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
<귀환무사 174화>
“늙은이! 너는 내가 상대해 주지!”
북궁천소가 소태를 향해 달려들었다.
전장 곳곳에 흩어져 있던 담대소천과 조윤, 흑야가 혁련천후의 옆으로 내려섰다. 혁련천후가 그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오늘만큼은 도륙을 허락하겠다.”
용성의 입장에서는 섬뜩하기 짝이 없는 명령이었다.
그때 조윤이 혁련천후의 팔을 잡으며 전음을 보냈다.
[주공! 이쯤에서 물러나 주모님을 찾으시는 것이…….]
[그렇습니다! 저깟 놈들은 다음에라도 언제든지 쳐 낼 수 있으니 당장은 주모님의 안전부터 확인을 하셔야 합니다.]
담대소천이 거들었다.
[주공! 천하만큼이나 소중하신 분입니다!]
담대소천이 다시 청했다. 소태를 공격하려던 북궁천소가 어느새 그들 옆에 돌아와 있었다. 조윤이 전음으로 불러서였다.
혁련천후의 눈동자에 갈등이 어렸다. 하지만 이내 예의 싸늘함을 되찾더니 손유를 향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조만간 네놈을 찾아가겠다. 그때는 지옥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깨닫게 될 것이다.”
쾅!
혁련천후와 오왕이 난데없이 전장에서 빠져나가자 용성의 고수들이 술렁거렸다. 꽤 많은 자들이 수뇌부들의 시선을 피해 안도하는 기색마저 비쳤다.
“이놈들……!”
손유의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너무나도 강하게 깨문 까닭이었다. 모두가 손유를 지켜보며 말을 하지 못했다. 그토록 아꼈던 아들을 죽인 원수를 눈앞에 두고도 죽이지 못한 심정을 그들은 충분히 헤아렸다.
소태를 비롯한 장로들은 침울한 얼굴로 손유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 위로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
다른 수뇌부들도 침통함을 넘어 비통함에 젖었다.
신마성 전체도 아닌 고작 다섯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것도 엄청나 피해를 입으면서까지.
“성주! 우리에겐 시간이 있소. 그리고 미래가 창창한 젊은 아이들도 아직 넘쳐 나게 많소. 그들에게 용성의 운명을 걸어 봅시다!”
“그때까지 기다릴 순 없다! 저놈의 목은 반드시 내 손으로 잘라야 한다. 곧 있으면 그들이 움직인다. 그때 누가 저놈을 베어 버릴지 모르는 일이다. 아들의 원한을 다른 자의 손을 빌어 갚을 순 없는 노릇이니 내게 미래 따위는 말도 꺼내지 말거라!”
악을 쓰듯 외치는 손유에게서 폭주의 기운이 느껴지자 장로들은 더는 나서지 않았다.
이럴 땐 그저 지켜보는 것이 최선임을 그들도 알고 있었다.
손유는 혁련천후가 사라져간 곳을 노려보며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렇게 시간이 좀 흐른 뒤에 장로 소태가 다시 나섰다.
“성주의 마음을 어찌 모르겠소. 하니 지금 당장은 이곳에서 물러가야 하오. 가서 놈을 무너뜨릴 새로운 방도를 마련합시다. 우리들이 성주를 돕겠소!”
파르르…….
손유의 눈빛이 흔들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냉철함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러자 가슴을 후벼 파는 통한이 밀려들었다.
이제 돌아가면 언제 중원으로 다시 돌아올지 기약조차 못한다. 그렇다고 이 전력으로 남아 있다간 신마성의 주력이나 정도맹을 만난다면 전멸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후일을 도모할 요량으로 물러가자니 죽은 아들이 눈에 밟혀 차마 발걸음이 떼어지지가 않았다.
그때 숲이 흔들리며 죽립을 쓴 부상막의 고수가 모습을 나타냈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돌아갔다. 반쯤 갈라진 죽립 사이로 드러난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어찌 되었는가?”
소태가 다급히 물었다.
“실패했소!”
“검후를 잡는 데 실패를 했단 말인가!”
“일존 견오가 나타나는 바람에…….”
죽립인은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러더니 이내 숨이 끊어졌다.
모두가 두 눈을 부릅뜨며 경악했다.
“일존이 왜 이곳에 나타났단 말인가!”
“설마 일존도 신마성과 함께한단 말인가. 허어…….”
용성의 수뇌부들은 불신에 찬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정 하늘은 나 손유를 버린단 말인가!”
손유가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향해 부르짖었다.
그때였다. 손유의 눈동자가 갑자기 커졌다. 이글거리는 태양의 한가운데, 그곳에 시커먼 그림자가 나타나더니 자신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
황급히 옆으로 몸을 피한 손유 대신 소태가 비명과 함께 갈기갈기 찢겨 날아갔다.
쾅!
“크악!”
느닷없는 날벼락에 용성의 고수들이 저마다 사방으로 흩어졌다.
콰우우우!
자욱하게 치솟은 흙먼지가 바람에 쓸려 옅어지면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혁련강이었다.
“일존…….”
“나를 알고 있었느냐?”
“당신과는 아무런 원한도 없거늘 어찌 우리를 공격하는 것이냐!”
장로 하나가 나서며 외쳤다. 혁련강은 무심한 표정으로 장로가 아닌 손유를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내 혈육이 목숨처럼 사랑하는 아이가 아수라진경에 몸을 상해 생사를 오가고 있다면 네놈들을 죽일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겠느냐.”
“……!”
모두는 순간 혁련강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가 뒤늦게 알아채고는 두 눈을 부릅떴다.
그가 거론한 혈육이 바로 신마성주이며 아수라진경에 몸을 상했다는 이는 바로 검후라는 것을.
손유의 입장에서는 절망감에 휩싸일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신마성주와 오왕도 벅찬데, 그들보다 더 강한 일존마저 그들의 편이었다니.
혁련강의 입에서 살기 어린 음성이 흘러나왔다.
“어디 한번 신 나게 놀아 보자꾸나. 이놈들…….”
제11장 영호수란의 실종
숲을 헤치며 달려가는 혁련천후의 머릿속은 온통 독고혜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북궁천소와 왕전을 믿었지만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심장이 격하게 뛰었다. 그때 뒤를 따르던 조윤이 외쳤다.
“저쪽인 것 같습니다!”
전방 좌측 숲이 흔들리고 있었다.
사람의 기척이었다. 혁련천후는 허공에서 방향을 틀어 쏘아진 화살처럼 좌측으로 달려 나갔다. 숲을 헤치며 들어서자 뒤돌아선 장용백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뭐냐!”
돌아보던 장용백이 혁련천후임을 알고는 히죽 웃었다.
“오셨소.”
혁련천후는 주변부터 살펴보았다.
한마디로 피바다가 따로 없었다. 곳곳에 복면과 죽립을 뒤집어쓴 자들이 쓰러져 있었다. 그들이 흘린 피로 인해 주변이 피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혹시 몰라 놈을 잡아 놓았소.”
장용백이 사로잡은 죽립인을 발로 툭툭 건들며 말했다. 혁련천후는 혈도를 제압당한 듯 꾸부정한 자세로 서 있는 죽립인을 향해 성큼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대로 목을 쳐 버렸다.
“어!”
놀란 장용백이 눈을 동그랗게 했다.
정보를 알아내려고 사로잡은 것인데, 한마디 물어보지도 않고서 목을 베어 버리다니.
“수고했소.”
그 말을 건넨 혁련천후는 다시 경공을 펼치려 했다. 이곳에는 독고혜가 없었다. 한데 바로 그때, 숲을 헤치며 악승과 신마각의 무사들이 뛰어들었다.
그는 혁련천후를 발견하고는 바람처럼 뛰어와 머리를 조아렸다.
“주모님께서 조금 전에 성으로 드셨습니다.”
“…….”
조윤을 비롯한 모두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혁련천후가 물었다.
“상태는?”
“그게…….”
악승이 말끝을 흐리자 두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북궁천소를 통해 그녀가 아수라마경에 당했다는 것을 들었다. 그래도 천살강기를 믿었기에 무사할 거라고 믿었다.
악승이 말을 이었다.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그녀를 공격한 놈들이 대정문이라고 했느냐.”
“예.”
화아아악!
싸늘한 기운이 사방으로 뻗쳐 나가자 조윤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진무를 믿으십시오, 주공.”
불꽃으로 일렁거리던 혁련천후의 두 눈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때 조윤이 악승에게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느냐.”
“화산의 두 제자가 중상을 입었습니다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합니다. 다만…….”
악승이 말끝을 흐리자 북궁천소가 버럭 하며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콱!
“우물거리지 말고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겠냐!”
“……아직 돌아오지 못하셨습니다.”
“뭣이! 하면 혼자 돌아오지 못했단 말이냐!”
“예.”
악승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어 가자 조윤이 북궁천소를 말렸다. 혁련천후가 악승에게 물었다.
“왕전은 뭐라고 하더냐.”
“전왕의 말씀으로는 추격전이 벌어지던 도중에 백선녀께서 부상을 입었다고 하셨습니다. 전왕께서도 주모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돌보지 못했다시며…….”
북궁천소가 혁련천후를 돌아보며 말했다.
“주공께선 속히 성으로 돌아가십시오. 주모님의 치료는 오직 주공만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수란은 저희들이 찾아보겠습니다.”
“천소의 말이 맞습니다. 저희에게 맡기시고 속히 성으로 돌아가십시오.”
조윤이 거들고 나섰다.
혁련천후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독고혜의 몸속에 침투한 아수라마기는 자신의 강력한 내공으로 다스려야 한다. 물론 혁련강도 가능하지만 치료 방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신이 그녀의 곁에 있어야 한다.
머릿속에 영호수란의 활짝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언제나 곁에 다가오지 못해 전전긍긍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을 열어 준 적이 없었다. 자신에게는 오직 독고혜뿐이니까.
그런데 돌아오지 못했다는 말을 들으니 심장이 차갑게 식는 느낌이었다.
‘무사하겠지.’
혁련천후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는 돌아섰다.
“반드시 찾아서 데려와라.”
“예, 주공.”
혁련천후가 자리를 뜨자 마교의 고수들이 다가왔다. 장용백이 혁련천후가 사라져 간 곳을 가리키며 넌지시 말했다.
“엄청 화가 나신 것처럼 보이는데.”
“그분께 주모님은 천하보다 더 소중하신 분이니 당연하지 않겠소. 그나저나 이거 자칫 일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 버리는 것은 아닌지…….”
조윤이 말끝을 흐리자 장용백이 눈을 치뜨며 물었다.
“일이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주모님을 노린 대정문은 정도맹 산하의 문파였소. 그런 대정문이 용성과 부상막의 사주를 받고 이 일에 가담했으니…….”
조윤의 말에 묵묵히 듣고 섰던 뇌어양이 놀랍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대정문이 이 사건에 개입되었단 말인가?”
“대정문주의 아들이 주모님을 혼자서 연모하다가 상사병에 걸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상관명이 아들의 죽음을 주모님의 탓으로 돌린 듯합니다.”
“한 문파를 이끌어 가는 수장이 어찌 그런 아둔한 짓을 벌였단 말인가.”
뇌어양이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북궁천소가 성큼 앞으로 나섰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느냐.”
“그래. 다들 서두르자.”
영호수란을 찾아 움직여야 했던 그들이 서두르는 기색을 보이자 뇌어양이 선뜻 도움을 자청하고 나섰다.
“우리도 돕겠소.”
“고맙습니다, 대종사.”
“별말씀을. 자! 자! 다들 흩어져서 움직이자꾸나!”
마교의 고수들도 영호수란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윤과 담대소천 등은 마교의 고수들과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평소에도 추종술에 남다른 재주가 있었던 조윤은 미세한 흔적까지 찾아내며 빠르게 이동했다.
그러다가 어느 지점에 이르러 조윤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을 발했다.
그는 곳곳에 뿌려진 선혈을 보며 무거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선혈이 이곳에서 끊겼다. 이런 평지에서 갑작스럽게 사라졌다면…….”
“누군가가 나타났다고 봐야겠군.”
담대소천이 묵직하게 말했다. 조윤은 재빨리 주변을 살펴보았다. 사방을 둘러봐도 절벽이나 구릉이라고는 하나 없는 편편한 평지였다.
이런 곳에서 갑작스럽게 흔적이 끊겼다면 누군가에게 잡혀 갔을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 한다.
그 누군가가 적이라는 생각이 들자 모두의 얼굴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