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
<귀환무사 162화>
“아! 갑자기 몸이…… 이보시오. 총관! 총관이 나를 대신하여 이분들과 얘기를 좀 하시오. 난 거처에서 좀 누워야겠소. 대화들 나누시오. 난 조금 있다가 돌아오겠소.”
금치문이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일어섰다. 재빨리 총관이 그가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거처를 나서는 금치문을 향해 뒤에 선 노인들이 검을 뽑으려는 시늉을 했으나 대화를 나누던 노인의 제지로 노려만 볼 뿐이었다.
노인이 총관을 보며 얼굴을 구겼다. 그의 눈동자가 총관을 직시했다.
총관이 노인을 보며 씩 웃는다.
“여기 계약서가 있으니 도장을 좀…….”
그 말에 노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자신이 예상했던 결과로 생각한 것이다. 도장 따위야 애초부터 없었다.
그는 총관이 내민 계약서를 천천히 읽었다. 그냥 받으면 그뿐이지만 문서를 받기 전까진 최대한 형식을 지키자는 심산이었다.
계약서를 읽어 가던 노인의 얼굴이 점점 썩은 돼지 빛으로 변해 갔다.
“이, 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노인이 발딱 고개를 들고서 총관을 보았다.
“왜? 마음에 안 차?”
챙!
노인의 육신이 엄청난 속도로 뒤로 튕겨 날아갔다. 이미 그의 손엔 검이 쥐어져 있었는데, 총관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누구냐!”
짧은 순간에 노인은 눈앞의 총관이 전의 그 총관이 아님과 동시에 상당한 고수임을 직감했다.
자신과 부딪혔던 눈동자에 들어 있던 섬뜩한 기운, 노인은 등골에서 식은땀이 흐르며 소름까지 돋아남을 느꼈다. 총관이 서서히 일어섰다.
여전히 얼굴엔 싸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차가운 음성은 노인과 일행의 뒤쪽에서 들려왔다.
“천왕이라고 했지…….”
여섯의 고개가 벼락같이 뒤로 돌아갔다.
흑발을 늘어뜨린 사내가 자신들을 보며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들어올 땐 분명 없었던 인물이다. 그렇다면…….
‘이토록 가까이 접근하도록 전혀 모르고 있었다니…….’
노인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이제야 느꼈다.
“묵련인가?”
혁련천후의 짤막한 질문에 다섯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미세하게 흔들린 눈동자는 그들도 어쩌지 못했다. 그것을 놓치지 않은 혁련천후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제법이군.”
“뭐 하는 놈들이냐!”
“너희들을 때려잡으러 온 사람들이지.”
총관의 얼굴이 서서히 변하더니 보는 것만으로 기가 질리는 험악한 얼굴로 바뀌었다. 북궁천소였다. 누군가 관산악을 보더니 크게 놀라며 외쳤다.
“흑영대주!”
관산악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뭐야? 나를 알아보네. 너, 신강에 있었던 놈인가?”
노인들의 낯빛은 이미 돌보다 더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마교의 흑영대주 관산악이 이곳에 있다면 다른 자들은 누군지는 말하지 않아도 답이 나온다.
“신마성!”
“모두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
채채챙!
노인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놀랄 때보다 더 빠른 반응이었다. 혁련천후가 짤막히 명령을 내렸다.
“하나 정도는 살려 둬라.”
“예!”
그러고는 몸을 돌려 거처를 나가 버렸다.
언제나 그렇듯 선공은 북궁천소의 몫이었다.
“새끼들! 날로 처먹으면 체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어야지.”
* * *
신마성으로 돌아가는 행렬이 상당히 늘어나 있었다.
달구지 하나에서 수십 대의 마차로 바뀌어 있었다. 묵련의 보복을 두려워한 금치문이 아예 짐을 싸 들고 신마성으로 함께 이동하면서 벌어진 진풍경이었다.
주요 인사들과 장부와 서류, 그리고 귀한 물품들만 챙겼음에도 마차는 관도를 길게 늘어설 정도로 대단한 행렬을 이루었다.
가장 선두에서 이동하는 마차에 혁련천후와 독고혜, 그리고 금치문이 함께하고 있었다.
“전국에 깔린 상단의 지부들은 어떻게 할 작정이지?”
“하하! 이럴 때를 대비, 준비해 놓은 것이 있습니다. 어제부로 천하에서 금옥장은 사라졌습니다. 제아무리 놈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으려 해도 찾아낼 수 없을 거라 장담합니다.”
금치문이 밝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럼 막대한 손실이 나는 게 아닌가?”
“아닙니다. 금옥장은 사라졌지만 영업은 계속됩니다. 사실 정변이 일어나 황제가 바뀔 때를 대비하는 것이 장사치들의 기본입지요. 관을 끼지 않고는 제대로 된 영업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만, 무림의 정세 때문에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혁련천후를 대하는 금치문의 태도는 제법 자연스럽게 바뀌어 있었다.
바라보는 눈빛도 무척이나 편안해 보였다. 세상의 모든 것을 지녔던 그였지만 죽음의 위기를 몇 번 겪고서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총단 건물은 군에 임대를 주었다고 했나?”
“말이 임대지 공짜나 진배없습니다. 저야 놈들에게서 그저 건물만 무사하면 그뿐이 아니겠습니까? 제아무리 흉악한 놈들이라도 나라의 군대에게 칼을 들이밀 순 없는 법이니 마음이 다소 놓입니다.”
‘꽤 머리를 썼군.’
혁련천후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떠오른다.
다시 생각해 봐도 금치문과 자신이 이렇게 엮일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던 것이다.
‘인간사, 다 이런 것이겠지…….’
복수의 칼을 품고서 중원으로 돌아올 때의 그것과는 천양지차로 바뀌어 있었다. 자신의 마음도, 사람도,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삶까지도 말이다.
혁련천후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독고혜가 넌지시 물어 왔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세요?”
“당신이 옆에 있으니 좋을 수밖에.”
금치문이 슬쩍 시선을 피하는 순간이었다.
제6장 화약 강탈범을 해결하다
초겨울로 접어든 날씨 탓에 바람은 무척 쌀쌀했다. 특히 섬서 이북은 다른 곳보다 춥기로 유명한 곳이어서 그 정도가 더했다.
길게 늘어진 마차의 행렬은 거대한 상단을 방불케 했다.
답답한 마차를 나와 마부석에 오른 혁련천후는 장차 다가올 묵련과의 전쟁에 대해 생각했다. ‘금옥장을 협박한 것은 자칫 관부에 신고가 들어갈 수도 있었던 상당한 모험이다. 놈들이 그 정도의 위험까지 감수한 것으로 보면 엄청난 자금이 소요될 만큼 상당한 인원을 거느리고 있다고 봐야 한다.’
예상이 맞으면 전쟁은 승산이 적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정도맹과 손을 잡는 것, 현 시점에선 그것만이 최선이었다. 혁련천후는 도착하는 대로 곧장 정도맹주 나백을 만나기로 마음을 굳혔다.
‘묘하게 엮이는군.’
언제부턴가 삶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저 복수를 하면 전부라고 여겼는데 이제는 천하를 걱정하는 처지로 변해 있었다. 금치문도 정도맹도, 모두가 자신과는 적이 되었어야 할 존재들이 아닌가.
하지만 지금은 한 배를 탄 동지가 되려 하고 있으니.…….
혁련천후는 무심결에 뒤를 돌아봤다. 뒤를 따르는 마차의 마부석에서 총관과 대화를 나누는 금치문을 보고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꽤 큰 힘이 되었어. 내게 운이 따른다고 봐야 하나…….’
말이 강남 이북의 상권이지, 그 정도만 가지고도 천하 십 대 상단에 능히 이름을 올릴 수 있는 엄청난 것이다.
영호수란의 말마따나 이건 정말 대박이다. 대박도 이런 대박이 또 있을까. 모든 것이 술술 풀려가자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린다.
“요즘 들어 자주 웃으시는군요?”
“좋아서.”
“흠…… 부자가 돼서 그런 거죠?”
“당연하지.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어. 특히 그런 거금은 말이야…….”
“나도 무척 좋아요. 큰돈이 생겨서라기보다는 당신이 가장 부족했던 약점이 일거에 해결된 것이 너무너무 후련하고 좋군요. 가장 먼저 뭘 할 건가요?”
“글쎄…… 뭘 하지?”
독고혜가 짐짓 골똘히 생각하는 시늉을 하더니 손뼉을 치며 말했다.
“천 명이 살 수 있는 큰 부락을 만들어요. 인근 고을의 가난한 사람들을 그곳으로 이주시키면 좋을 것 같은데…… 서당도 짓고 기술도 배워 주고, 어르신들은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 그곳에서 여생을 편안하게 보내시도록 말이죠. 어때요?”
“그것도 괜찮겠군.”
아이처럼 눈망울을 반짝이며 들뜬 그녀가 무척이나 귀여웠다.
안아 주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아 혁련천후는 미소를 머금고는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백어산을 바라보았다.
뿌연 안개로 둘러진 그곳이 이젠 꽤나 정겨워진 듯 포근하게 다가온다.
“전쟁이 끝나면 저곳에서 단둘만 사는 것은 어떨까?”
“저야 좋지만, 둘이서만은 좀 곤란하지 않을까요? 란 매도 있는데…….”
“그 아이 얘긴 그만하지.”
“알았어요. 그만할게요.”
혁련천후의 표정이 굳어지자 독고혜는 재빨리 그의 팔을 껴안았다.
혁련천후가 그런 독고혜를 보며 목소리를 깔았다.
“난 당신 하나면 충분해. 앞으로 그 얘긴 더 이상 꺼내지 않았으면 좋겠군.”
“알았어요.”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독고혜의 얼굴에 살짝 수심이 어린다.
자신만큼이나 그를 사모하는 영호수란의 해맑은 얼굴이 떠오르자 수심은 더욱 짙어졌다. 하지만 한편으로 가슴을 뿌듯하게 채워 오는 기쁨은 어쩔 수 없었다.
자신만을 사랑하는 연인의 마음을 확인한다는 것, 그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여인들의 가장 큰 기쁨이었다.
자신을 향한 혁련천후의 견고한 사랑을 믿기에 그녀는 웃을 수 있었다.
* * *
“와! 엄청난 행렬입니다!”
수련을 마치고 식사 준비를 하던 홍무가 저 멀리서 꼬리를 물고 들어서는 마차의 행렬을 보고는 입을 벌렸다.
옆에 서 있던 장용백이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어! 이봐! 성주처럼 보이는데?”
워낙 먼 거리라 아직은 얼굴의 윤곽이 잡히질 않았다. 그러나 잠시 후, 혁련천후임을 알아보고는 홍무와 청진, 청명이 재빨리 뛰어갔다.
장용백이 혀를 내둘렀다.
“달랑 몇이 가더니 엄청나게 불려서 돌아왔군. 저 마차들은 또 뭐지?”
“허허! 저 양반이 이렇듯 반갑게 느껴질 줄은 몰랐군그래. 그렇지 않은가?”
장로 구지겸이 장용백을 보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뭐, 조금 반갑긴 합니다만…….”
“이 친구야! 자네 얼굴에 다 쓰여 있네. ‘술친구들이 돌아와서 기분 죽입니다’라고 말일세.”
“그렇습니까? 하하하!”
사실 장용백은 혁련천후보다 북궁천소와 왕전 등이 더욱 반가웠다.
셋 다 기질이 비슷해서였다. 비록 나이 차는 있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초월하여 우정을 나누고 있었다.
신마성이 모처럼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신마각의 무사들과 청룡단원들이 조윤의 지시로 마차에서 짐을 끌어 내리기 시작했는데, 얼마나 많았던지 반나절이 걸려도 다 내리지 못했다.
“이게 다 뭐래?”
“그러게, 저 사람들은 또 뭐지?”
신마각의 무사들이 함께 온 사람들을 응시하며 수군거렸다. 금옥장에서 따라온 사람들이었다. 그때 뒤쪽에서 뾰족한 음성이 모두의 귓속을 울렸다.
“야! 이 악당!”
잔뜩 쌓아 놓은 짐 앞에서 장부정리를 하던 금치문의 앞으로 누군가가 바람처럼 떨어져 내렸다.
허리에 손을 얹고서 성난 얼굴을 한 인영은 바로 영호수란이었다. 그 기세가 어찌나 매서웠던지 금치문이 움찔하며 장부를 손에서 놓을 정도였다.
“아, 안녕하셨습니까? 영호 소저.”
“흥! 소저?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자초지종을 모르는 영호수란이 매섭게 따지고 들자 금치문은 혁련천후와 독고혜를 찾았다.
마침 독고혜가 다가왔다.
“그만해. 내가 들어가서 다 말해 줄게.”
“뭘 그만해요. 이 인간이 언니한테 한 짓을 벌써 잊으셨어요?”
“들어가서 다 말을 해 준다니까. 얼른 들어가. 선물도 있으니까.”
“……선물요?”
“들어가서 보여 줄게.”
독고혜가 영호수란을 이끌고 이 층으로 올라갔다.
“휴…….”
금치문이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마에 땀을 훔친 금치문은 신마성의 곳곳을 살펴보았다. 저번에 방문했을 때는 밤이었던 관계로 자세히 살펴볼 겨를이 없었던 그는 웅장한 규모에 크게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