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
<귀환무사 184화>
“얼마 전까지는 그랬다만 지금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놈들이다. 어차피 본좌의 수련이 끝나면 그깟 편법 따윈 사용하지 않아도 충분히 대업을 완수할 수 있다. 게다가 철갑신마의 후손들도 조금 지나면 극성에 이를 것이니 차라리 놈들이 오왕의 하나라도 죽여 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비정하리만치 냉정한 말에 노인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천왕은 요지부동이었다. 해서 노인은 더 나서지 못하고 머리를 조아렸지만 속내는 매우 복잡했다.
사실 부상막과는 수직 관계가 아닌 수평 관계라고 봐야 했다. 한시적인 동맹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세력 간의 관계는 당장의 손익을 떠나 동영과의 먼 미래까지도 생각해야 하는 중차대한 관계였다.
도움이 되지 않는다하여 그들이 몰살을 당하게 내버려 둔다면, 차후 동영과의 사이는 완전히 틀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무시할 수 없는 대적을 만드는 결과로 이어진다. 노인은 그 점을 말하려 했지만 눈앞의 존재는 한번 뱉은 말에 토를 다는 것을 지독히도 싫어한다.
자칫 이 자리에서 경을 칠 수도 있었기에 함구하고 만 것이다.
“동영과의 관계를 염려하고 있느냐.”
노인의 속내를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천왕이 물어 왔다.
“그들의 무시할 수 없는 힘이 혹시라도 천왕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에 조금이라도 걸림돌이 될까 두려워서 그들을 구하자고 진언을 드린 것입니다.”
“송곤! 너는 하나는 알지만 둘은 모르는구나.”
좀처럼 이름을 부르지 않던 천왕이 노인의 이름을 부르며 스산하게 말을 이어 갔다.
“놈들은 오랑캐다. 비록 혁련세가와 강호를 쓸어 내기 위하여 놈들과 손을 잡았다만 언젠가는 이 땅에서 몰아내야 할 놈들이란 소리다. 본토에 남아 있는 놈들의 전력은 물론 위협적이지, 해서 조금이라도 놈들을 제거하는 것이 우리에겐 득이 되는 것이다. 알겠느냐?”
“하오시면 차도살인지계를…….”
“굳이 따지자면 그렇다고 할 수도 있지. 본좌는 처음부터 놈들과 손을 잡을 때 그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뿐이다. 제아무리 천하 정복에 눈이 먼 본 좌라도 오랑캐 놈들에게 중원의 일부를 내어 줄 순 없지. 그 점에선 용성도 마찬가지다. 놈들도 순수 한족이 아니니 단 한 평의 땅도 내어 줄 수 없다.”
노인, 송곤은 소름이 돋아남을 느꼈다.
오직 힘만을 중시하고 힘만을 지닌 것으로만 천왕이다. 한데 지금 보니 지금까지의 자신의 생각이 완전히 틀렸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옛날의 본좌가 아니다. 한때 중원이 우러러보던 그때의 본좌는 스스로 짜증이 날 정도로 나약하고 소심했었다. 물론 그땐 선조들의 무공이 고작 오 할 정도였기에 스스로 그렇게 살았을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스스로 다르다. 곧 있으면 본좌는 미증유의 거대한 힘을 지니게 된다. 그 힘으로 혁련세가를 무너뜨리고 정도맹을 쓸어버린 다음, 그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세외까지 그땐 선조 발아래에 둘 것이다. 당연히 동영도 그중 하나일 뿐이다.”
말을 하는 천왕은 눈동자가 야망으로 번득였다.
송곤은 다시 한 번 소름이 돋아나며 등골을 적시는 식은땀까지 느꼈다.
“머리가 있는 놈들이라면 사로잡은 계집을 이용해서라도 살아날 것이다. 그러니 너는 성의 건축에만 전념토록 해라. 본좌의 수련이 끝나는 그날, 천하는 본 묵련, 아니지 이제는 다비문이라고 해야겠지. 어쨌든 천하가 우리를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겠습니다.”
송곤은 허리 숙여 대답하고는 천왕의 거처를 빠져나갔다.
송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섬뜩한 눈빛을 발했던 천왕은 자신의 손가락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후후후. 조금만 더 참자. 그러면 더는 기우량, 놈의 껍데기를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천왕은 만면에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 * *
영호수란을 찾기 위해 신마성을 나선 혁련천후는 쉬지 않고 달렸다. 그는 앞서 달려가는 백홍의 뒤를 쫓으며 주변을 살폈다.
어지간한 고수의 경공보다 빠른 백홍의 속도 덕분에 성을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수하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죽은 자의 몸에 난 상처들이 그것을 말해 주었다.
“십전무제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무작정 쫓아서 이토록 빠른 시간에 놈들을 찾아내다니, 과연 오성의 최강자답군.”
이곳까지 오면서 영호수란과 같은 기운에 당한 것으로 보이는 수십의 시신들을 보았기에 십전무제의 동선을 추측할 수 있었다.
하나같이 처참하게 죽은 것으로 보아 그의 분노가 어느 정도인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마음이 편치 못했다.
‘나중에 용서라도 빌어야 하나.’
어쨌든 영호수란은 자신과 함께 있다가 변을 당했다.
제대로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이 결코 작지 않았다.
캉!
앞서 가던 백홍이 그를 돌아보며 짖었다. 뭔가를 발견한 모양이다. 혁련천후가 걸음을 빨리하자 백홍은 더욱 빠른 속도로 질주를 시작했다.
잠시 후, 그는 초토화된 현장에 다다랐다.
폭삭 내려앉은 건물과 시커멓게 그을린 주변 숲들이 눈에 들어왔다.
‘지독하군.’
단순한 화마로 인한 흔적이 아님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산산조각으로 박살이 나 버린 건물의 잔해는 이곳에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음을 알려 주었다.
백홍이 주변을 맴돌며 연신 끙끙 울음을 냈다.
그러더니 뒤쪽 숲으로 빠르게 뛰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백홍이 입에 뭔가를 물고 나타났다.
그것을 본 혁련천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백홍의 입에 물린 것은 흰색 바탕에 매화 무늬가 들어간 작은 천이었다. 그는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도 그와 같은 것이 있었으며 독고혜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지난날, 영호수란이 손수 수를 놓아 선물한 손수건이었다.
‘스스로 위치를 알리려고 이것을 버린 것인가?’
어쩌면 영호수란이 일부러 떨어뜨린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라면 변을 당했다고 볼 수도 있다.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이런 종류의 불안감은 이미 몇 번에 걸쳐 겪어 보았던 혁련천후다. 검후를 잃었을 때와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그의 시선이 백홍을 향해 돌아갔다.
“쫓아라.”
캉!
백홍이 쏜살처럼 동북쪽으로 달렸다. 그렇게 얼마를 달렸을까. 혁련천후는 다시 경공을 중단하고 지상으로 내려섰다. 사지가 잘린 채 죽어 있는 시신이 있었다.
역시 이번에도 영호도성의 흔적이었다.
참혹한 형상으로 싸늘하게 굳어 버린 시신의 주변에 말라붙은 혈흔이 보였다.
‘부상을 당하셨단 말인가?’
그랬다.
죽은 자와는 제법 떨어진 거리에 혈흔이 있었다.
수법으로 보아 죽은 자는 영호도성의 적수가 아니었다. 의도적으로 시간차를 두고 잘려 나간 듯 보이는 팔이 그것을 증명했다.
그렇다면 다른 자들과 싸움을 벌이면서 그도 부상을 당한 것이라고 봐야 했다.
킁! 킁! 킁!
백홍은 여전히 끙끙거리며 주변을 맴돌았다.
아주 익숙한 기운, 바로 영호가문의 기운이 주변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유달리 백홍을 귀여워했던 영호수란이기에 백홍은 영호도성의 기운을 그녀의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녀의 향기와 영호가문의 기운 때문에 상상을 불허하는 백홍의 능력이 잠시 혼돈을 일으키고 있었다.
혁련천후는 손수건을 꺼내 백홍의 코에 갖다 대었다.
“이 향기만을 좇을 수 있겠느냐?”
캉!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백홍이다.
백홍이 바람처럼 내달렸다. 잠시 주변을 살펴본 혁련천후도 다시 백홍을 쫓아 바람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휘이잉!
* * *
풍신수랑은 동영의 최강 집단 부상막에서 요랑과 더불어 이인자를 다투는 위인이다. 인자술의 능력이 극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는 그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탁!
술잔을 내려놓는 손이 가늘게 떨렸다.
“고작 스물이 살아남다니…….”
추격해 오는 존재들을 피해 섬서의 모처로 숨어든 자신들이다. 그 와중에 상당수가 죽었다. 이제 그와 함께하는 수하들은 스무 명에 불과했다.
중원의 한 지역을 차지하겠다는 꿈을 안고 입성을 했을 때를 떠올리니 그저 참담할 뿐이었다.
계집들을 구하러 간 수하들과 동생 역시 이미 죽어 버렸음을 직감했다.
자신들을 추격하는 존재들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강자들이다.
그들과 맞서려면 인자술을 펼치는 것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 그러나 인자술로도 어찌할 수 없는 존재가 자신들을 쫓고 있었으니 풍신수랑으로서는 미치고 환장을 할 노릇이었다.
“하필이면 그자가…….”
동영에서도 죽음의 사신으로 불리는 어둠의 제왕, 살왕 흑야가 자신들을 쫓고 있음을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다. 그 바람에 수하들의 사기는 바닥에 떨어졌다.
시간을 벌려고 다섯을 도중에 매복시켜 추격자들의 저격을 노렸지만 그 어떤 보고도 없었다. 모조리 다 죽었을 것이다.
덜컹!
문이 열리며 죽립인 하나가 들어섰다.
“대형! 천왕 쪽에서 아직 아무런 연락이 없습니다. 지금쯤이면 벌써 전서를 보냈어도 남을 시간이 지났지 않습니까.”
쾅!
풍신수랑이 화를 참지 못하고 탁자를 내리쳤다.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들과 함께 있는 막주께서도 분명 전서를 보셨을 텐데, 그분조차도 아무런 회답이 없습니다.”
“지금 막주를 의심하는 것이냐?”
“그게 아니라…….”
벌컥! 벌컥!
거칠게 술잔을 비워 버린 풍신수랑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죽립인을 응시했다.
“막주께서 전서를 보내셨다.”
“예? 정말입니까?”
“그렇다. 저 계집을 살려서 데려오라는 명이시다. 이유에 대해선 적혀 있지 않았지만 뭔가 복안이 계시겠지.”
“막주께선 지금도 그곳에 계십니까?”
“그럴 것이다. 스스로 자신이 있으시니 놈들과 함께 계신 것이다. 그리고 본토의 남은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천왕, 그자가 더 잘 알고 있다. 그것을 안다면 결코 배신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임무를 떠난 아이들을 조금 더 기다려 보겠다.”
“아이들의 불만이 대단합니다.”
“……!”
풍신수랑에게 말을 건네던 인물이 눈짓으로 뒤쪽에 늘어선 자들을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