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무사-187화 (185/425)

# 187

<귀환무사 187화>

* * *

영호수란은 무사했다.

하늘이 도왔는지 색을 밥보다 밝힌다는 부상막의 살수들에게 사로잡혔음에도 아무런 치욕을 당하지 않았다.

모두는 영호세가로 향했다. 우연하게도 그녀를 구한 곳에서 머지않은 곳에 영호세가가 있었던 까닭이었다. 혁련천후는 왕전과 진천, 그리고 흑야만 남겨 두고 조윤과 북궁천소는 신마성으로 먼저 보냈다.

영호세가에 때 아닌 잔치가 벌어졌다.

영호수란의 납치 소식을 전해 듣지 못한 까닭에 그저 귀한 손님들이 찾아온 것으로만 여겼다.

왕전은 눈앞의 음식들을 쳐다보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진천도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은 표정이다. 오직 혁련천후와 흑야, 둘만이 담담할 뿐이다.

“모처럼 배터지게 포식하게 생겼습니다. 흐흐!”

“많이들 드시게.”

영호도성이 웃으며 젓가락을 집자 혁련천후도 젓가락을 집었다. 영호수란이 왕전에게 요리와 술병을 내밀며 말했다.

“산적 아저씨! 이 술은 어머니께서 정말 아끼시는 거거든요. 신세진 거, 이걸로 계산 끝이에요. 알았죠?”

“내가 조금 손해를 보는 것 같기는 하지만 이 정도면 뭐…….”

왕전의 너스레에 모두가 웃었다.

영호수란은 혁련천후를 힐끗 돌아보았다. 무심하게도 그는 술잔만 기울이고 있었다. 입술을 삐죽거린 그녀는 이내 활짝 웃으며 젓가락을 들었다.

“저 애가 대부분 손수 만든 거랍니다. 그러니 어서들 드시지요.”

사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중년 미부가 안으로 들어섰다.

온화함과 우아함이 돋보이는 그녀는 바로 영호세가의 안주인이자 영호수란의 생모였다. 그 옆에 한 마리 호랑이를 연상시키는 중년인과 훤칠하게 생긴 청년이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영호수란의 부친과 오라버니가 되는 대공자 영호진이었다.

영호진은 다소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당대 천하를 떨어 울리는 신마성주가 세가를 찾았다는 것은 나라로 치면 황제의 방문과도 동격이라 할 수 있다.

적어도 그들을 흠모하는 영호진에게는 그랬다.

게다가 오왕의 둘이 그와 함께 왔으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환영무객(幻影武客)이라는 무림명이 생겨 버린 진천까지 왔으니 영호진의 놀람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물론 영호세가의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제가 한잔 올리겠습니다!”

영호진이 벌떡 일어나더니 술병을 들고 혁련천후에게로 다가왔다.

지난날, 용성과의 전쟁에서 이미 대면했던 그들이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 영호진이 그를 대하는 태도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였다.

그저 신비에 가려 있었던 그때와 달리 지금의 혁련천후는 그 위상을 감히 논할 수 없을 정도로 바뀌었지 않은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는 계속되었다.

“이것 좀 드세요.”

영호수란이 혁련천후에게 요리가 담긴 접시를 건네며 그의 옆에 바싹 붙어 앉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그녀의 생모가 놀란 눈으로 영호가주를 돌아보았다.

[저 아이가 왜 저러는 걸까요?]

[허어! 저놈이 제대로 사고를 친 모양이오.]

연륜에서 바라보는 시각은 정확한 법이다.

둘은 자신의 딸이 혁련천후를 대하는 감정이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둘은 결코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영호세가에서 직접 담근 술맛은 꽤나 좋았다.

뒤끝이 깨끗한 것이 시중에서 꽤 비싸게 판매되는 금존청은 저리 가라였다. 혁련천후도 모처럼 어지러운 마음을 씻어 내릴 요량으로 제법 많은 양의 술을 마셨다.

그 옆에서 연신 조잘거리는 영호수란의 얼굴은 잘 익은 복숭아처럼 발그레 변해 있었는데, 그 자태가 사내의 애간장을 녹이고도 남음이 있었다.

“한잔 더 해요.”

조금은 혀가 꼬인 음성으로 술잔을 드는 영호수란, 평소 같았으면 꽤나 혼이 나고도 남았을 터이지만 오늘은 어쩐 일인지 그녀의 부모들도 가만히 있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르자 슬그머니 자리까지 피해 주었다.

대략 한 시진이 흘렀을까, 제법 넓은 영호세가의 식당엔 혁련천후와 영호수란만이 남게 되었다.

어지러운 마음을 달래고자 내공을 푼 상태에서 꽤 많은 술을 마신 혁련천후는 제법 취한 상태였다.

사람들이 슬그머니 나가 버린 것도 모르고 있었다.

털썩!

영호수란이 드디어 탁자에 머리를 찧으며 쓰러졌다.

“나는 당신이 좋아, 무척 좋단 말이야. 그런데, 왜 나를 싫어해…… 딸꾹!”

인사불성이 따로 없었다.

제대로 꼬여 버린 혀는 앵두처럼 붉은 입술을 비집고 연신 뭔가를 중얼거렸다. 대부분이 혁련천후에 대한 사랑과 그에 못지않은 불만이었다.

혁련천후는 그저 묵묵히 술잔만 기울였다.

“쳇! 딸꾹! 언니는 나를 무척 좋아해 주는데, 대체 당신은 왜 그러는 거냐고. 나쁜 놈.”

그 말을 끝으로 영호수란은 더 이상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못했다.

술이 취해 쓰러졌는데 하필이면 혁련천후의 품속으로 안겨 들었다. 혁련천후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고는 느릿하게 일어섰다.

영호수란의 백옥 같은 손가락이 뭔가를 잡기 위해 꼬물거리고 있었다.

꿈이라도 꾸는 것일까. 혁련천후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는 잠시 영호수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을 향한 그녀의 마음이 어떠한 것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더 냉랭하게 대했던 적도 있었다.

독고혜가 있는 자리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아직은 아니다. 하나 시간이 지나면…….”

혁련천후는 뒷말을 다 잇지 못하고는 영호수란을 안고 일어섰다.

무의식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영호수란의 팔이 그의 목을 감쌌다. 독한 주향과 향긋한 사향이 뒤섞여 그의 후각을 자극했다.

휘청!

몇 걸음 걸어가던 혁련천후가 한차례 휘청거렸다. 잠시 사라졌던 술기운이 맹렬하게 치솟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내공을 끌어 올리지 않았다.

그냥 혼탁한 지금의 정신을 즐기고자 했다.

발로 차서 문을 연 혁련천후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디가 그녀의 거처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당연했다. 처음 왔으니 아는 게 더 이상한 법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그때 우측의 끝부분에 제법 정갈하게 지어진 작은 건물이 있었다.

건물의 외벽을 꾸미고 있는 장식물이 여성스러움의 극치를 달리고 있음을 본 그는 그곳이 영호수란의 거처라 여기고 무작정 그곳으로 걸었다.

둘이 사라졌을 때 진천과 흑야, 왕전이 유령처럼 나타났다. 셋은 서로를 쳐다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주고받았다.

“이러다가 주모님께 깨지는 건 아니겠지.”

“주모님도 바라고 계실 겁니다.”

“주모님이 무슨 부처님이라도 되냐.”

“형님들은 모릅니다. 주모님이 얼마나 자비로운 분이신지…….”

“하여간에 잘못되면 넌 내 손에 뒈진다.”

* * *

뾰르릉!

종류를 모를 온갖 새들이 아침을 재촉하며 울어 댔다. 창을 통해 스며드는 아침 햇살이 오늘따라 유달리 눈부셨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혁련천후는 눈을 떴다. 몸을 일으키자 두통이 밀려왔다. 폭주의 후유증이 이토록 심할 줄이야. 뒤늦게 내공을 풀고 술을 마신 것을 후회했다.

그는 침상에서 내려서기 위해 돌아앉았다. 그러다가 화들짝 놀라며 팔을 들어 올렸다.

물컹!

“……!”

세상모르고 잠든 영호수란이 눈에 들어온다.

살짝 헤쳐진 이불 사이로 백옥 같은 그녀의 살결이 비쳤다. 크게 놀란 혁련천후는 황급히 지난밤을 떠올렸지만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때 무엇인가를 본 그가 더욱 당황한 기색을 보인다.

“이건…….”

하얀 침구에 피어난 한 떨기 앵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사내는 세상에 없다.

잠시 그는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영호수란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았다.

“주공! 일어나셨습니까?”

왕전의 음성이다. 정신이 돌아온 혁련천후가 황급히 옷을 걸치며 대답했다.

“무슨 일이냐?”

“식사하셔야지요. 벌써 해가 중천에 떴습니다.”

“곧 간다고 전해라.”

“천천히 오십시오, 흐흐!”

왕전의 말투가 평소와 조금 달랐다.

난감함에 혁련천후는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다른 이도 아닌 영호세가의 안방에서 영호수란과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영호도성을 비롯한 영호세가의 사람들을 어찌 볼 텐가.

그때 영호수란이 부스스 눈을 떴다. 그러다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혁련천후를 발견하고는 이내 눈이 토끼처럼 커졌다.

“어머!”

뒤이어 자신이 알몸인 것을 깨닫고는 두 눈은 더 커졌다.

혁련천후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태어나서 이렇듯 난감한 상황은 처음이다.

둘 사이에 아주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침묵은 영호수란이 깼다.

“우리…… 사고 쳤나요?”

그녀다운 물음이다.

혁련천후는 대답하지 못했다. 영호수란의 얼굴조차 마주 보지 못하고서 시선을 피했다.

영호수란의 표정이 돌연 처연하게 변해 갔다. 뒤이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술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면 우리…… 비밀로 해요. 나 혼자만 간직하고 살면 돼요. 그러니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마세요.”

“…….”

또르륵!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렀다.

혁련천후는 침상에서 내려섰다. 그는 말없이 문으로 걸어갔다. 눈물을 흘려 내는 영호수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혁련천후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느릿하게 돌아섰다.

“언제나 내겐 그녀뿐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다.”

영호수란의 어깨가 가늘게 흔들렸다. 눈물의 양이 급격하게 많아졌다.

“내 생명이라 여겼던 그녀다. 그녀가 죽으면 나도 죽을 거란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항상 그랬지만 그녀는 나의 또 다른 심장이다.”

영호수란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박히는 말이었다. 말이 이어졌다.

“어쩌면 심장이 두 개가 되는 괴물이 될지도 모르겠다.”

파르르…….

눈물을 흘리던 영호수란의 두 눈이 급격히 흔들렸다.

“내가 걸어갈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 너도 알 것이다. 어쩌면 그 길은 지금까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지옥을 향하는 길이 될 수도 있다. 그래도 나와 함께하겠느냐.”

끄덕끄덕!

영호수란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커다란 두 눈이 슬픔에서 기쁨으로, 주체할 수 없는 환희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앞으로 너를 사랑해 보도록 노력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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