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무사-186화 (184/425)

# 186

<귀환무사 186화>

부상막에서의 서열은 강자와 살아남은 자의 전유물이다. 높은 자가 자격이 없다고 판단되면 누구든 그를 죽일 권리를 지니고 있었으며, 자신도 그런 방법으로 이 자리까지 오른 것이다.

친형제라도 그건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다. 풍신수랑, 그 역시도 친형을 베고 이 자리에 올랐으니까.

‘빌어먹을…….’

풍신수랑도 더는 어쩔 수가 없었다. 일단은 수하들의 날카로운 신경을 만져 줘야 했다. 아니면 자신이 죽을 수도 있으니까.

“좋다! 너희들 말대로 하겠다. 단, 섬서를 벗어난 뒤에 그렇게 하도록 하자. 되었느냐?”

“좋습니다! 섬서를 벗어나면 계집부터 아이들에게 건네주십시오.”

“뭣이!”

“저 아이들은 모든 게 그 계집 때문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분노를 달랠 길은 그것뿐입니다. 대형!”

풍신수랑은 막주의 명령조차도 이들에게 통하지 않음을 깨닫고는 심장이 멎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내색을 할 수가 없어서 애써 차가운 표정을 유지했다.

“좋다! 섬서를 벗어난 이후까지도 놈들이 쫓아온다면 그렇게 하겠다. 단 추격권에서 벗어나면 계집은 막주께 데려간다.”

“대형!”

“내가 양보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하니 더는 나서지 말거라!”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억누른 풍신수랑은 빠른 걸음으로 영호수란이 타고 있는 가마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는 자들의 눈빛은 여전히 매섭고 섬뜩했다.

풍신수랑도 그것을 느꼈지만 애써 무시하고 앞만 보며 걸었다. 하지만 머릿속은 혼란 그 자체였다.

감당할 수 없는 적들의 추격에다 이제는 뒤통수에 여러 개의 칼을 꽂고 있는 형국이 되어 버렸다.

‘대체 어쩌다가…….’

풍신수랑의 입술을 뚫고 나지막이 한숨이 흘러나왔다.

배신…….

있어선 안 될 배신의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풍신수랑은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는 가마를 응시했다.

‘막주의 명령 따위는…… 없었다!’

그랬다.

그녀를 살려서 데려오라는 막주의 전서는 없었다.

지난날, 도왕 북궁천소에게 죽은 아우의 복수를 하고자 중원으로 잠입하여 신마성의 인물들을 노렸던 그였다. 그 와중에서 검후와 백선녀를 암습했던 때가 있었다. 그때 자신의 검에 부상을 입으며 쓰러지던 영호수란의 자태는 지금도 잊을 수 없었다.

누군가를 갈망하며 간절함을 보이던 그 눈빛…….

그 눈빛이 고국에 두고 온 사랑하는 여인과 겹치며 떠오른 이후로 영호수란을 보는 그의 눈빛이 달라져 버렸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빌어먹을!’

풍신수랑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고개를 흔들었다.

쏴아아…….

빗줄기가 거세졌다. 없던 바람까지 불어오며 숲을 마구 흔들어대자 세상천지가 춤을 추는 것처럼 느껴졌다.

“일호! 척후를 맡아라!”

풍신수랑의 명이 떨어지자 뒤쪽에서 죽립인 하나가 빠르게 전방으로 사라졌다.

풍신수랑의 시선이 뒤로 돌아갔다. 가장 뒤쪽에서 이동하는 수하들에게서 별다른 기색이 보이지 않자 이내 시선을 전방으로 돌렸다.

“콜록!”

가만 안에서 들려온 기침 소리가 정적을 깨 버렸다. 내공을 제어당한 영호수란은 그저 평범한 여인과 같았기에 한겨울의 차가운 기운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해서 그녀의 체력은 급속도로 약해지고 있었다. 문제는 가벼운 기침 소리에도 풍신수랑을 제외한 다른 자들의 눈빛에 탐욕이 어린다는 점이었다.

공포와 욕정은 같은 성질이라고 했던가. 풍신수랑의 권위가 약해지면서 영호수란을 향한 죽립인들의 탐욕은 점점 더 커져 가고 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풍신수랑은 일부러 더 싸늘하게 소리쳤다.

“저 산을 넘어 백리를 더 가면 천왕의 비밀 분타가 있을 것이다. 이동은 그곳까지 하겠다.”

“백리는 너무 멉니다.”

“그 안엔 쉴 만한 곳이 없다. 소랑!”

“계집이 있다면 차가운 풀밭조차 마다하지 않을 형제들입니다. 물론 저도 그렇습니다.”

갈수록 어조는 도전적으로 바뀌었다.

풍신수랑이 갑자기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그러고는 느릿하게 몸을 돌려 지금껏 자신에게 도전적인 태도를 보이는 소랑을 싸늘히 응시했다.

소랑도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풍신수랑의 입술이 벌어지려는 순간에 전방에서 미세한 소리가 울렸다. 검과 검이 부딪힐 때 울리는 금속성이었는데, 모두는 희미하게나마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보나 마나 척후로 나갔던 동료가 누군가와 싸웠음이리라.

콰르릉!

뇌전이 하늘을 덮었다. 그들의 뒤쪽에 뇌전이 작렬하며 숲이 흔들렸다. 뒤이어 한 줄기 음성이 모두의 귓전을 흔들어 놓았다.

“운이 좋았군.”

모두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전방의 숲이 가볍게 흔들리더니 이내 혁련천후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흑색 장포에 흑발을 늘어뜨리고 허리에 장검을 두른 그는 여전히 과거의 모습 그대로였다.

풍신수랑의 눈동자가 거침없이 흔들린다.

“신마성주!”

챙챙!

검을 뽑아 드는 소리가 일제히 울렸다. 가마를 잡았던 자들이 빠르게 뒤쪽으로 이동했다.

눈앞의 사내가 어떤 목적을 지녔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그리고 그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 자, 없었다. 해서 영호수란을 인질로 삼고자 했다.

덜컹!

흔들리던 가마의 문이 부서지며 영호수란이 고개를 내밀었다. 꿈에서도 그리던 목소리에 내공조차 없는 가녀린 주먹으로 가마의 문을 부순 그녀였다.

“움직이면 목을 베겠다! 계집!”

스슥!

차가운 검날이 그녀의 목에 대어졌다.

살짝 그어진 목이 이내 선혈을 흘려 냈지만 그녀는 선혈보다 더한 눈물을 흘리며 혁련천후를 바라보았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혀들었다. 영호수란이 웃는다. 처연하면서도 기쁨이 묻어나는 그런 미소였다. 그리고 천 마디 말보다 더한 뜻을 전해 주는 미소이기도 했다.

“네놈이 움직이면 이 계집의 목이 떨어진다.”

소랑이 어느새 영호수란의 곁에 서 있었다. 파랗게 빛을 발하는 그의 검이 당장에라도 움직일 듯 가늘게 흔들렸다.

다른 자들 역시 가마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추격해 오는 자들과 맞서 싸우자고 전의를 드러냈던 그들이 기세는 그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이미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눈앞의 혁련천후는 자신들이 어찌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자신들의 영역이라는 숲이 주변에 그 울창함을 자랑하며 둘러져 있었지만 그것조차도 소용없는 존재가 바로 저 혁련천후라는 사내다.

풍신수랑이 나섰다.

“저 계집의 목숨을 살리고 싶다면 물러서라.”

혁련천후는 멈추지 않고 다가섰다. 풍신수랑은 마치 거대한 산이 자신을 향해 밀려드는 착각마저 일으켰다. 하지만 다시 소리쳤다.

“허풍 따위에 통할 우리가 아니다. 네놈이 제아무리 강하다 해도 저 계집의 목이 떨어지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하니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냉큼 물러서라!”

풍신수랑의 싸늘한 외침에도 혁련천후는 여전히 느릿하게 다가왔다.

그의 주변이 흐릿한 안개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 안개는 빗속을 뚫고 서서히 부상막의 고수들을 향해 밀려갔다. 마치 생명이 있는 것처럼 움직인 안개는 가마 주변에 서 있는 자들의 육신을 두르더니 이내 가마까지 흐릿하게 가려 버렸다.

그러나 부상막의 그 누구도 그것에 신경 쓰지 못했다. 그들의 시선은 오직 혁련천후에게 고정되어 있을 뿐이었다.

“데려와라.”

혁련천후의 짤막한 음성이 흘러나옴과 동시에 퍽 하는 소리가 모두의 귓속을 울렸다.

빗물 속으로 붉은 선혈이 솟구쳤다.

쾅!

가마가 산산조각이 나며 영호수란의 가녀린 육신이 혁련천후를 향해 날아올랐다. 그녀 혼자가 아니었다. 누군가 그녀를 안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진천이었다.

하늘이 도왔는지 혁련천후와 그들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영호수란을 찾는데 성공을 한 것이었다.

“개새끼들!”

왕전의 거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뒤이어 벼락같은 거대한 강기가 죽립인들을 향해 날아갔다.

퍽! 퍽!

“끄아악!”

경악을 하고 뒤로 물러서던 자의 목이 소리 없이 뎅강 잘려서 날아갔다. 그 뒤에 그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흑야가 유령처럼 나타나 있었다.

“으…….”

누군가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풍신수랑의 두 눈은 바람에 흔들리는 숲보다 더 심하게 흔들렸다.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했다.

‘도주해야 한다!’

풍신수랑은 급히 소랑을 찾았다. 하지만 소랑은 이미 죽은 뒤였다.

쏟아지는 빗물을 맞으며 진흙 속에 반쯤 파묻혀 있는 소랑의 머리, 그 옆에 주인을 잃은 육신이 처참하게 나뒹굴고 있었다.

“곧 뒤를 따라가게 될 것이다.”

혁련천후가 앞으로 나섰다.

그의 손에 쥐어진 검은 이미 천살강기로 둘러져 있었다.

“자폭을 한다고 들었다.”

“그걸 알면서도 담담한 것을 보니 자신이 있는 모양이군.”

풍신수랑은 최후의 자존심을 드러내었다. 그것은 두려움에 떠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는 것이었다.

“당연히.”

풍신수랑의 입가에 돌연 처연한 미소가 걸렸다.

“사내로서 무척 부러운 자다. 당신은…….”

그 말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끝까지 다 잇지 못했다. 날아드는 검을 보고도 그는 피하지 못했다.

목에서 따끔한 통증이 올라오더니 이내 세상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뒤이어 짙은 어둠이 찾아왔다.

철퍽!

풍신수랑의 잘린 목이 동료들의 시신 한가운데로 떨어졌다. 그의 죽음을 본 마지막 죽립인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으아아!”

“자폭입니다!”

진천이 외쳤다.

혁련천후는 육탄 돌격을 감행해 오는 죽립인을 그저 담담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그의 시선은 죽립인이 아닌 그 뒤에 고정되어 있었다.

허공으로 떠오르는 한 사람. 십전무제 영호도성이 죽립인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자폭을 하려 했던 자의 몸이 허리에서부터 삭둑 잘려 날아갔다.

“할아버지!”

영호수란의 외침이 주변을 울렸다.

영호도성이 죽은 자의 머리를 밟으며 내려섰다. 살광으로 일렁거렸던 얼굴이 목숨만큼 소중한 손녀를 향해 한없이 따뜻한 미소를 머금었다.

“개새끼들!”

뒤늦게 북궁천소와 조윤이 장내로 뛰어들었다.

난폭한 기운을 발산하며 뛰어내린 북궁천소는 상황이 다 끝났음을 깨닫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조윤도 무안함에 영호수란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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