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
<귀환무사 183화>
검이 그대로 그의 왼쪽 눈을 찌르고 들어왔다.
뇌에 못이 박히는 듯, 엄청난 통증에 죽립인은 한껏 입을 벌렸다.
그 지독한 통증에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젠 움직일 수도 없었다. 마혈이 제압당한 것이다.
자신의 피로 적셔진 검이 다시 오른쪽 눈동자 앞에서 멈추었다.
“그 아이를 어디로 데려갔느냐?”
영호도성은 마치 마인처럼 변해 있었다.
헝클어진 머릿결에 시커멓게 그을린 장포, 그러나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안광은 악마의 그것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영호수란이 그를 이렇게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저, 정도…….”
무언가 말을 하려던 죽립인의 고개가 옆으로 떨어졌다. 지독한 공포심이 심마와 겹쳐 그만 심장이 발작을 일으켜 숨이 끊어진 것이었다.
영호도성의 얼굴에 난감함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이내 무섭도록 차갑게 굳어졌다.
‘정도라니…… 정도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곳으로 갔단 말인가?’
난감했다.
두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당최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죽은 자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질끈 깨문 그는 폭발이 일어났던 곳을 돌아봤다.
여전히 그곳은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폭발은 자신이 당했던 것과 같은 종류의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놈들과 부딪혔다고 봐야 했다.
‘신마성에서 누가 오기라도 한 것일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었다.
그들과 합류할 것을 잠시 고민했던 영호도성은 이내 시선을 북쪽으로 돌렸다. 영호수란을 찾아야 한다는 급한 마음에 짧은 시간조차 아까웠던 그는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려 사라졌다.
* * *
신마성을 방문했다가 정도맹으로 돌아온 육승은 뜻하지 않은 보고에 표정이 굳어졌다.
비영전 소속의 무사가 보내온 전서에 의하면 섬서의 초입에 위치한 정도맹지부의 인원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했다.
그곳을 책임졌던 인물은 비록 구파나 오대세가의 일원은 아니었지만 맹에 대한 충성심이 남달라 모두의 인정을 받고 있던 비영검(飛影劍) 곽무라는 자였다.
육승도 그를 몇 번에 걸쳐 보았던 적이 있었다. 호쾌한 인상에 결단력을 지닌 그는 맹의 수뇌들이 미래의 장로감이라고 치켜세우던 위인이었다.
그런 그가 아무런 보고도 없이 인원들과 함께 사라졌다니, 육승은 뭔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싸운 흔적도 없고, 그냥 사라졌다면…… 혹, 무단으로 어딜 가기라도 했단 말인가?”
육승은 잠시 고민하다가 머리에서 지워 버렸다.
그깟 지부 일로 머리를 혹사할 여념이 그에겐 없었다. 단순한 일탈로만 치부해 버린 그는 이내 다른 문서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의 탁자에 놓인 서류만도 수십 통이 넘었다.
모두가 천하의 각 지역에서 활동 중인 비영전 소속의 무사들이 보내온 것들이다.
하나같이 신중하게 살펴보던 육승이 한 전서를 읽어 가며 눈빛을 번뜩였다.
“엄청난 규모의 건축물이 상당한 속도로 지어지고 있단 말이지?”
그랬다.
비영 십이호라는 이름으로 보내온 전서에는 섬서의 외곽 지역에 정도맹을 능가하는 규모의 거대 건축물이 상상을 불허하는 속도로 지어지고 있음을 알려왔다.
전서의 말미에 적힌 글들이 육승을 자극했다.
“무림인들이 다수 보인다…….”
무림인들이 건설 현장에 상당수 있다면 무파의 건축으로 봐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살펴봐도 그만한 건축을 할 문파는 없었다. 정도맹 산하의 문파라면, 아니 정파라면 무조건 그의 기억에 있어야 했다.
정도맹을 무시하고 비밀리에 그만한 건물을 짓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서류들을 모조리 살펴본 그는 신경을 끌었던 하나의 문서만을 품속에 갈무리했다.
그러고는 이내 거처를 나와 정도맹의 깊숙한 곳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가 가는 곳은 맹주의 관사가 위치한 뒤쪽 산의 능선이었다. 언제부턴가 나백은 집무실을 비우고 관사에서 집무를 보기 시작했는데, 모두가 육승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다.
세가 갈리어 의견이 분분한 맹내의 복잡한 상황 때문이다.
그가 관사에서 집무를 보게 되면 필요한 정보와 안건만이 그에게 전달되고 나머지는 모두 육승이 소관하게 된다.
당연히 분석력이 뛰어난 육승이 빠른 결단을 내릴 수 있게 되고 나백은 나백대로 자신이 할 일을 좀 더 세밀하게 파고들 수 있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노린 방법이었다.
당초, 사천왕의 둘이 상당한 반대를 피력했지만 맹의 법규에 의한 것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걸음을 옮기면서 맹의 복잡한 상황을 떠올린 육승은 어지러워지는 심정을 애써 억누르며 걸음을 더욱 빨리했다.
맹의 후문을 빠져나오자 흰색으로 지어진 자그마한 구조물이 보였는데, 바로 나백의 관사였다.
부인과 사별한 나백은 그곳에서 홀로 지내고 있는데 심부름을 하는 무사 몇이 그와 함께하고 있을 뿐이었다.
“전주를 뵙습니다.”
마침 마당에 나와 있던 무사들이 육승을 보고는 허리를 굽혔다.
“맹주께서는 안에 계시는가?”
“방금 막 침소에 드셨습니다.”
“이 시간에 침소에 드시다니, 어젯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시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닙니다. 다만 무슨 일로 밤을 지새우며 고민하시다가 날을 새우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육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밤을 지새워 고민할 정도라면 상당히 큰 사안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자신을 불렀을 나백이 아닌가.
‘무슨 일이지?’
의구심이 생겨났다. 그러나 막 잠에 든 그를 깨울 수는 없었기에 육승은 마당의 한쪽에 마련된 작은 탁자에 몸을 앉혔다.
무사가 차를 내어오자 육승은 나웅을 찾았다.
“나공자는 어딜 갔는가?”
“저도 어제저녁부터 뵙지를 못했습니다.”
“어제저녁부터?”
“예.”
잠시 관사를 힐끗거린 육승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는 다른 것을 물었다.
“누가 다녀가거나 전서를 받으신 것은 아닌가?”
“죄송합니다. 전혀 언질이 없으셔서 아는 게 없습니다.”
대답하는 무사는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육승도 더는 묻지 않고 차를 마셨다. 그러고는 잠시 후 무사의 어깨를 다독거려 주고는 관사를 빠져나갔다.
육승은 걷다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며 걸음을 멈추었다.
새파랗게 갠 하늘을 보면 기분이 상쾌해져야 하건만 오히려 혼란만 가중되었다.
‘용성도 빙궁도 아닌 전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이 움직이려하고 있다. 어쩌면 비영 십이호가 보내온 전서의 그들일까?’
찌릿!
갑작스럽게 편두통이 몰려오자 육승은 짙은 한숨을 내쉬고는 총총걸음으로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제4장 검후가 허락한 사랑
수련을 끝낸 천왕의 전신이 뜨겁게 달구어졌다.
수하가 내민 천으로 땀을 닦은 그는 얼음을 띄운 냉수를 들이켜고는 빼서 옆에 두었던 반지를 손가락에 끼웠다.
보통의 반지와는 다르게 유난히 큰 보석이 번쩍 빛을 발했다.
언제나 조심스럽게 그를 대하는 문사건의 노인이 오늘도 천왕의 표정을 살피며 보고를 시작했다.
“멸천조를 불러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이대로 두었다간 신마성에 전멸을 당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아둔한 놈들! 고작 용성과 합공을 하고서도 일방적으로 밀리다니…….”
“신마성이 예상을 뛰어넘는 전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가장 핵심 전력인 오왕의 무공이 나날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멸천조 하나가 자폭을 하고도 부상조차 입히기 힘들다고 하니…….”
천왕의 눈이 섬뜩한 빛을 발하며 노인을 응시했다.
“폭발의 위력을 더 늘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점점 배가되고 있습니다만, 그게 하루아침에 가능한 것이 아닌지라…… 죄송합니다.”
못마땅한 기색으로 노인을 가볍게 노려본 천왕이 다시 물었다.
“멸천조가 위험한 이유는 그 계집 때문이더냐?”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오늘 보내온 전서에 따르면 십전무제가 멸천조를 추격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신마성의 인물로 추측되는 자들 또한 멸천조를 노리고 움직였다고 합니다. 만약 오왕이 나섰다면 멸천조는 전멸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십전무제 정도를 당해 내지 못하고 그따위 전서를 보내다니, 무능한 놈들…….”
“십전무제 역시 정보 이상의 강력함을 보였다고 합니다. 둘이 동시에 자폭을 했건만 죽이지 못했다고 하니, 본신의 실력을 감추고 있었음이 확실합니다. 조만간 정파의 고수들에 대한 정보를 다시 작성해야 할 듯합니다.”
천왕이 발끈하여 언성을 높였다.
“본좌가 언제까지 네놈들을 믿고 맡겨 두어야 할지 모르겠군. 벌써 몇 번을 망쳤더냐. 사련이 날아갔고 용성이 제가불능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는데, 이젠 멸천조의 전멸을 걱정하게 만들다니…… 이 모든 게 네놈의 무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더냐?”
“죄송합니다.”
“닥쳐라! 죄송하다, 죄송하다 하면 모든 게 용서될 줄 알았더냐?”
노인은 깊숙이 머리를 조아리고 입을 굳게 닫았다. 섬뜩한 시선으로 노인을 노려보던 천왕이 얼굴을 실룩거리며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멸천조를 불러들이면 놈들을 대신하여 섬서 쪽의 정보를 담당할 조직이 없지 않느냐? 거기에 대한 방책은 세우고 놈들을 불러들이자고 말하는 것이냐?”
“성을 건축 중인 현장에 일반 백성으로 위장한 아이들을 상당수 보내 놓았습니다. 멸천조의 일은 그 아이들이 대신하면 됩니다.”
그 말에 천왕의 얼굴빛이 다소 누그러졌다.
자신의 야망을 실현해 줄 첫 걸음이 성이 완성되는 시점에서 시작된다.
다가올 강호 지배에 대한 탐욕스러움이 천왕의 눈동자를 가득 채우며 떠올랐다.
“별도의 전력을 보내지는 말고 스스로들 알아서 성으로 들라 전하여라. 능력이 없어 전멸을 당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노인이 놀란 눈으로 천왕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결코 없어선 안 될 전력입니다. 차후, 적들과 대규모 전면전이 발발하면 그들의 자폭이 큰 힘이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에 와서 다른 아이들에게 자폭이 가능한 육신으로 개조한다면 상당한 시일이 소요됩니다. 하오니 일부 전력을 보내시어 그들을 구해 주는 것이 어떨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