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
<귀환무사 177화>
* * *
아수라마기에 당한 독고혜의 상태는 며칠이 지나도록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혁련강과 영호수란의 행방도 여전히 묘연했다.
덕분에 신마성의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무겁고 침통했다.
신마성에서 가장 높은 지점에 위치한 첨탑에 왕전과 북궁천소, 조윤이 모여 있었다. 평소라면 시끌벅적할 그곳이 오늘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부상도 다 나았으니 우리도 찾아 움직여야 하는 거 아니냐.”
왕전의 말에 조윤이 고개를 저었다.
“주공께서 주모님 때문에 저러고 계신데 그럴 순 없다. 또 적들이 언제 들이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성을 비울 수야 없지.”
“그렇다고 이렇게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느냐.”
“당분간 적들도 쉽사리 움직이지는 못할 거다. 하니 조윤, 네가 주공께 다녀와라. 허락을 하신다면 곧장 움직여야겠다.”
북궁천소의 그와 같은 말에 조윤은 미간을 좁혔다.
그도 영호수란을 찾아 움직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혁련천후가 독고혜 때문에 두문불출하고 있어서 성을 비울 수가 없었다.
해서 흑야와 진천, 관산악을 먼저 보내야 했었다.
‘하긴 그토록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니 한동안은 놈들도 쉽사리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조윤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공께 가는 것이냐.”
“그래, 너희들의 말따나 이러고 있으려니 마음이 편치 못해서 죽을 맛이다. 가서 허락을 여쭙고 오마.”
조윤이 첨탑 아래로 훌쩍 몸을 날렸다.
그는 독고혜와 혁련천후가 있는 별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반쯤 탈진을 한 상태로 늘어져 있는 사공진무가 보였다.
“네가 고생이 많구나.”
“고생은요, 괜찮습니다.”
목소리에 힘이라고는 하나 없었다. 사실 독고혜를 치료하는 일은 상당한 내공의 소모를 필요로 했다. 덕분에 하루에 한 번은 탈진 상태를 보이곤 했다.
조윤이 그를 위로하며 물었다.
“좀 어떠시냐?”
“호흡은 꽤 좋아지셨습니다만, 의식이 언제 돌아오실지는 아직 예측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다만 혈맥을 막았던 아수라마기가 옅어지면서 더 이상이 악화는 막을 수가 있어졌습니다. 그나마 다행이지요.”
맥없이 대답을 한 사공진무가 혁련천후가 있는 별실을 흘긋 쳐다보고는 다시 조윤을 바라보았다.
“주공께 볼일이 있어 오셨습니까?”
“그래.”
조윤은 선뜻 별실로 들어가지 못했다.
그 어떤 것으로도 혁련천후의 심경을 혼란스럽게 하고 싶지가 않아서였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어지간하시면 말씀을 드리지 않은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 그래야겠지.”
“솔직히 주모님도 그렇지만 주공이 더 걱정입니다. 보름 동안 물조차 입에 대지 않으셨습니다. 음식이야 그렇다고 쳐도 이러다가 자칫 심마에 빠지는 것은 아닐지…….”
“쓸데없는 소리!”
조윤이 당치도 않는 말은 하지도 말라는 투로 사공진무를 나무랐다. 그는 잠시 별실을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수고해라.”
“염려 놓으시고 돌아가세요.”
사공진무의 어깨를 다독거려 준 조윤이 몸을 돌려 걸음을 놓으려고 할 때였다.
혁련천후의 음성이 조윤을 돌려세웠다.
“조윤이냐?”
“예! 주공!”
조윤이 황급히 돌아섰다.
“내게 전할 것이 있어서 온 것이냐.”
“그게…….”
조윤이 사공진무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사공진무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을 해 주라는 눈짓을 보냈다. 입술을 지그시 깨문 조윤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십전무제께서 손녀를 쫓아 홀로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먼저 떠난 놈들에게서 아직 아무런 기별조차 없습니다. 해서 제가 직접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혁련천후는 대답이 없었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조윤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고는 혁련천후의 답을 기다렸다.
“십전무제를 찾으면 전해 주거라.”
“…….”
“지켜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알겠습니다.”
말은 그것이 끝이었다.
더 이상 혁련천후가 말이 없자 조윤은 별실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는 돌아섰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그러마, 수고해라.”
조윤이 밖으로 나가자 사공진무는 크게 기지개를 켜며 일어섰다. 그러고는 별실 안의 혁련천후를 향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아수라마기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조금 전부터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허면 지금부터는 주공의 내공으로 틀어진 혈맥을 바로 잡으셔야 합니다.”
“…….”
“혈맥이 정상으로 돌아오면 그때 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마.”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사공진무는 안타까움이 그득한 눈으로 별실을 응시했다. 혁련천후의 마음을 헤아리면 가슴 한쪽이 짠해지곤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걱정 마십시오. 이 사공진무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반드시 구해 드리겠습니다.’
내심 뇌까리는 사공진무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갔다.
* * *
이름 모를 산의 초입에서 한바탕 폭풍이 휘몰아쳤다.
“이놈들!”
창노성을 터트리며 폭풍처럼 몰아치는 인물은 바로 십전무제 영호도성이었다.
그는 지금 복면을 한 자들을 상대로 살수를 전개하고 있었다. 지금 그는 평소의 그가 아니었다.
분노로 일렁이는 두 눈은 연신 살광을 뿜어내었고 강기를 머금은 검은 귀신불처럼 허공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그를 오성의 일인으로 만들어 준 영호세가의 검법은 도망을 가는 자, 부상을 입어 바닥에 쓰러진 자를 가리지 않고 찢어발겼다.
“빌어먹을!”
누군가의 입에서 당혹성이 터졌다.
“멸천조가 올 때까지 최대한 버텨라!”
누군가가 독려하고자 큰 소리로 외쳤지만 영호도성의 무지막지함에 서서히 대열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퍽!
“크악!”
또한 명의 복면인이 머리가 날아갔다.
영호도성은 이미 죽은 자를 향해 검강을 퍼부었다. 갈기갈기 찢긴 육편이 다른 복면인들을 향해 모조리 날아갔다.
“으아악!”
두 명이 더 피를 뿌리며 날아갔다.
모두가 사방으로 흩어지며 폭발의 범위에서 벗어나려 애를 썼지만 또 다시 한명이 목이 뎅강 날아갔다. 복면인들의 눈빛이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살아남은 자들이 악을 쓰며 검을 동시에 휘둘렀다. 죽기를 각오한 그들의 연합공격은 꽤나 거셌다.
그러나 영호도성은 거침없이 그들의 공세 속으로 뛰어들었다. 육신이 흐릿하게 변하며 사방이 번쩍이는 검강으로 난무했다.
오성 중에서도 가장 강자로 평가받던 십전무제의 폭발적인 공세는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복면인들의 공격은 그가 일으킨 검막을 뚫어 내지 못하고 모조리 튕겨 버렸다.
되레 자신의 검이 심장이 꿰뚫려 쓰러지는 자들도 있었다.
“으…….”
이제 살아남은 자들은 고작 넷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들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다. 개미지옥에 빠진 벌레처럼 그들은 더 이상 다리를 떼 놓을 수 없었다.
영호도성이 비로소 검을 거두며 싸늘히 말했다.
“네놈들이 납치를 한 아이의 행적을 대거라. 그러면 고통 없이 죽여 주마.”
“물러간다!”
복면인들이 사방으로 몸을 날려 도주를 감행했다. 하지만 영호도성의 검은 결코 도주를 허락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셋이 허망하게 목숨을 잃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도 피를 꾸역꾸역 게워 내면서 꼬꾸라졌다.
“냉큼 대답하거라, 이놈!”
피로 얼룩진 검이 복면인의 어깨에 닿았다. 복면인이 머뭇거리자 사정없이 팔 하나를 잘라 버렸다.
“크아악!”
이번에는 다리를 겨누며 물었다.
“어디로 데려갔느냐.”
“여기서 동북 방향으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영호도성은 복면인의 머리를 쳐 냈다. 여전히 살광의 잔재가 남아 있는 영호도성의 시선이 복면인이 말한 동북쪽을 향해 돌아갔다.
“곧 데리러 가마…….”
* * *
이름 없는 산의 초입에 곳곳이 낡고 허물어진 커다란 장원이 있었다.
폐가처럼 보이는 그곳에 꽤 많은 자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가 하나같이 핏빛 죽립을 깊숙이 내려쓴 자들이었다.
부상막의 살수들이었다.
대충 짐승의 가죽을 씌워서 만든 커다란 의자에 다른 자들과는 판이한 분위기를 지닌 자가 앉아 있었다. 다른 자들과는 확연히 다른 철립을 쓰고 있었다.
“흔적을 지우러 간 아이들이 너무 늦습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당한 것은 아닌지 걱정입니다.”
한 죽립인의 말에 철립인은 묵묵부답, 대답이 없었다.
그러다가 입을 열었다.
“누가 가서 확인을 해 보고 오너라.”
“예!”
“그곳은 신마성의 권역과 가까운 곳이다. 만에 하나 먼저 떠난 아이들이 실패를 했다면 너희들이 반드시 모든 시신을 독으로 녹여 버려야 한다. 그리고 처리가 끝나면 최대한 은밀하고 신속하게 처리하고 돌아와야 한다. 자칫 놈들에게 뒤를 잡히기라도 한다면 본대의 위치가 노출이 될 수도 있음을 명심하거라.”
지극히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리고 어딘가 모르게 어색한 느낌도 들었다. 다른 죽립인이 물었다.
“굳이 죽은 동료들의 시신을 왜 녹이려 하십니까.”
“멍청한 놈! 우리 모두의 몸에는 암호화된 문신이 그려져 있음을 잊었느냐. 만에 하나 본 막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놈이 있다면 자칫 본대의 위치가 드러날 수도 있다.”
그 말에 복면인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몇 명이 빠르게 장원을 빠져나가자 수장으로 보이는 자는 다른 것을 물었다.
“계집은 어찌하고 있느냐?”
“금제를 가해서 안전한 곳에 가두어 놓았습니다만…… 노리는 아이들이 많은지라 단속에 꽤 애를 먹고 있습니다.”
철립인의 눈동자가 다시 섬뜩한 빛을 발한다.
“어떤 놈이든 계집에게 손을 대면 죽음이다. 만약을 대비하여 계집은 온전한 상태, 그대로 두어야만 한다. 알겠느냐!”
“그리 일러 두었습니다.”
의자의 인물이 몸을 일으켰다.
“만약을 대비하여 철저히 경계하고 너는 아이들이 돌아오면 곧장 내게 보고하도록!”
그가 장원의 뒤쪽으로 들어가자 나무토막처럼 부동자세를 보였던 죽립인들이 그제야 자세를 고쳤다. 보고를 했던 자가 장원의 뒤쪽을 흘긋 쳐다보고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