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무사-181화 (179/425)

# 181

<귀환무사 181화>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육승이 느낀 홍무의 기운은 고작 음식이나 만드는 숙수를 할 수준이 아니었다.

“숙수조차도 고수라니. 도대체 여기는 어떤 곳이란 말인가.”

육승이 혀를 내두를 때 뒤쪽에 누군가 나타났다.

“정도맹에서 오셨소?”

“응?”

뒤에서 들려온 차가운 음성에 육승은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혁련천후와 관산악이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육승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정도맹의 육승이 성주를 뵙습니다.”

고개만 끄덕여 인사를 대신한 혁련천후는 육승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가 만약 적이었다면, 하는 생각을 떠올린 육승은 가슴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안으로 들어설 때까지 전혀 기척조차 감지하지 못했었다.

짧은 시간에 등골이 식은땀으로 적셔진 육승은 호흡을 고르고는 자리에 앉았다.

“정도맹이 여긴 어쩐 일이오.”

물어 오는 어조는 무척이나 차가웠다.

육승은 다시 한 번 태산이 앞에 가로막고 있는 듯, 엄청난 중압감을 느껴야만 했다. 맹주 나백과 사천왕을 처음 대면할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숨을 고르고는 애써 담담히 말했다.

“맹주께서 친서를 전해 오셨습니다.”

두 손으로 서찰을 건네자 그것을 받은 혁련천후는 서찰을 펼쳤다. 내용은 무척 짧고 간단했다.

육승은 서찰을 읽는 혁련천후의 눈치를 살폈다.

천하정세의 중심으로 떠오른 그였다.

오성을 능가한다는, 어쩌면 일존에 근접했다는 평가를 받는 그의 용모는 직접 가까이서 접하니 무척이나 평범했다. 하지만 그 부분이 더 그를 높게 바라보게 만들었다.

“시기는 그쪽에서 정하시오.”

그와 눈이 마주친 육승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청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오면 시일이 잡히는 대로 곧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혁련천후는 육승을 직시했다. 코앞에서 똑바로 쳐다본다는 것은 대단히 큰 실례일 수도 있지만 육승이 혁련천후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있었기에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관산악이 물었다.

“맹주의 친서를 가져올 정도면 보통 분은 아닌 듯한데. 직책이 어떻게 되시오.”

“대단할 것도 없습니다. 그저 보잘것없는 한직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담담히 답하는 육승을 응시하던 조윤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게 미소가 걸렸다.

마침 그의 눈빛을 본 육승은 내심 조마조마했다. 혹시 그가 자신의 신분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생겨났다.

비영전주라는 신분은 수뇌부를 제외한 모든 문파에 비밀로 되어 있다. 알려지면 자신은 척살 일순위에 오를 것이 확실하다. 물론 신마성과 적대적인 관계가 된다면 그렇다는 얘기다.

혁련천후가 일어섰다.

관산악이 육승에게 함께 가자는 손짓을 했다.

“어려운 걸음을 하셨으니 술이라도 대접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소. 일어납시다.”

“아, 예.”

서찰만 전해 주고 다른 볼일 때문에 급히 가 봐야 했던 육승은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는 다소 굳어진 얼굴로 뒤를 따랐다.

* * *

혁련천후는 거처를 향해 걸었다.

육승의 대접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겼다.

‘동맹이라도 맺자는 건가.’

육승이 전해 온 맹주의 친서에는 조만간에 회동을 하자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피할 이유가 없어 회동에는 흔쾌히 응했지만 그들이 동맹을 원하고 나온다면 생각을 해 볼 문제였다.

대정문과의 일로 정도맹에 대한 느낌은 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비록 정도맹의 잘못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호의적으로 변해 가던 자신의 심경에 변화를 준 것이다.

어쩌면 정도맹이 아닌 정파, 전체에 대한 심정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문을 열자 쪼그려 앉은 자세로 뭔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는 사공진무의 뒷모습이 보였다.

탁! 탁!

“진무님! 이거 다 만들었습니다.”

“그래? 그럼 저것을 곱게 가루로 갈아서 채로 걸러야 한다. 시간을 맞추어야 하니 서둘러라.”

“예!”

백리관이 그 큰 덩치를 실룩이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도 보였다.

둘은 그가 들어섰음을 미처 느끼지 못한 듯, 일에 열중했다. 혁련천후는 잠시 둘을 응시하더니 그대로 둘의 옆을 지나가며 말했다.

“거처로 들어오너라.”

“헉!”

백리관이 크게 놀라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황급히 손을 씻고 물기를 닦은 사공진무가 빨리 만들라는 눈빛을 주고는 거처로 들어갔다.

탁자에 앉은 혁련천후를 조심스럽게 응시한 사공진무가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부탁할 게 있다.”

“말씀하십시오.”

눈을 빛내며 자신을 바라보는 사공진무를 잠시 말없이 마주 본 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그녀를 부탁한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천하에 너만이 출입할 수 있는 진을 설치하여라. 그 진안에 그녀를 눕히고 네가 보호해 주었으면 한다.”

사공진무가 눈을 동그랗게 하고서 되물었다.

“그거야 어렵지는 않지만…… 혹시 노주와 수란 때문입니까?”

혁련천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사공진무가 환하게 웃으며 위로하듯 말을 건넨다.

“그렇다면 염려 놓으시고 다녀오십시오. 진법이 아니더라도 어떤 미친놈이 이곳을 노리고 들어오겠습니까?”

“진무…….”

“예.”

“성을 믿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니다. 다만 그렇게 해야만 마음이 놓일 것 같아서 네게 부탁을 하는 것이다.”

어조가 무겁게 느껴지자 사공진무는 낯빛을 바꾸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제갈공명이라도 뚫지 못할 진으로 주모님을 모시겠습니다.”

“모두 이곳으로 잠시 모이라고 전해라.”

“형님들만 말입니까?”

혁련천후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공진무는 빠른 걸음으로 거처를 빠져나갔다.

문이 열리며 찬 바람이 들어오자 등잔불이 휘청거린다. 그 불빛에 언제나 뾰족하게 자신을 대하던 영호수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그냥 달 구경하러 나왔어요.’

금역으로 떠나기 전날 밤, 자신에게 더듬거리며 말하던 그녀의 모습이 가슴을 채워 온다.

돌아보니 그때 그녀에게서 느껴졌던 분위기는 슬픔, 그것이었다. 그것은 자신이 십 년 동안 겪었던 것과 동질의 것이었다.

‘나로 인해 슬펐더냐…….’

가슴이 무겁게 가라앉으며 심장이 뜨거워진다.

‘흥! 슬프긴 뭐가 슬퍼요.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그녀의 대답이 환청처럼 들려온다.

있었다면, 그 말에 분명 그렇게 대답했을 그녀였다. 진한 슬픔을 감추고서 말이다.

문득 그 얼굴이 무척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지닌 독고혜와는 다른, 순수하고 맑은 그것이 가슴을 찌르르하게 만들어 놓았다.

‘내가 갈 것이다. 살아만 있어 다오.’

* * *

관산악은 무거운 기색으로 술잔을 기울였다. 여전히 전신을 천으로 둘둘 감은 철무옥도 함께하고 있었다.

관산악이 슬쩍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소천이 오기를 기다리지 않으시고 가시다니…….”

“수란의 상황을 생각하면 당연히 그러셔야지요. 노주야 걱정이 없다만 수란은 다르지 않소. 나라도 벌써 찾아 나섰을 것이오. 주모님도 그러기를 원하셨을 테고 말이오.”

철무옥의 대답에 관산악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함께 따라나설 것을 그랬나?”

“우리가 성에 있어야 주공께서 마음을 놓으시지 않겠소. 백홍을 데리고 가셨으니 먼저 떠난 사람들과 곧 만나실 수 있을 것이오. 그리고 진무가 진법을 설치하고 있소. 하늘이 무너져도 멀쩡하다고 그럽디다.”

철무옥이 갈라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직 독기가 완전하게 가시지 않은 그는 환자라는 느낌이 다분했다.

진법을 설치하는 이유를 알고 있는 모두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술잔을 들었다.

“생각보다는 분노하신 것 같지가 않아서 마음이 놓이는군. 사실 무척 걱정했거든. 나는 주공께서 그대로 정도맹으로 달려가실 줄 알았다.”

“속단하기엔 이르지 않겠소. 어제 성을 찾았던 정도맹의 인사를 대하실 때 확실히 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꼈소. 보고 있는 내가 소름이 돋을 정도였으니…….”

철무옥의 말에 관산악도 수긍했다. 그 역시 혁련천후가 육승을 대하는 태도를 곁에서 지켜보았지 않은가.

“새끼들이 왜 주모님을 노렸을까요.”

“주모님을 이용해 주공을 흔들 목적이었을 거다. 두 분의 십 년 세월은 이미 천하에 소문이 자자하게 퍼진 상태가 아니냐. 어쩌면 주공의 치명적인 조문이 주모님이라 여기고 노렸을 것이다. 당연히 놈들의 도발에 준비했어야 했는데…… 다소 우리가 안일했어.”

관산악이 술잔을 꺾으며 말하자 철무옥의 얼굴이 이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관산악이 피식 웃으며 그를 달랬다.

“잘못은 우리 모두에게 있으니 과민한 반응은 삼가라.”

“젠장! 솔직히 별 도움이 되지 못해 창피해 죽을 맛이오.”

벌컥벌컥!

당률과의 일만 떠올리면 저절로 살기가 솟아나는 철무옥이었다. 그는 술을 동이째 들고 마셨다.

“아이들의 경지가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조금만 더 박차를 가하면 상당한 전투력의 상승을 얻을 수 있으니 노주와 주공이 돌아오실 때까지 우리는 아이들의 수련에 집중하는 것이 좋겠다. 물론 우리도 노주께서 전수하신 무공을 완벽하게 익혀야겠지.”

“그거야 당연하지만 당최 신이 나야 뭘 해도 할 것이 아니오. 마음 같아선 몸만 나으면 사파의 아무 곳이나 쳐들어가서 모조리 쓸어버려야 직성이 풀리겠소. 빌어먹을!”

탁!

철무옥이 술동이를 내려놓고는 벌떡 일어섰다.

“이 몸은 약수에 몸을 담그러 가야겠소. 많이 드시우.”

“근질거리면 불러라. 아주 자근자근 밟아 줄 테니…….”

“흐흐! 그러지요.”

철무옥이 뒤뚱거리며 거처를 나갔다.

지금의 모습과 지난날, 싸우자고 눈에 불을 켜고 덤벼들던 그를 생각하며 관산악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때 홍무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언제나 그의 손엔 술과 요리가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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