찾아오는 객들이 없는 날을 골라 송가장으로 들어섰다.
송가장은 생각보다 더 초라했다.
무파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보잘것없었던 송가장은 규모만큼은 백여 명을 수용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난데없이 매서운 기운을 지닌 무림인들이 떼로 나타나자 송가장의 모두가 두려움에 떨었다.
“어, 어디서 오신 분들이오?”
평범한 용모를 지닌 중년인이 잔뜩 긴장한 기색으로 물었다.
그 옆에는 검과 창을 든 무사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하나같이 굳은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주치가 나섰다.
“운이 없다고 여겨라.”
스르릉!
주치가 검을 뽑자 다른 자들도 일제히 검을 뽑았다. 송가장의 무사들은 주변을 몰아치는 기운조차 이기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벌써 반수 이상이 바닥으로 쓰러지며 피를 게워 내는 무사들도 있었다. 상대의 기운만으로 내상을 입은 것이었다.
손유가 주치에게 눈짓을 보냈다. 서두르라는 눈빛을 본 주치가 송가장의 무사들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이었다.
“멈춰!”
날카로운 교성과 함께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미녀가 장내로 떨어져 내렸다.
허리까지 늘어뜨린 머릿결이 유달리 윤기가 흐르는 미녀는 바로 송가장의 장녀, 송영이었다.
신마성에서 수련을 하던 그녀는 며칠 전에 송가장에 돌아와 있었는데, 부친의 생신이 얼마 남지 않았던 까닭이다. 거처에서 밖으로 나서다가 상황을 목도하고는 참지 못하고 나선 것이었다.
“영아! 뒤로 물러서거라!”
중년인이 황급히 송영을 보며 손짓을 했다.
그가 바로 송가장의 장주이자 송영의 부친이었다. 그러나 송영은 물러서지 않고 되레 단호한 어조로 외쳤다.
“백주대낮에 이런 짓들을 하다니, 하늘이 두렵지 않느냐?”
“계집이 제법이구나, 후후후.”
“흥! 우리를 해치면 신마성이 당신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뭣이! 신마성!”
손유를 비롯한 모두의 표정이 급변했다. 신마성을 이용하여 이들을 물리치려 했던 송영은 내심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그건 명백한 착각이었다.
삽시간에 주변에 살기가 몰아쳤다.
신마성이라는 이름에 손유가 직접 나섰다.
“신마성과 무슨 관계인지 털어 놓거라!”
순간 송영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는 낯빛이 창백하게 변해 갔다. 손유가 검을 들어 송영의 목을 겨누려할 때였다.
“멈추지 못할까!”
손유를 비롯한 용성의 모든 인물들이 뒤로 돌아섰다. 송가장의 정문으로 들어서는 인물을 발견하고는 모두가 두 눈을 부릅떴다.
혁련강이었다.
“억!”
손유의 입에서 기괴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런 그를 응시하는 혁련강의 두 눈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살려 둬선 아니 될 종자들이로고.”
“놈을 막아라! 어서!”
주치의 명령이 떨어지자 용성의 고수들이 재빨리 손유의 앞에 장벽을 만들었다. 손유는 혁련강을 보며 불신에 눈빛을 떨어 댔다.
완벽하게 따돌렸다고 여겼는데 기어코 맞닥뜨리다니.
“지금껏 네놈들의 목적지가 궁금해서 지금껏 살려 두었다만 어쩔 수 없이 오늘 이곳에서 모두 죽어야겠다.”
스르릉!
혁련강이 검을 뽑아 들었다. 송영은 혁련강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늘같은 신마성주가 유일하게 허리를 굽히는 존재, 어쩌면 신마성주보다 더 강할 것이라 여겨지는 혁련강이라면 악도들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송가장을 지켜 줄 수 있을 거라 여겼다.
혁련강이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사람들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거라.”
“예.”
송영이 재빨리 사람들을 데리고 장원 안쪽으로 모습을 감추자 혁련강은 느릿하게 돌아섰다. 손유는 도저히 그와 싸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저 검 하나 달랑 들고 섰을 뿐이지만 움직이는 그 순간, 전신이 난도질당할 것만 같은 기분에 공격 명령조차 나오지 않았다.
“너희들과 손을 잡은 놈들의 근거지만 털어놓는다면 그대의 목숨만 취하는 것으로 끝내 주겠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닥쳐라!”
주치가 발끈하며 손유의 앞을 막아섰다. 혁련강은 주치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여기서 몰살을 당할 테냐, 아니면 그대 하나의 죽음으로 후일을 도모할 기회를 얻을 것이냐. 결과는 오직 그대의 판단에 달렸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주치가 손유를 돌아보며 비장한 각오를 드러내었다.
“성주! 저자는 우리가 막겠습니다. 하오니 어서 자리를 피하십시오!”
“그렇습니다. 서둘러 자리를 피하십시오! 성주!”
다른 장로도 주치를 거들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손유는 말없이 혁련강을 응시했다.
그런 그의 두 눈에 뜻밖에도 고뇌의 빛이 잔뜩 어려 있었다.
“놈을 쳐라!”
주치가 벼락같이 혁련강을 덮쳤다.
느닷없는 상황에 놀란 사람은 혁련강이 아니라 손유였다.
주치의 검이 몸에 닿으려는 순간까지도 혁련강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세상에 베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검강이 혁련강의 피부까지 닿으려는 순간, 공간이 일렁거리며 그 자리에서 혁련강의 신형이 모습을 감추었다.
주치의 검은 허공을 베고 말았다.
그때 공간 속에서 검이 불쑥 튀어나왔다. 주치가 기겁을 하며 뒤로 몸을 뺐다. 한데 검은 그가 아닌 다른 자의 가슴을 꿰뚫었다.
퍽!
“억!”
답답한 신음과 함께 누군가의 육신이 피를 뿌리며 허공을 날아 저만치로 날아갔다.
뜻밖에도 손유의 옆을 지키던 장로라는 자였다. 심장을 관통당한 그는 그대로 숨이 끊어졌다.
주치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이…….”
혁련강은 다른 상대를 공격함으로서 철저히 그를 무시한 것이었다.
혁련강은 손유를 향해 싸늘히 경고했다.
“다시 한 번 말하겠다. 너 하나로 끝내겠느냐, 아니면 모두 다 지옥으로 가겠느냐!”
손유는 여전히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들 모두가 덤벼도 혁련강을 어쩌지 못한다는 것을 이미 깨닫고 있었다.
장로들이 더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이미 대부분은 신마성주와 눈앞의 혁련강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그나마 주치가 남아 있었지만 그로서는 역부족이다.
“성주! 어서 자리를 피하십시오! 성주가 아니면 용성의 재기는 없습니다. 놈의 발을 묶겠으니 어서 떠나십시오!”
주치가 검을 고쳐 잡으며 비장하게 외쳤다.
손유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는 붉게 충혈이 된 눈으로 혁련강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그대들의 복수는 반드시 이 손유가 해 주겠다.”
“역시, 네놈은 어쩔 수 없는 악인이었구나. 수하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홀로 살자고 하다니…….”
혁련강의 전신에서 광포한 기운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손유가 그런 혁련강을 향해 저주 어린 음성으로 외쳤다.
“내 반드시 돌아와 너희 신마성을 갈기갈기 찢어 놓고야 말 것이다!”
팍!
손유가 바닥을 차고 오르더니 송가장의 지붕을 타고 올라갔다.
동시에 주치를 비롯한 모든 용성의 고수들이 혁련강을 덮쳤다. 하지만 그들보다 혁련강의 움직임이 더욱 빨랐다.
“어림없다, 이놈!”
혁련강이 빛살 같은 속도로 손유를 쫓았다. 동시에 그가 섰던 곳에 강기가 떨어지며 흙먼지가 자욱하게 치솟았다.
“놈을 쫓아라! 어서!”
용성의 고수들이 죄다 지붕을 넘어 장원을 빠져나가자 안으로 피신했던 송가장의 사람들이 그제야 밖으로 나왔다.
“저분이 신마성의 노주가 되시는 분이더냐?”
“예, 아버님! 천하에 적수가 없다는 분이 저분이십니다.”
대답하는 송영의 얼굴엔 뿌듯한 자부심마저 떠올라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신마성과 함께한다는 것이 이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 * *
손유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제아무리 일존이라도 그 하나에 쫓기는 자신의 처지가 이토록 원통할 수가 없었다. 더불어 신마성에 대한 증오심이 더욱더 커졌다.
전력으로 도주하던 손유는 점점 가까워지는 강력한 기운을 느끼고는 뒤를 돌아봤다.
엄청난 속도로 자신을 추격해 오는 혁련강, 그의 노한 눈동자와 부딪히자 손유는 오금에 풀어지며 속도가 무뎌졌다.
‘하늘이 기어코 나를 버리는구나.’
손유는 절망했다.
이 정도 거리면 죽었다 깨어나도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하늘을 원망한 손유는 도주가 무의미함을 깨닫고는 벼락같이 몸을 돌려 검강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