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
<귀환무사 169화>
‘이 작자들은 도대체 왜 지금껏 움직이지 않는 거지?’
재산의 절반을 주고 손을 잡은 자들을 떠올렸다. 며칠 전, 우연히 자신의 장원을 찾은 그들은 모두 다섯! 하나같이 지독한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그들은 어떻게 알았는지 자신에게 검후를 죽여 주겠다고 제의해 왔다.
자신의 눈앞에서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미는 가공할 속도를 경험한 그는 흔쾌히 그들의 제의를 수락했다.
그들이라면 검후가 아니라 십지신검도 두 조각으로 썰어 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껏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지금 저 무지막지한 검후의 호위들과 싸우는 문도들 틈에 그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수하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지고 있음에도 여전히 기운을 감춘 채 기회를 엿보고만 있었다. 상관명의 얼굴에 초조함과 짜증이 동시에 밀려왔다.
“대체 뭘 하고 있는 것이오!”
버럭 소리를 지르는 상관명. 그때 싸늘한 목소리가 그의 귓전으로 흘러들었다.
[전왕과 도왕을 앞에 두고 서두르다니. 죽고 싶은 것이오!]
“뭐, 뭣이!”
어색한 한어로 돌아온 전음에 상관명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도왕과 전왕이라니.
상관명은 비로소 왕전과 북궁천소가 역용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이런 개 같은 경우가…….’
그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개 같은 경우이자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는 것과 같았다.
천하의 오왕이 둘이 한자리에 있다니. 그렇다면 실패를 할 확률이 거의 구 할에 이른다. 무형지독이 오왕에게 타격을 줄지도 의문이다.
지금의 상황을 보면 무형지독도 그들에겐 통하지 않는 것이 틀림없다. 상관명은 절망감에 어금니를 악물었다.
‘하필이면 오늘따라 이놈들이 호위를 나서다니…….’
정보를 캐낸 결과 지금까지 몇 번에 걸쳐 용현을 찾았던 독고혜다. 그때마다 화산파의 제자들이 호위를 했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그래서 무조건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고 달려들었건만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에 오왕과 동행하다니…… 그것도 둘씩이나 말이다.
‘하늘이 진정 나 상관명을 버린단 말인가.’
하지만 상관명이 모르는 게 있었다. 언제나 왕전이 독고혜의 시장길에 동행을 했었다. 다만 축골공으로 변장을 했기에 정보에서 비껴나 있었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독고혜와 영호수란이 저잣거리의 바깥쪽으로 몸을 날리는 것이 상관명의 눈에 들어왔다.
상관명은 황급히 그녀들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그 앞을 왕전과 북궁천소가 막아서는 바람에 다시 뒤로 물러서야 했다.
왕전이 독고혜를 돌아보며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아직은 괜찮아요. 두 분은…….”
“끄떡없습니다!”
시간은 일각을 넘어간 지가 오래전이다.
둘을 제외한 모두는 벌써 중독이 되었어야 했지만 중독의 기미는 전혀 없었다. 모두는 금치문이 영호수란에게 선물한 반지 때문이라 여겼다.
그때 영호수란이 다급하게 외쳤다.
“더 늘었어요!”
좁은 시장통의 좌우에서 백에 이르는 자들이 길을 막아서며 우르르 몰려 나왔다.
이제 일행들이 이곳을 벗어나려면 저들을 모조리 죽이거나 아니면 하늘로 날아오르는 길밖에 남지 않았다.
“변장은 더 이상 무의미하겠군.”
“그럼 본격적으로 놀아 볼까?”
둘의 얼굴이 본연의 것으로 돌아갔다. 왕전이 청진과 청명을 돌아보며 힘주어 말했다.
“주모님 곁을 조금이라도 벗어나지 마라! 알겠느냐!”
“예!”
그때였다. 서서히 다가들던 자들 중에서 크게 놀라며 검을 떨어뜨리는 자들이 생겨났다.
쨍그랑!
“헉! 저, 전왕!”
“도왕이다!”
상관명이 그들을 독려하고 나섰다.
“제아무리 오왕이라도 결코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오왕에 대한 두려움이 쉽게 가실 리 없다. 모르고 싸운다면 모를까. 도왕과 전왕임을 알고 나면 싸울 엄두가 나지 않는 게 정상이다.
왕전과 북궁천소가 대도를 고쳐 잡고는 살기를 폭사시켰다.
“주공께 혼쭐이 나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은 기꺼이 살인마가 되어 주지.”
둘이 작정하고 살광을 폭사시키자 상관명의 초조함이 더욱더 커졌다. 왕전이 청진과 청명을 향해 말했다.
“도의 따위는 때려치우고 죽일 수 있는 놈은 무조건 죽이거라.”
“……예.”
청진과 청진은 서로를 돌아보며 눈빛을 주고받았다. 사실 둘에게는 대량살상이 가능한 환술이 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들이 왕전과 북궁천소보다 더한 위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상대가 약한 데다 한곳에 집중되어 몰려 있으니까.
둘의 양손에서 뿌연 기운이 어리기 시작했다.
“조금만 뒤쪽으로 물러서 주십시오.”
청명의 요구에 왕전과 북궁천소가 뒤로 슬쩍 물러섰다.
둘이 앞으로 나서며 손을 쭉 뻗었다. 장심에서 뿜어진 뿌연 기운들이 맹렬한 속도로 회전하며 좌우로 날아갔다. 순간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연기처럼 보였던 기운들이 이내 수백 개의 검으로 변하며 적들의 머리를 향해 우박처럼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악!”
“크아악!”
참상이 펼쳐졌다.
환술을 처음 접하는 자들이 대부분이었기에 스무 명에 달하는 자들이 미처 피하지 못하고 피를 뿌리며 고꾸라졌다. 쓰러지는 자를 피하다가 넘어지는 자들도 부지기수였다.
왕전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걸렸다.
“제법이군.”
“계속해 봐!”
청명과 청진이 다시 손을 펼쳤다.
이번에는 달랐다. 한번 당해 봤던 자들이 검막을 형성해 날아드는 검을 막아 냈다. 하지만 이번에도 대여섯에 달하는 자들이 고꾸라졌다.
상관명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수하들을 향해 고함을 질러 댔다.
“뭣들 하느냐! 모두 한꺼번에 덤비지 않고!”
상관명의 고함에 다시 달려들기 시작하는 적들을 보며 왕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충성심 하나는 죽여주는군.”
“그러다 뒈지는 거지. 퉤!”
북궁천소가 다시 달려들 채비를 했다.
독고혜도 더는 참지 못하고 검에다 내공을 끌어 담았다. 영호수란도 앞으로 나섰다.
“주모님. 저희에게 맡기십시오.”
“아뇨. 함께 싸우겠어요.”
“지금은 아닙니다. 저희가 공격을 할 때를 이용해 지붕으로 피하십시오.”
쾅!
북궁천소의 굉혈도가 가장 먼저 핏빛 강기를 뿜어내며 적들을 향해 짓쳐 들었다. 왕전의 공격이 시간 차를 두고 뒤를 이었다.
콰지지직!
“크아악!”
“으아악!
그때를 이용해 독고혜와 영호수란이 객잔의 지붕으로 뛰어올랐다.
“저기다!”
여전히 백 명에 달하는 적들이 검후와 영호수란을 쫓아 몸을 날렸다. 왕전과 북궁천소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조심하십시오!”
북궁천소의 다급한 음성이 울렸다.
독고혜의 눈에 뛰어오르는 자들 속에서 번쩍 빛을 발하며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는 빛줄기가 보였다.
독고혜가 검을 휘둘러 날아든 섬광을 쳐 냈다.
깡!
그녀의 커다란 두 눈이 가늘게 흔들렸다. 도저히 이 상황을 그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흔들리던 두 눈에 분노의 기운이 담겼다.
‘나 하나를 어쩌자고 이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키다니.’
독고혜의 검에 은은한 기운이 떠오른다.
혁련천후가 심어 준 무적의 최종 병기인 천살강기였다. 영호수란도 그녀만은 못했지만 천살강기를 검 끝에 두르고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올 테면 와 봐, 개자식들!”
제9장 복수의 끝은 허무하게
용현에서 대참사가 벌어지고 있음을 까맣게 모르는 혁련천후는 담대소천 등과 함께 여유롭게 차를 마셨다.
“주모께서 너무 늦으시는 것 같습니다.”
담대소천이 혁련천후의 빈 찻잔에 차를 채우며 걱정스러운 투로 말했다.
평소라면 벌써 돌아왔을 시간이건만 아직 돌아오지 않자 은근히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혁련천후는 그저 담담했다.
“살 것이 많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래도 뭔가 조금 이상합니다. 아무래도 아이들을 보내 봐야겠습니다.”
담대소천이 내공을 담아 연무장을 향해 가볍게 소리쳤다.
“악승! 아이들을 데리고 주모님을 마중 가거라!”
“예!”
한참 수련 중이던 악승이 이내 무사 몇을 데리고 강을 건너 빠르게 질주했다.
담대소천의 미간이 슬쩍 좁혀졌다.
“좋다고 가는군요.”
“화산의 아이들도 갔겠지.”
“벌써 산을 건넜습니다. 한데 확실히 많이 늘었습니다. 저 정도면 어지간한 구파의 장로급은 될 듯합니다.”
악승을 따라간 무사들은 다름 아닌 진호와 진명, 그리고 진청이었다.
고된 수련을 빼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그때 미풍이 일어나며 검은 그림자가 둘의 옆에 나타났다.
흑야였다.
“어떻게 되었느냐.”
“별다른 정보는 얻어 내지 못했습니다.”
그는 개방의 섬서 분타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용성과 빙궁, 그리고 다른 단체들의 움직임에 관한 정보 때문이었다.
흑야에게 차를 따라 준 담대소천이 혁련천후를 보며 말했다.
“무슨 꿍꿍이를 부리는지…… 벌써 몇 개월째 전혀 미동조차 없습니다. 이러다가 한날한시에 대대적인 공격을 벌이는 것은 아닐지 걱정입니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지.”
“군의 첩보에도 수상한 세력의 움직임에 관한 것은 없었습니다. 다만 호북성에서 백여 명가량 되는 무림인들이 섬서로 향했다는 정보는 있었습니다만 확인을 해 보니 대정문이라는 문파의 문도들이었습니다.”
“대정문이라면…… 정파가 아닌가?”
“강남제일검 상관명이 문주로 있는 곳입니다. 그들의 움직임이야 별다른 게 없으니 신경 쓸 필요는 없습니다만, 용성과 빙궁의 너무 조용하니…….”
탁!
찻잔을 내려놓은 혁련천후가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놈들이 움직일 때까지 힘을 기르면서 기다리면 된다. 그들이 준비하는 만큼 우리도 준비하면 되는 것이지. 정도맹도 세를 집결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할 테니 나쁘다고 볼 수만은 없다.”
그와 같은 말에 흑야가 대답했다.
“그것을 놈들도 모르지 않을 터인데……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것으로 봐야 합니까?”
“그렇겠지. 자신들이 원하는 때가 되면 당금 무림은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무언가가 있겠지. 그게 세 마두의 마공을 극성에 이르는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역사상 최악의 전쟁이 될 가능성이 높으니 너희들도 수련을 게을리해선 안 된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전혀 걱정을 하는 기미가 없어 보이자 담대소천과 흑야는 서로를 보며 피식 웃었다.
담대소천이 다른 것을 물었다.
“남궁세가의 전대 가주와는 약조를 하셨습니까?”
혁련천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그들은 결속이 되질 않는 모양이야. 맹의 공식적인 입장이 아닌 나백을 비롯한 그를 지지하는 세력의 입장이라고 하더군.”
“동맹 말입니까?”
혁련천후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흑야가 비웃었다.
“전쟁이 끝나면 어떻게 입장을 바꿀지 추측이 불가한 자들입니다. 차라리 신뢰라는 측면에선 마교가 정도맹보다 훨씬 낫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정도맹은 워낙 정치적 성향이 강한 집단이어서 훗날을 추측하기가 어렵다. 계파 간의 갈등도 나날이 심해지고 있으며 요즘 들어서는 서로 간에 충돌을 하는 경우도 잦다고 들었다.
위기를 넘기면 또 어떤 계파가 득세하여 정국을 주도하려고 들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적당히 선만 이어 놓으면 그뿐이다. 어차피 그들과 우리는 갈 길이 달라. 어쩌면 최후의 적이 될 수도 있는 곳이 정도맹이니 언제든 선을 끊으면 그뿐이야.”
듣기에 따라선 상당히 냉정할 수도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담대소천과 흑야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을 나타냈다.
자신들의 생각도 그와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시 더 대화를 나눈 그들은 철무옥의 상태를 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맨 뒤에 일어서려던 혁련천후가 그만 찻잔을 떨어뜨렸다.
퍼석!
혁련천후는 산산조각이 나며 흩어지는 찻잔을 보며 미간을 슬쩍 좁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