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
<귀환무사 176화>
제1장 추격 (1)
정도맹주 나백이 자신의 거처에서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요즘 들어 그는 뭔가 잘 풀리지 않으면 손에 쥔 물건을 끊임없이 만지작거리는 버릇이 생겼다. 고려에서 고가에 수입된 찻잔이 나백의 손짓에 몸살을 앓고 있었다.
장로들의 보고를 받고 자신의 거처로 돌아온 시각이 반 시진 전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백은 심각한 고민에 휩싸여 있었다.
작금의 상황에서 정도맹에 가장 큰 힘이 되어 줄 세력이 결별을 선언한 것이다. 그것도 단순한 결별이 아닌, 어쩌면 적대적인 관계로 돌아설 수도 있음을 뜻하는 묘한 분위기까지 전해졌다.
“휴…….”
나백은 짙은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완연한 겨울로 접어든 계절 탓에 창을 열자 찬 바람이 들이쳤지만 나백에게는 한여름의 뜨거운 바람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의 시선이 먼 곳을 향했다.
저 멀리 화산이 희미하게 비쳤다. 그 너머에 백어산이 있고, 신마성이 있다.
나백을 심란하게 만든 곳은 바로 신마성이었다.
덜컹!
문이 열리며 비영전주 육승이 나웅이 함께 들어왔다. 나백이 조금은 서두르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어찌 되었는가?”
“여전히 같은 답을 할 뿐입니다.”
대답하는 육승의 표정이 매우 무겁다. 그는 요즘 들어 부쩍 수척해진 나백을 보며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나백이 다시 물었다.
“검후의 상세는 어떻다고 하던가?”
“유일하게 본 맹의 정보망에서 비껴 있는 곳이라 알아낼 방도가 없습니다.”
신마성은 구성원이 다른 문파에 비해 현저하게 적다. 지원자를 뽑아도 갈 사람이 없다. 워낙에 무시무시한 존재들이 득실거리기 때문이었다.
육승이 말을 이었다.
“백어산 근처에서 활동 중인 아이들의 말에 의하면 지금껏 혁련성주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추측하건대, 검후의 부상 때문이라면 그 정도가 조금은 심각한 것이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대체 상관명, 그자가 왜 그런 무모한 짓을 벌였단 말인가. 허어…….”
탄식을 쏟아 낸 나백이 다시 말했다.
“의원을 보내 주려는 것은 어찌 되었는가?”
“일언지하에 거절당했습니다.”
“거절을 했단 말인가.”
“예, 워낙에 강경하여 다른 말은 차마 꺼내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사공진무가 의술에 통달했음을 모르고 있었다. 해서 신마성이 대정문이 정파라는 것 때문에 반감을 가졌으리라 추측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기도 했다. 지금 신마성에서는 정도맹과 손을 잡는 것을 강하게 반대하는 기류가 조성되고 있었다.
“문제는 맹 내에서 신마성의 잔혹함을 입에 담는 세력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원래부터가 신마성이 주목을 받는 것을 시기하던 자들인데, 대정문과의 사건 이후로 기다렸다는 듯이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자칫 맹이 분열되는 것은 아닐지, 그 점이 걱정입니다.”
“신마성의 잔혹함을 입에 담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대정문의 문도들 중 이백에 가까운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목격자들의 말에 의하면 부상을 입어 전투 능력을 상실한 자들마저도 무참히 도륙을 내었다고 합니다. 누구든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신마성의 처사가 지나쳤다고 여길 수도 있는 부분입니다.”
나백의 낯빛이 더욱더 무겁게 굳어졌다. 그는 돌연 육승에게 정색을 하고서 물었다.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난국을 타개하려면 신마성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점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육승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나백이 또 물었다.
“주도하는 자가 누구인가?”
“화산과 무당 그리고 영호세가, 남궁세가, 백리세가를 제외한 대부분의 문파에서 같은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 말에 나백의 얼굴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설마하니 신마성을 비난하는 문파가 이렇게 많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소림도 동조한단 말인가?”
“아직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는 있습니다만 적어도 신마성을 옹호할 곳은 아닙니다. 태산북두로 군림을 해 온 그들이니 작금의 무림을 뒤흔드는 신마성의 명성이 껄끄럽지 않겠습니까.”
나웅의 말에 나백은 탄식을 터트렸다.
“사련을 궤멸시키고 용성과의 전쟁에서도 막대한 도움을 준 그들이거늘, 어찌 다들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조금은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정파를 대표하던 대정문이 하루아침에 멸문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수뇌부가 자칫 신마성을 옹호하는 뜻을 보이기라도 하는 날엔 맹은 그날로 분열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코 틀린 말이 아니었다. 신마성의 급부상에 상대적으로 경계심을 보이는 문파들이 적지 않은 게 사실이다.
게다가 생존한 사천왕의 삼 인 중, 남궁기를 제외한 다른 둘이 평소부터 신마성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도 나백으로서는 상당한 골칫거리였다.
어쩌면 그들에게 대정문의 참사는 좋은 먹잇감이 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일단은 신마성을 자극할 수 있는 그 어떤 말이나 행동도 없어야 할 것이네. 신마성을 비난하는 세력들에게 이 점은 반드시 전해 주게나. 만에 하나, 그들마저 우리에게 등을 돌리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우린 결코 이 강호를 지켜내지 못할 것임을 말이야. 생각이 있는 자들이라면 그 정도로만 말을 해 줘도 섣부른 행동은 하지 못할 걸세.”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나백이 답답한 표정을 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육승이 머리를 조아리고 밖으로 나가자 나웅이 조심스럽게 나백의 표정을 살피다가 말을 꺼냈다.
“맹의 사자로 삼아 주신다면 제가 신마성엘 한번 다녀오겠습니다.”
“네가 말이냐.”
“예, 가서 대략적인 분위기라도 파악을 해 보겠습니다.”
나백이 돌연 단호한 어조로 호통을 쳤다.
“방금 내가 한 말을 듣지 않았더냐? 당분간은 그들의 심기를 자극해선 아니 된다고 말이다. 못난 놈! 아직도 그 아이를 잊지 못했더냐. 이젠 절대로 넘봐선 안 될 신분이 되었거늘 어찌 떨쳐 내지 못한단 말이냐!”
속내를 들킨 나웅은 고개를 숙였다. 설마하니 나백이 이렇게 과한 반응을 보이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나백의 호통이 이어졌다.
“그런 정신 자세를 지니고 있으니 네 경지가 지금껏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게다! 대정문이 왜 멸망의 길을 걸었는지 생각해 보아라! 이놈!”
“…….”
“꼴도 보기 싫다! 냉큼 물러가거라!”
나웅은 어쩔 수 없이 물러나야 했다.
밖으로 나온 그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짙은 한숨을 토해냈다. 그도 미칠 지경이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검후를 잊으려 그렇게 노력했건만 도저히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애틋한 감정만 더욱더 깊어질 뿐이었다.
때론 혁련천후에 대한 원망을 할 때도 있었다.
“후우…….”
고개를 세차게 흔든 나웅은 맹의 외곽에 위치한 영웅각을 향했다.
언제나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면 찾던 그곳이 지금으로선 그에게 가장 위로가 될 만한 장소이다.
정도맹의 뒤쪽에 위치한 작은 철문을 통해 성곽을 빠져나간 나웅은 겨울의 찬 바람을 들이마시며 느릿하게 영웅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조금씩 산을 오르자 저 멀리로 섬서의 번화한 야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언제나 이곳에 올라 야경을 바라다보며 검후와의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곤 했던 나웅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아름다웠던 미래에 대한 희망은 혁련천후가 나타나면서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나웅은 괜히 울컥해져 눈시울마저 붉혔다.
그때였다.
“네가 나웅이라는 애송이냐?”
숲 뒤쪽에서 싸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나웅이 재빨리 일어서며 뒤돌아섰다.
“누구냐!”
“누구긴 너를 죽이러 온 사람들이지.”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곳에 그림자가 늘어서 있었다.
어둠 속에서 유령처럼 서 있는 자들은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가운데 선 자의 눈동자가 강렬한 빛을 발했을 뿐이다.
“감히 이곳이 정도맹임을 알면서도 나를 죽이려고 왔단 말이냐!”
“너 따위를 죽이는데 장소를 가릴까, 후후후.”
유령처럼 서 있기만 하던 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깨를 슬쩍 흔든다 싶더니 어느새 나웅의 주변을 완벽하게 포위하며 영웅각으로 올라섰다. 신법만으로 그들의 수준을 가늠한 나웅은 상황이 녹록치 않음을 깨닫고는 눈빛을 굳혔다.
‘혼자서는 감당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다. 기회를 봐서 선공을 가하고 이 자리를 피하는 수밖에 없다.’
나웅은 재빨리 판단을 내렸다.
“과연 정도맹, 최고의 기대주답군. 죽이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야.”
“누군지 정체부터 밝히시지.”
“암흑마조라고 하지! 물론 네놈들 정파에선 처음 듣겠지만…….”
의외로 죽립인들은 순순히 자신들의 정체를 밝혔다. 대게 이럴 땐 죽어 저승에 가면 물어봐라, 라는 식으로 답을 한다.
나웅의 얼굴이 더더욱 긴장감으로 물들었다. 신분을 드러낸다는 것은 곧 자신을 죽이겠다는 뜻과 그럴 자신이 있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긴장감이 몰려왔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나를 죽이려는 이유가 무엇이냐!”
“네놈이 제법 큰 역할을 할 듯해서 말이지. 굳이 표현을 하자면 일종의 보험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넌 오늘 이곳에서 죽는다.”
“나를 인질로 삼을 생각인가 본데, 어림없는 소리! 어디서 온 놈들이냐?”
“후후! 의외로 멍청한 구석이 있군. 인질을 죽이는 사람도 있나?”
가운데 선 자의 눈빛이 섬뜩함을 발했다. 그것이 신호였는지 다른 자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며 나웅을 향해 압박해 들어갔다.
‘위험하다.’
나웅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그는 검을 잡은 손에 내공을 끌어 담고는 일격을 준비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곳을 빠져나갈 공간을 살폈다. 하지만 사방이 완벽하게 차단을 당한 상태여서 누구 하나는 죽여야 탈출이 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들이군. 감히 정도맹의 한복판에서 맹주의 손자를 죽이겠다니!”
“후후! 정도맹이 그렇게 대단한 곳은 아니지.”
상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웅이 선공을 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