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
<귀환무사 166화>
“할 만하느냐.”
“예!”
“수련의 성과는.”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혁련천후를 대하는 도량의 태도는 공손하면서도 편해 보였다.
껄끄러웠던 지난날의 기억 때문에 처음엔 무척 서먹서먹했었지만 지금은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넬 정도로 친숙해져 있었다.
화산파의 제자들과도 잘 지냈는데, 특히 청진과 청명은 형제처럼 지낼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어인 일로 부르셨는지요.”
도량의 물음에 혁련천후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거처의 벽으로 걸어갔다.
도량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한쪽 구석에 놓아진 탁자에서 뭔가를 꺼내 제자리에 앉은 혁련천후가 도량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앞으로 네가 사용하게 될 검이다.”
“……예?”
도량이 놀란 얼굴로 혁련천후를 응시했다. 혁련천후는 담담히 말했다.
“거처로 돌아가서 풀어 보면 알 것이다. 그 검으로 네 형처럼 훌륭한 무인이 되어야 한다.”
“제 형님을…… 아십니까?”
도량의 눈동자가 커졌다. 혁련천후의 입에서 죽은 형이 거론되다니.
뒷말은 더 놀라운 것이었다.
“명진은 내게 하나뿐인 친구였다. 네 형의 꿈은 무당이 천하제일의 도가로 성장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무당은 일반 무림의 문파들보다 더한 속념으로 가득하지. 그 검으로 강자가 되어라. 그리고 무당을 네 형이 있었을 때의 무당으로 돌려놔라. 그리고 천하제일의 도가로 만들어라.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
도량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혁련천후를 바라볼 뿐이었다.
혁련천후가 말을 이었다.
“그것은 네 형의 꿈이자, 네 사숙이 죽어 가며 내게 부탁한 것이기도 하다. 내가 해 줄 수 없으니 네가 해 주어야 한다. 그, 두 사람의 꿈을 말이다. 대답해라!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고!”
도량이 비로소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은인의 말씀, 가슴에 새겨 두겠습니다.”
“단순히 무력이 강한 무당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네 형이 원했던 무당, 그런 무당이 아니면 두 번의 용서는 없을 것이다.”
“예…….”
도량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눈물이 흘러서다. 죽은 형 때문에, 혁련천후가 전해 준 벅찬 감격 때문에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강해지기 전엔 다시는 눈물을 보이지 말도록 하거라.”
“예…….”
울먹이며 대답한 도량이 허리를 숙여 보이고는 돌아갔다.
그날 밤, 도량은 자신의 거처에서 목을 놓아 울었다. 야참을 주러 갔던 청진이 무슨 일인지를 물었으나 도량은 새벽까지 그저 엉엉 울었다.
다음 날 아침 울음소리에 잠을 설친 악승이 성난 눈으로 청진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었다.
“죽은 형님의 칼을 되찾았답니다. 그래서 그렇게 울었던 것 같습니다.”
청진의 대답이었다.
악승은 머쓱한 표정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 * *
며칠 후, 담대소천이 돌아왔다.
청룡단원들에게 가장 인기가 높았던 그가 돌아오자 수련 중이던 단원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다 왕전과 북궁천소에게 연무장을 뺑뺑이를 도는 보복을 당했다.
금옥장의 인물들은 지난날 칼질 한 번으로 담장을 박살 낸 그를 기억하고는 감히 나서지 못하고 몸을 움츠렸다.
금치문도 그 앞에서는 오금이 저려 제대로 인사조차 건네지 못했다.
담대소천은 자신이 알아낸 모든 정보를 혁련천후와 혁련강에게 전하고 자신의 거처에서 벗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영호수란과 남궁소미도 그 자리에 끼었다. 요즘 들어 자주 술자리에 끼는 남궁소미가 영호수란은 여전히 껄끄러웠다.
“자식! 모처럼 어깨에 잔뜩 힘을 주었겠군. 돌아오기 싫은 거, 억지로 온 것은 아니겠지?”
왕전이 눈을 홀기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네놈의 낯짝이 보기 싫어서 그럴까 하다가 참았다.”
“이런 망할.”
영호수란이 끼어들었다.
“장군 아저씨는 직책이 뭐였어요?”
영호수란은 언제부턴가 그를 장군 아저씨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귀여워 담대소천의 입가에 웃음이 걸린다.
“대단히 높은 자리에 계셨나 봐요? 그 위세가 높다는 동창의 내시들이 껌벅 죽는 시늉을 할 정도였으면…….”
“도독이었다.”
대답은 왕전이 대신했다.
“도독이 높은 자리인가요?”
왕전이 다시 말을 늘어놓는다.
“중원에 열여섯 개의 성이 있는 건 알겠지?”
“누굴 바보로 아세요!”
“크흠! 그 열여섯의 성에 주둔하는 군사들을 총괄하는 장수들이 하나씩 있지. 도독은 그 장수들의 생사여탈권을 쥔 최고위 장군이지. 이제 대충 감이 오냐?”
“진짜요?”
영호수란이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치떴다. 옆에 앉았던 남궁소미도 같은 표정으로 담대소천을 응시했다.
사실 국가의 직책으로 본다면 담대소천은 혁련천후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최고위 관료라고 보는 것이 옳다. 도독은 무관으로서는 최상위에 드는, 그야말로 대명의 군부를 손에 쥐고 흔들 수 있는 요직 중의 요직이다.
담대소천이 피식 웃고는 말을 했다.
“내겐 아무런 의미조차 없는 것이다. 난 주공의 수하로서 여기 이놈들의 벗으로서 살아가는 게 좋을 뿐이다.”
조윤이 흑야를 보며 실소를 머금었다.
“이젠 돈 벌러 가지 않아도 되니 네놈이 제일 살맛 나겠군.”
“흐흐! 금치문이 여럿 살렸지. 저놈이 청부를 안 받게 되었으니…….”
왕전이 거들고 나서자 흑야의 날카로운 눈매가 둘을 쓸고 지나갔다.
“이젠 어지간한 일이 생기면 놈을 보낼 생각이다.”
“홍무 말이냐?”
“이젠 실전 경험을 닦을 때도 되었다.”
듣고 있던 담대소천이 물었다.
“대상은……?”
“아직은 몰라. 사련도 없어지고 마교는 여기에 있으니…… 너희들을 제물로 연습을 시켜 볼까도 생각 중이다.”
담대소천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떠오른다.
“난 사양한다. 하려면 저놈들을 대상으로 해.”
“죽여도 되냐? 안 되면 나도 사양이다.”
“됐거든.”
모두가 고개를 젓는다. 흑야의 수업을 받은 홍무라면 그 누구도 꺼림칙할 수밖에 없다. 물론 홍무가 이들을 어찌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것이지만…….
그때 홍무가 들어왔다.
모두가 자신을 찌릿하게 노려보자 영문을 몰랐던 그는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고는 입을 열었다.
“정도맹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상당히 높은 분…… 아! 남궁 소저의 증조부께서 오셨습니다.”
자리에 남궁소미가 있음을 발견한 홍무가 그녀에게 말했다. 남궁소미가 놀란 표정으로 벌떡 일어섰다.
“증조부께서 오셨단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분명 사천왕의 한 분이신 남궁기 대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에 좌석한 모두가 적잖이 놀랐다.
정도맹의 실질적인 수뇌라고 할 수 있는 사천왕이 성을 찾았다니. 지금껏 찾아왔던 인물들 중에서 가장 거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니 강호를 통틀어서도 가장 배분이 높은 사람이 남궁기라고 할 수 있었다.
남궁소미가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가자 조윤이 홍무에게 물었다.
“주공께서 만나고 계시느냐?”
“예! 지금 막 귀빈청으로 드셨습니다.”
담대소천이 홍무에게 물었다.
“수행단의 규모는?”
“아닙니다. 혼자 오셨습니다.”
“사천왕이 홀로 주공을 찾아왔단 말이지.”
“정도맹의 특사로 온 것일까? 특사로 왔다면 상당히 큰 사안을 들고 왔을 것이 분명한데 말이지…….”
조윤의 중얼거림에 흑야가 내뱉듯이 한마디 했다.
“동맹이라도 하자고 왔겠지.”
“그런 일이라면 맹주가 직접 왔었어야지. 제아무리 사천왕이 맹주보다 위에서 군림하는 존재들이라도 문파 간의 협약 건은 맹주가 직접 하는 것이 예의가 아니겠냐.”
“뭐, 나중에 알게 될 일이 아니냐. 고리타분한 것은 신경 끄고 술이나 마시자.”
복잡한 것을 무척 싫어하는 북궁천소가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저었다. 그런 그를 한심하다는 빛으로 쳐다본 조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시고들 있어라. 난 잠깐 나갔다 오마.”
“어딜 가는데?”
“넌 술이나 퍼마셔.”
북궁천소에게 툭 쏘아부친 조윤은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 담대소천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도 그만 마셔야겠어. 금 장주가 준 선물이나 다듬어야겠다.”
“나도.”
“혼자 많이 마셔라.”
“저도 언니한테 가 봐야겠어요.”
모두가 가버리고 북궁천소만이 남았다.
“이런 썅!”
졸지에 혼자 남은 그는 남은 술을 모조리 비울 때까지 일어서지 않았다.
* * *
중원의 모처.
음습한 기운이 난무하는 가운데 적포를 걸친 한 노인이 아름드리 거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잠시 후,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장정 두 명이 두 팔을 겨우 맞잡을 정도의 거목이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우지끈!
노인의 눈동자에 흡족함이 채워진다.
“내공을 끌어 올려도 눈동자에 마공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는군. 그렇다면 십 성은 넘었다고 봐야겠지. 후후!”
노인은 주변을 천천히 쓸어 봤다.
그는 우거진 숲의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었다. 숲 곳곳에 잘려 나간 거목들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노인의 뒤에서 문사건을 쓴 인물이 냉수가 담긴 그릇과 땀을 닦을 내밀었다.
“참으로 빠른 진전이옵니다.”
“아직 멀었다. 선조들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아직 몇 개월은 더 있어야 한다. 하지만 올해가 넘어가기 전이라면 가능하겠지. 후후! 군림천하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천으로 얼굴의 땀을 닦으며 흡족한 듯 읊조리는 그에게 문사건을 쓴 노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불미스러운 소식이 있사옵니다.”
“불미스러운 소식?”
대번에 노인의 눈매가 날카롭게 빛을 발한다.
“용성주가 독단적으로 움직일 것을 전해 왔습니다. 진정시키고자 했지만 자식을 잃어버린 탓에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리석은 놈. 제깟 놈들 단독으로 정도맹을 상대하겠다니.”
“정도맹이 아니라 신마성이라 합니다. 그곳의 성주라는 작자에게 용성주의 아들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뭣이!”
정도맹이라고 말을 할 때는 담담한 반응을 보였던 노인이 신마성이라는 말에서는 대번에 노기를 드러내었다.
파직!
냉수그릇이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사사로운 복수심 때문에 일을 그르치려 하다니! 그놈이 미쳐도 단단히 미쳐 버린 모양이구나!”
문사건을 쓴 이는 머리를 조아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 분을 삭이는 기색을 보였던 노인이 다른 것을 물었다.
“북해의 늙은이는 무엇을 하고 있다더냐?”
“요성주는 여전히 신강에서 머무르고 있습니다. 몇몇 고수들을 중원으로 몰래 보내긴 했습니다만 주력은 마교의 잔당들을 색출하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는 듯합니다.”
“아직도 마교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단 말이냐.”
“수백 년을 마교에게 당했던 그들이라 은원을 쉽사리 떨쳐 내지 못하는 듯합니다.”
노인의 눈동자에 갑자기 붉은 기운이 떠올랐다.
머리를 조아린 인물은 전해지는 기운만으로도 등골에서 식은땀을 다 흘렸다.
“어차피 본좌가 극성에 오르는 날이면 그깟 놈들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차라리 잘되었다. 신마성의 전력을 조금이라도 갉아 놓는 것이 오히려 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대는 당장 부상막의 멸천조에게 전서를 보내어라!”
“멸천조는 왜…….”
“그들에게 용성을 도와 신마성의 요인들을 최대한 줄여 놓으라 전해라! 북해의 요성제에게 전서를 보내어 서장의 아이들을 미리 중원으로 보내라고 하거라!”
“그 아이들 전부를 말입니까?”
“어차피 마교가 쓰러진 마당에 북쪽에서 빙궁을 당해낼 만한 세력은 없지 않느냐? 그 아이들이 없어도 놈들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괜히 두었다가 요성제, 그놈까지 헛짓거리를 한다고 설치고 나오면 곤란하지 않느냐.”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돌아서려던 자가 뒤늦게 뭔가를 떠올리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해 드릴 소식이 하나가 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