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무사-185화 (183/425)

# 185

<귀환무사 185화>

풍신수랑의 얼굴이 섬뜩하게 변했다.

“감히 내게 불만을 가진단 말이냐?”

“대응방식 때문입니다. 모두가 싸우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배우기를 그렇게 배운 아이들이 아닙니까? 한데 그저 도망만 치고 있으니…….”

“놈들을 죽이려면 방법은 인술뿐이다. 하지만 놈들 중엔 살왕이 끼어 있다. 동영의 인술로는 넘을 수 없는 철벽이다. 그자는…….”

살왕 흑야의 존재는 같은 세계를 살아가는 자들에겐 넘을 수 없는 철벽과도 같았다.

이들이 싸워보기도 전에 유일하게 두려움을 갖는 존재가 바로 흑야였다.

비록 동영최강의 살수들이라지만 그들도 흑야의 살인수법을 모방할 정도로 그는 자객들의 세계에선 신적인 존재였다.

그것은 자신들에게 하늘처럼 받들어지는 막주도 다를 바 없었다.

“막주의 명이 떨어졌으니 일단은 가는 곳까지 가 본다. 아이들에게 그렇게 전해라.”

“알겠습니다.”

수하들이 물러가자 풍신수랑은 화를 억누르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러다가 돌연 안광을 번뜩였다.

“빌어먹을 계집이 뭔가 요상한 짓거리를 한 것이 분명하다. 아니면 놈들이 이토록 정확하게 뒤를 쫓을 수는 없다.”

철컥!

검을 챙겨든 풍신수랑이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섰다.

* * *

쾅!

문이 박살 나며 누군가가 들어오자 영호수란은 몸을 움츠렸다.

유일하게 자신과 대화를 나누던 풍신수랑이 살벌한 빛으로 자신을 노려보며 걸어오자 그녀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앞에서 걸음을 멈춘 풍신수랑이 차가운 어조로 물었다.

“무슨 짓을 한 거지?”

“……?”

“무슨 짓을 했기에 놈들이 우리들이 이동하는 행선지를 알기라도 하듯 이토록 정확하게 쫓아오느냐 이 말이다!”

그 말에 영호수란의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누군가가 추격해 오는 것을 지금껏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놈들이 자주 은신처를 바꾼 것이었어. 혹시나 해서 손수건을 떨어뜨린 것이 도움이 된 건가 봐. 그 사람이 온 것일까?’

혁련천후의 차가운 얼굴이 떠올랐다. 가슴이 요란하게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색을 하지 않으려 애써 뛰는 가슴을 억눌렀다.

그녀의 얼굴 표정이 조금 변하는 것을 본 풍신수랑이 더욱 차갑게 으름장을 놓았다.

“허튼수작 부리지 마라. 지금이라도 본인이 마음만 먹는다면 네년은 저 아이들의 욕정을 풀어 줄 노리개로 전락할 것이다. 백선녀!”

영호수란은 차갑게 받아쳤다.

“흥! 나는 모르는 일이다!”

“마지막 경고다. 지금도 네년의 육체를 탐내는 아이들이 넘쳐난다. 내 인내심을 시험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것이다.”

“누가 쫓는단 말이냐?”

“네년의 조부더군. 교활한 늙은이가 무공을 숨기고 있었다만 곧 목을 따버릴 것이다. 네년이 자초한 것이라면 우리를 원망할 수도 없겠지.”

그는 다른 존재들은 거론하지 않았다.

허튼 희망을 품게 하고 싶지는 않아서였다. 다만 영호도성의 추격을 알려준 이유는 핏줄에 대한 걱정을 하게 만들어 고분고분하게 따라 주기를 기대해서였다.

영호수란의 눈빛이 다시금 크게 흔들렸다.

‘혼자서는 위험하셔…….’

영호도성이 뒤를 쫓고 있다는 말에 그녀는 희망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그녀도 고수라면 고수다. 당연히 눈앞의 풍신수랑을 비롯하여 그 수하들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지녔는지 충분히 알고 있다.

그렇다면 영호도성 혼자서는 무리다.

‘알면서도 움직이지 않았단 말이야?’

갑자기 혁련천후에 대한 섭섭함이 물밀 듯 올라왔다. 영호도성이 쫓고 있다면 그도 충분히 쫓을 수도 있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왜 자신을 찾아 움직이지 않는 것일까.

영호수란의 눈가가 이내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다시 한 번만 수작을 부리면 그땐 나를 원망하게 될 것이다.”

그녀의 표정 변화를 살피던 풍신수랑이 차가운 냉소를 흘리고는 몸을 돌려 나가 버렸다.

영호수란은 벽에 등을 기대고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가는 눈물 줄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동안 독하게 마음먹고 혁련천후가 오기만을 기다렸건만 생각지도 않았던 조부가 위험을 무릅쓰고 추격해 오고 있단다.

가슴 한쪽이 비수로 찌르듯 아픔을 전해 온다.

* * *

질주하는 백홍의 속도는 날아가던 새가 무색해질 정도로 빨랐다.

하루를 꼬박 쉬지 않고 달린 혁련천후는 앞서 출발한 흑야 일행보다 먼저 섬서의 외곽 지역에 다다를 수 있었다.

모든 게 백홍의 탁월한 후각 때문이었다.

영호수란의 손수건에서 그녀의 향기를 확실하게 기억한 백홍은 곧장 직선거리로 질주했다. 당연히 사방을 살피며 이동을 해야 하는 흑야 일행보다 빠를 수밖에 없었다.

캉!

침엽수가 울창하게 자라난 곳에 이르러 백홍이 속도를 늦추고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전진하지 못하고 주변을 배회하던 백홍이 끙끙거리며 혁련천후를 쳐다보았다.

‘이런 곳에 물이 흐르고 있었다니…….’

백홍의 곁으로 다가온 혁련천후는 이장 너비의 물줄기가 가로막고 있음을 발견했다.

며칠 전, 심하게 쏟아진 폭우 탓에 누런 흙탕물이 거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는데, 그 물줄기 때문에 영호수란의 향기가 끊어진 듯했다.

혁련천후는 백홍을 앉아 어깨에 올리고는 가볍게 물줄기를 뛰어넘었다.

그러고는 다시 백홍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곳을 건너 이동했다면 백홍이 영호수란의 흔적을 찾아낼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백홍은 여전히 전진하지 못하고서 끙끙거리며 주변을 맴돌 뿐이었다.

혁련천후의 미간에 슬쩍 주름이 생겨났다.

‘난감하게 되었군. 여기서 끊겨 버리다니…….’

시선을 들어 전방을 살폈다. 그러나 울창한 수림만이 있을 뿐, 사람이 있을 만한 공간이나 건물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동굴이 있을까 살폈지만 동굴이 있을 만한 절벽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찾아낼 방도가 없어진다. 천운이 따라 주기만을 기대하며 무작정 움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혁련천후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어딘가에 흔적이 남아 있을 것이다.’

차갑게 가라앉은 그의 눈동자가 빠르게 주변을 살피며 번뜩였다.

사람이 지나간 흔적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걸 쫓아서라도 움직여야 했다. 현재로써는 그 방법밖에는 없으니까.

일각 정도가 흘렀을 때였다. 뭔가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거친 표면을 이루고 있는 소나무의 껍질이 미세하게 뜯겨 나가고 없었다. 집중하고 자세히 살피지 않는다면 쉽게 발견할 수 없을 만큼 미세한 흔적은 주변의 몇몇 나무들에게도 드러나 있었다.

‘사람이 만든 흔적들이다.’

짐승이 만들어 낸 것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털이라도 붙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흔적이 나타나 있는 높이 또한 네 발로 기는 짐승이라면 결코 할 수 없는 높은 위치였다.

“백홍!”

캉!

그는 백홍에게 흔적에 나타나 있는 냄새를 맡게 했다. 이젠 그 냄새를 쫓는 수밖에 없었다.

그 흔적이 자신이 쫓는 자들의 것이 아닐 수도 있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으니 최대한 빠른 시간에 흔적을 남긴 자들의 정체부터 알아내야만 했다. 물론 그 흔적이 부상막의 것이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캉!

바닥에 내려놓자 백홍이 바람을 가르며 질주를 시작했다.

* * *

호랑이에게 쫓기는 토끼의 심정은 어떨까?

부상막의 고수들이 지금 그랬다. 흑야를 비롯한 적들의 추격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음이 느껴졌다.

해서 풍신수랑은 동선을 파악하기 위해 본대에서 뒤처진 거리에 한 명씩을 두어 경계로 삼았으나 들려온 것은 죽음을 향해 돌진하는 폭발 소리뿐이었다.

벌써 그와 같은 방법으로 희생된 동료들이 몇 명이 되었다. 그럼에도 추격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차라리 다 함께 싸웁시다!”

부상막의 살수들 사이에서 불만이 고조되어 갔다.

안이한 대응 방식 때문에 점점 희생자가 늘어가면서 풍신수랑을 대놓고 원망하는 자들도 생겨났다. 언제나 맹종하고 허리를 숙였던 예전의 그들이 아니었다.

어쩌면 자신들도 곧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인지도 몰랐다. 한데 풍신수랑은 여전히 같은 방식을 고수했다.

그게 불만을 더 키웠다.

“대형! 언제까지 이렇게 쫓길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차라리 기다렸다 함께 칩시다!”

“내가 받은 명령은 백선녀를 그곳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우리가 죽어도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까!”

“천왕이 아닌 막주의 명이다. 우리 모두가 죽더라도 계집을 막주께 데려가야 하는 것이 우리에게 떨어진 지상 명령이다.”

풍신수랑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다른 자들의 눈빛이 점점 더 매섭게 변해 갔다. 그중에는 적개심을 품고 풍신수랑을 노려보는 자들도 있었다.

돌이킬 수 없는 분열의 조짐이었다.

“더는 명령에 따를 수 없습니다!”

누군가 그렇게 외치며 나서자 풍신수랑의 눈빛이 일그러졌다. 지금껏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자들이 다른 수하들과 뜻을 같이하고 나온 것인데, 그들은 풍신수랑과 한 형제나 다름없는 자들이었다.

“너희들마저도 지금 내게 항명하는 것이냐?”

“항명이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씩 죽어 나간다면 그곳에 도착하기도 전에 우린 모조리 전멸입니다. 모두 힘을 합쳐 싸운다면 승산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제아무리 오왕들이라도 숲 속에선 우리가 유리하지 않습니까?”

“어리석은 놈! 말하지 않았느냐! 살왕! 그자가 우릴 쫓는다고 말이다!”

“놈은 저와 아우들이 목숨을 걸고서라도 제거하겠습니다. 하오니 그만 이동을 중지하시고 놈들을 기다렸다가 저격합시다! 대형!”

“둘째 형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살왕은 저희들이 맞겠습니다.”

친형제나 다름없는 자들마저 단호한 태도를 보이자 풍신수랑은 모두를 노려보며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는 다른 수하들을 천천히 쓸어 보았다. 모두가 불만이 잔뜩 어린 눈빛과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풍신수랑은 형제나 다름없는 자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안광을 번득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그들에게서 강렬한 투기를 느꼈다. 그리고 조금의 원망도 보았다.

평소 같았다면 화를 내었을 그였지만 지금은 그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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