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
<귀환무사 178화>
“그냥 갖고 놀다가 죽이면 될 것을…….”
“대원들의 불만이 작지 않습니다. 대형! 그 계집 때문에 죽어간 대원들이 서른을 넘습니다. 저 같은 처사는 저도 솔직히 이해되지 않습니다.”
“닥쳐라! 함부로 입을 놀리다간 너나 나나 언제 죽을지 모른다. 몸이 근질거리면 아이들을 보내 계집 몇을 잡아오라고 시켜! 대신 저 계집은 절대 건들지 마라!”
대형이라 불린 이자가 바로 지난날 영호수란에게 아수라마기로 중상을 입혔던 바로 그 인물이었다.
부상막의 이인자인 요랑과 부상막의 차기 대권을 놓고 경쟁을 벌이고 있는 그도 막주에 대한 두려움을 드러내었다.
“천왕이라는 자가 중원 정벌의 대가로 광동 이남을 우리에게 준다고 했다는데, 그곳은 이미 용성에게 내주기로 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습니다.”
“용성은 사사로운 복수심을 이기지 못하고 신마성과 한판 붙으면서 연합에서 제외되었다. 단독으로 신마성을 친 것부터가 잘못된 것이지. 물론 놈들에게 받은 돈 때문에 우리도 돕기는 했다만, 어찌 되었든 경쟁자 하나가 사라진 셈이니 우리로선 손해 볼 것도 없다.”
의구심을 드러내었던 자들이 수긍하는 기색을 보이자 그는 다시 명령을 내렸다.
“모두들 삼교대로 돌아가며 경계를 서도록 한다. 의심되는 자가 접근하면 적아를 구분 말고 즉참해도 좋다!”
“예!”
모두가 밖으로 뛰쳐나가자 철립인은 느긋하게 의자에 몸을 묻었다.
살짝 벌어진 철립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가 알 수 없는 기운으로 번들거렸다.
“늦어도 너무 늦는군. 혹 신마성의 놈들에게 모조리 당한 것은 아닐 테지.”
그는 동영어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 * *
영호수란이 갇혀 있는 곳은 꽤나 정갈한 방이었다.
방전체가 대나무를 엮어 만든 그곳은 사람 둘이 겨우 몸을 눕힐 만한 좁은 공간이었다.
“하아…….”
한숨을 내쉬는 영호수란의 안색은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추격전을 벌이던 도중에 부상을 입고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났더니 바로 이곳이었다. 정확한 날짜는 몰랐지만 어림잡아 보름은 지난 듯싶었다.
그녀는 하루하루를 불안감에 사로잡힌 채 살아야 했다.
특수한 수법으로 내공을 제어한 까닭에 혹시라도 복면인들이 음심을 품기라도 하는 날엔 그저 혀를 깨무는 수밖에 없다.
그녀는 혁련천후를 떠올렸다. 그와 오왕이 자신을 구하러 올 것만을 기대했지만 점점 더 암울함에 기력마저 잃어 갔다.
그때였다.
탁!
문이 열리며 철립인이 들어섰다. 영호수란은 잔뜩 몸을 움츠리고는 죽립인을 노려보았다. 죽립인은 영호수란의 앞에 놓여 있는 그릇을 내려다보고는 말했다.
“고집을 부려 봤자 소용없다. 살고 싶으면 음식을 먹어라.”
“신경 끄시지.”
냉랭하게 대꾸하는 영호수란. 이미 이런 상황에 익숙한 듯 죽립인은 별다른 반응 없이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후후! 굶어서 죽기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그럼 곤란하지. 넌 최후에 사용될 우리의 비밀 무기이니 말이다.”
“닥쳐!”
“마음만 먹으면 지금이라도 너를 죽일 수도, 마음껏 유린할 수도 있다. 어디 시험해 볼까? 당장!”
“……!”
영호수란의 낯빛이 창백하게 변했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 하지만 유린을 당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혀를 물고 죽어도 마음속에 품은 혁련천후를 저승에서도 보지 못한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철립인의 눈동자에 잠깐 탐욕의 빛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 눈빛을 영호수란은 놓치지 않았다.
“더럽혀지기 싫으면 음식을 먹어라. 내 마음이 바뀌기 전에…….”
영호수란의 두 손이 저절로 음식을 향했다. 그러더니 음식을 입에 쑤셔 넣기 시작했다. 서러움과 두려움 때문일까. 눈가로 눈물이 흘렀다.
“진즉에 그럴 것이지. 네가 사랑하는 그놈을 만날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이라도 가져 보려면 살아 있어야지 않겠느냐, 후후후.”
탁!
철립인이 나가자 영호수란은 고개를 숙이며 오열했다.
지금이라도 혀를 물고 죽으리라 마음을 먹어 보지만 그러기엔 혁련천후에 대한 사랑이 너무 컸다. 비록 혼자만의 사랑이었지만 죽더라도 그를 한 번이라도 보고 죽어야 했다.
“흑……!”
그녀는 기어코 바닥에 엎드리며 오열을 터트렸다.
제2장 추격 (2)
영호수란을 찾아 움직이던 조윤과 왕전 등은 우연하게도 흑야와 진천등과 합류할 수 있었다.
진천에게 물어보았지만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는 답이 돌아오자 모두는 실망감을 떨쳐 내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움직였을까. 모두는 시신이 떼로 나뒹굴고 있는 현장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독하군, 모조리 일 검에 날아갔어.”
“십전무제겠지?”
“아마도.”
죽은 자들을 살펴보던 흑야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무공을 감추고 있었군.”
“아무튼 대단한 노인네야. 이 정도면 노주와 주공을 제외하면 거의 천하무적이겠어.”
모두는 영호도성의 무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때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주변을 살피던 진천이 서북방향을 가리키며 외쳤다.
“저쪽입니다!”
모두의 고개가 서북 방향으로 돌아갔다.
“확실하냐?”
“제가 누굽니까, 어서 이동하시죠.”
“잠깐!”
흑야가 몸을 날리려는 모두를 불러 세웠다. 모두가 그를 돌아보았다.
“접근하는 놈들이 있다.”
“그렇군.”
간발의 차이로 왕전과 조윤 등도 다가오는 기척을 감지했다. 모두는 재빨리 숲 속으로 몸을 숨겼다. 뒤이어 여섯 명의 죽립인들이 장내로 들어섰다.
“이럴 수가!”
참혹한 현장을 발견한 죽립인들이 경악을 했다.
죽은 자들은 모두 그들의 동료였다. 이들은 철립인이 먼저 떠난 자들을 찾아보라고 보낸 바로 그 죽립인들이었다.
“한 명도 빠짐없이 몰살을 당했습니다!”
“빌어먹을! 신마성과 가깝다더니 아무래도 놈들에게 당한 모양이다. 서둘러 돌아가서 보고해야 한다! 가자!”
그들이 바닥을 차고 몸을 날리려고 할 때, 왕전과 흑야등이 유령처럼 모습을 드러내었다. 놀란 죽립인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채채챙!
“누구냐!”
“물어보면 대답할 줄 알았냐?”
부상막의 고수들은 상대가 고수라는 것을 깨닫고는 재빨리 일렬 횡대로 늘어섰다. 왕전이 코웃음을 치며 앞으로 성큼 나섰다.
“묻는 말에 대답하면 고통 없이 죽여 준다.”
“…….”
“비켜.”
흑야가 왕전을 밀치며 앞으로 나섰다. 그가 흑야임을 알아본 죽립인들의 눈빛이 급격히 흔들렸다. 살수들의 세계에서 흑야는 제왕이다.
그 명성은 동영에게까지 소문이 파다하게 나 있었다.
“나 흑야는 너희들과 동종의 무공을 익혔지. 그렇다면 내게 어떤 고문 기술이 있는지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 믿겠다. 해서 경고하는데,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경험을 해 보고 싶다면 저항해도 좋다.”
“한 놈만 잡으면 될 것을!”
북궁천소가 흑야의 옆을 스쳐 지나가며 다짜고짜 죽립인들을 덮쳤다. 왕전도 씩 웃더니 흑야의 좌측을 스쳐 지나갔다.
한 명을 남기고 모조리 다 죽이는 데 걸린 시간은 눈 깜박할 찰나에 불과했다.
“형님, 제게 맡겨 주세요. 주공께 얼마 전에 배운 게 있는데 요럴 때 딱 긴요하게 써먹을 수 있는 겁니다.”
“그게 뭔데.”
“제뇌심공이라고, 이지를 제압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털어놓게 만드는 일종의 사술입니다.”
진천은 혁련천후에게서 배운 제뇌심공을 이용해서 영호수란이 있는 곳을 알아낼 작정이었다. 모두의 낯빛이 기대감으로 물들었다.
“우리와 적이 된 네놈의 운명을 원망해라.”
제뇌심공이 펼쳐졌다.
진천이 펼치는 제뇌심공은 혁련천후의 그것보다 더욱 강력했다. 환술이 더해진 탓이었다. 죽립인은 모든 것을 술술 털어놓고는 맥없이 쓰러졌다.
조윤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덕분에 생각보다 수월하게 풀리는군.”
“그래도 서둘러야지 않겠냐.”
“당연하지.”
파팟!
모두는 섬전처럼 숲을 헤치며 내달리기 시작했다.
* * *
복건성은 예로부터 수로가 무척 발달된 곳이다.
복건성에서 강을 따라 하루를 가면 바다가 나온다.
육로와 바다로 이어진 천혜의 환경 탓에 선박을 이용한 물자수송이 발달하였으며 거기에 덩달아 각종 수산업역시 성시를 이루는 곳이 복건성이다.
상업이 발달하다 보니 사람들은 당연히 넘쳤고 각국에서 모여든 각양각색의 인종들로 별천지를 이루었다.
사람이 많으면 당연히 객잔도 성업을 하기 마련인데, 복건성에는 천하가 인정하는 최고의 객잔이 있다.
바로 복건제일루가 그곳이다.
삼 층 규모로 지어진 이곳은 각국의 상단들이 자주 들르는 곳으로 음식 맛이 좋기로 소문이 난 곳이다.
중원의 음식뿐만이 아닌 여러 나라의 각종 음식들을 맛볼 수 있는 덕에 이곳은 언제나 각국의 상인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는데, 오늘도 모든 층이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손님들로 넘쳐 났다.
가장 비싸다는 삼 층도 마찬가지였는데, 삼 층의 가장 구석진 곳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이는 죽립인이 있었다.
허리춤에 찬 장검이 인상적인 그는 간혹 벌어진 죽립사이로 객잔을 날카롭게 살폈다.
“맛있게 드십시오.”
점원이 탁자에 요리를 놓고 돌아가자 젓가락을 집어가던 인물이 안광을 번득였다.
잠시 요리를 노려보듯 쳐다보던 그는 이내 식사를 시작했다. 그때 입구에 또 다른 죽립인들이 들어섰다.
그들은 곧장 죽립인을 향해 다가왔다.
“다른 곳으로 이동하던 성의 무사들이 놈에게 몰살을 당했습니다.”
팍!
젓가락이 가루로 화해 흩날렸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든 이동 방향이 일존의 귀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성주님마저도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 일단은 그들에게 가시는 것이 안전할 것 같습니다.”
“……!”
“서둘러야 합니다.”
홀로 술잔을 기울이던 죽립인은 바로 용성의 주인, 손유였다.
혁련천후와 오왕에게 쓴맛을 보고 그 이후에는 혁련강에게 무참히 패배를 맛보고 남쪽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