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
<귀환무사 161화>
은색갑주에 붉은색 흉갑을 두른 담대소천이 그 안에 있었다. 그 맞은편에 마치 한 마리 호랑이처럼 생겨먹은 장수가 함께 앉아 있었다.
그가 바로 당대의 명장인 악연이었다.
담대소천이 넷을 보며 껄껄 웃었다.
“왔느냐.”
“형님! 언제 오셨습니까?”
“어젯밤에……. 몰골을 보니 꽤 강적을 만난 듯하군. 얘기는 나중에 듣기로 하고 일단 씻고 옷부터 갈아입고 오너라.”
악연이 밖으로 나가는 진천 일행을 보며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진즉에 알았더라면…….”
“아니다. 군은 원칙대로 움직여야 기강이 바로 서는 법, 저 아이들을 체포한 자들에게 술과 음식을 내려 포상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러도록 지시하겠습니다.”
천하맹장 악연이 담대소천의 앞에서는 그저 순한 사슴처럼 행동했다.
막사 주변을 늘어선 장수들은 곁눈으로 담대소천을 힐끔거렸다.
얼마 전에 홀연히 사라져 버린 전설의 장수가 눈앞에 있었다. 건문제의 총애를 뿌리치고 모습을 감췄던 그가 홀연히 자신들의 앞에 나타났으니 그를 아는 모든 장수들은 끓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얼굴까지 붉어졌다.
“전령은 보냈느냐?”
“예! 지시하신 대로 신마성이라는 곳으로 오늘 아침 떠났습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당도했을 것입니다.”
“사적인 것을 부탁해서 미안하구나.”
“어인 말씀을요. 죽는 그날까지 장군은 영원한 저희들의 대장이십니다.”
“무슨 소리. 앞으로 명의 군부는 너희들 같은 인재들이 이끌어야 한다. 난 이번 일만 도와주는 것으로 하지. 나와도 상관이 있는 일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 말에 갑자기 주변이 숙연하게 변해 갔다.
담대소천과 악연은 찻잔을 기울이며 꽤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던 와중에 악연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무림에 화약을 노리는 놈들이 있단 말입니까?”
“아직까지는 막연한 추측일 뿐이다. 꽤 큰일을 꾸미는 작당들이 있어서 말이야. 아무튼 당분간 신세를 좀 져야겠는데, 괜찮겠지?”
“저야 장군께서 영원히 이곳에 계셔 주시면 더할 나위가 없겠습니다.”
악연이 좋아서 활짝 웃었다. 그가 다시 말했다.
“비록 뿔뿔이 흩어졌지만 지금도 장군의 명이 떨어지면 한 달 안에 이곳으로 십만의 군사들이 몰려들 것입니다. 장군과 함께했던 오 년을 잊지 못하는 그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면 무척이나 좋아할 것입니다.”
“그만하자. 나는 더 이상 군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제부터 너희 같은 유능한 인재들이 새로운 군을 만들어야 한다. 그건 그렇고 저놈들 배를 좀 채워 줘야 할 텐데…….”
“지금 돼지를 잡고 술을 준비하고 있으니 염려 놓으십시오.”
담대소천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적당히 배만 채우면 될 것을…… 군사들의 눈도 있지 않은가?”
“하하! 오늘이 보통날입니까? 장군을 재회한 날입니다. 해서 그동안 미루었던 군사들의 회식을 오늘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전 사병들이 함께하니 염려 놓으십시오!”
악연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담대소천은 더 말해 봤자 소용이 없음을 알고는 찻잔을 마저 비우고는 일어섰다.
악연이 그를 안내한 곳은 진천과 화산의 제자들이 있는 군막이었다. 장교들이 사용하던 곳이어서 그런지 군막치고는 꽤 아늑하고 넓었다.
잠시 대화가 오간 뒤에 진천이 담대소천에게 물었다.
“그럼 당분간 이곳에 계실 생각이십니까?”
“아무래도 그래야겠다. 십만 근의 화약이라면 결코 가볍게 여겨서 될 일이 아니다.”
“나라에서 알아서 하지 않겠습니까?”
“단순히 적국의 소행이라면 내가 있을 필요가 없지. 하지만 놈들이 문득 떠오르더군. 그래서 범인이 밝혀질 때까지 있어야겠어.”
담대소천의 그와 같은 말에 진천이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묵련을 의심하시는군요.”
담대소천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천이 놀랍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벽력탄이라도 제조할 생각인가? 하여튼 이래저래 말썽이네.”
“십만 근이면 섬서성 전체를 날려 버릴 양이다. 묵련이든 아니든 무림의 문파라면 무조건 잡아야 한다.”
“찾아낼 방법이라도 있습니까?”
“생각중이다. 그보다 너는 백홍이를 통해 내가 조금 늦겠다는 소식을 주공께 전해 드리도록 하거라.”
“알겠습니다.”
진천이 휘파람을 불자 한쪽 구석에서 열심히 닭고기를 뜯고 있던 백홍이 뛰어왔다.
잠시 후, 백홍은 닭다리 하나를 문 채 남쪽으로 사라졌다.
* * *
담대소천의 사정은 불과 하루 만에 혁련천후에게 전해졌다.
“화약 때문에 늦어진다고?”
“그렇습니다. 십만 근이라면 한 국가와 전쟁을 치르고도 남을 양입니다. 소천은 그것이 무림 단체의 소행으로 예상된다고 하더군요. 혹시, 놈들일 수도 있으니 당분간 그곳에서 머무르며 조사를 하겠다고 전해 왔습니다.”
조윤의 그와 같은 대답에 혁련천후의 미간에 슬쩍 주름이 잡힌다.
‘설마 놈들이…….’
가장 우선순위로 의심되는 곳이 묵련이다. 금옥장을 협박하는 무리들도 묵련이 아닐까 의심 중인 그였다.
가장 강력한 적이기에 어지간한 사건들은 모조리 그들과 관련이 있을 거라는 전제를 깔고 의심하는 것은 이미 습관이 되어 있었다.
조윤이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진무의 서찰입니다.”
서찰을 펼쳐 읽어 가던 혁련천후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졌다. 그 안엔 명수진인이 죽어 가며 전했던 말들과 진무가 싸웠던 자들에 대한 모든 것들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가장 끝부분에 적혀 있던 글귀가 신경에 거슬렸다.
[놈이 죽기 직전에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습니다.]
서찰을 다 읽은 그는 조윤에게 다시 건네며 중얼거렸다.
“꽤 복잡해졌어.”
“안 좋은 일이에요?”
백홍을 품에 앉고서 쓰다듬던 독고혜가 그의 표정을 살피며 물어 왔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혁련천후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서찰을 읽어 가던 조윤이 돌처럼 굳어진다.
“놀랍군요. 놈들이 이토록 정도맹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다니…….”
“확실한 것은 아니다. 명수진인도 추측을 할 뿐이라고 했으니까.”
“정도맹엔 비영전이 있습니다. 명수진인이 아는 것을 그들이 왜 몰랐을까요?”
“모르지, 그건…….”
뒤늦게 서찰을 읽은 왕전과 흑야 등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서찰에는 정도맹에 묵련으로 의심되는 자들이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명수진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야말로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정파의 핵심전력인 정도맹에까지 손길이 뻗쳐 있다면 전시에 대혼란이 올 수도 있다.
혁련천후가 다시 말했다.
“어쩌면 더 잘된 일이라고 할 수도 있겠군. 세력이 이토록 방대하다면 움직이는 시기 또한 늦어질 것이니, 우리에겐 준비할 시간을 벌어 주는 것이지. 금옥장의 일이 끝나면 나백을 직접 만나 봐야겠군.”
혁련천후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는 명수진인의 서찰에 적힌 내용 중에서 자신과 관련한 부분을 떠올렸다.
[지금에야 사과드림을 용서하시게. 그때 자네를 추격했던 자들은…….]
자신이 죽여야 할 대상들에 대한 내용이었다. 명수진인의 추측으로는 그들 모두가 묵련으로 의심되는 암중 세력과 연관이 있는 자들이라 했다.
‘좋아, 한꺼번에 쓸어 주면 된다 이거군.’
죽여야 할 대상들이 한 세력에 연결되었다면 일일이 찾아가지 않아도 된다.
지금껏 잠시 미루었던 개인의 복수를 떠올리자 심장이 차갑게 굳어진다.
툭!
독고혜가 그의 팔을 살짝 쳤다.
“술 마시고 싶어요.”
조금 머쓱해진 혁련천후가 고개를 끄덕이자 왕전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술을 가지러 간 것이었다.
* * *
일단의 무리들이 금옥장을 방문한 것은 혁련천후 일행이 금옥장에 온 지 사흘이 지난 오후 무렵이었다. 날카로움을 풀풀 풍기는 초로의 노인 다섯 명이었다.
그들은 다짜고짜 금치문을 찾아가 싸늘히 말했다.
“우리가 제시했던 것에 대한 해답을 들으러 왔다.”
협박성이 다분한 어조였다.
금치문이 되물었다.
“조건을 다시 말씀해 주시겠소? 요즘 기억력이 떨어져 깜박 잊어버려서…….”
노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금치문의 태도가 거슬렸던 것이다. 두려움에 떨던 지난날과는 확연히 틀렸다.
시선도 피하지 않는다. 그를 차갑게 노려본 노인이 똑바로 새겨들으라는 듯 또박또박 말했다.
“강남 이북의 상권을 우리에게 넘기면 너희 금옥장을 우리가 보호해 주겠다. 물론 보호비는 받지 않는다. 당금 세상은 너희, 상인들이 살아가기엔 무척 험하지.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날려 버릴 수도 있는 세상이다. 잘 생각하기 바란다.”
“강남 이북의 상권이 금액으로 환산하면 얼만 줄 아시오?”
“그건 네가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넌 그저 우리와 함께 할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면 그뿐이다.”
“흠! 누구에게서 우리를 보호해 준단 말이오?”
“이봐! 지금 우리와 장난을 치자는 거냐? 전에 말을 했을 텐데…….”
“말하지 않았소. 기억력이 떨어졌다고…… 뭐, 싫으면 관두시고.”
금치문의 태도는 해 볼 테면 해 보자란 식이다.
노인의 얼굴에 다소 어이없다는 빛이 떠오른다.
무심결에 노인은 실내를 돌아봤다.
전에 보았던 총관과 처음 보는 낯선 자들, 몇이 총관의 옆에 서 있었다. 노인의 눈에 경멸의 빛이 스쳐 지나간다.
‘하나같이 허수아비 같은 놈들인데, 설마 저놈들을 믿고 호기를 부리는 건가?’
금치문의 변해 버린 태도에 혹시나 믿는 구석이 생긴 것은 아닐까 싶었던 노인은 입가에 잔뜩 비웃음을 머금었다.
당장에 죽이고 싶은 살심을 억누르고 다시 입을 열었다.
“금옥장의 돈을 노리는 강호의 집단이 한둘인 줄 아느냐? 그들은 법의 위에서 노는 존재들, 언제 어느 때 이곳으로 쳐들어와 돈을 요구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물론 네 목숨까지 노리겠지. 당장 신마성이라는 곳과 마찰도 있었지 않느냐? 그들이 만약 네가 검후에게 행한 짓거리를 빌미로 거액을 요구한다면 네가 과연 거절할 수 있을지 의문이군. 그곳에 있는 놈들 중 몇 명만 와도 금옥장은 초토화로 변하고 말 것이다.”
“그럼 당신들이 신마성을 물리칠 수 있을 만큼 힘이 강하단 말씀이오?”
“당연하지.”
금치문이 짐짓 크게 놀란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정말이오? 소문에 그들은 사련도 작살을 냈다고 들었소. 그런 엄청난 곳을 당신들이 막아 낼 수 있다니…… 참으로 놀랍구려.”
“우리들은 천하제일의 힘을 지닌 곳에서 왔다. 사련 따위는 조족지혈이지. 본 파는 곧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물론 그대가 우리와 인연을 맺는다면 천하군림의 길에 일조하는 것이니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을 것이다.”
“대가라면……?”
“그건 천왕, 크흠! 우리의 주인께서 친히 결정하실 문제다. 자! 이 정도면 설명이 충분한 것 같은데?”
금치문이 식어 버린 찻잔을 입으러 가져가며 살짝 눈을 치켜뜨고는 노인에게 다시 물었다.
“만약 내가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 것이오?”
“……뭐?”
노인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진다.
동시에 뒤에 섰던 자들이 일제히 살기를 발산했다. 결코 금치문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대번에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진 금치문을 보며 노인이 속삭이듯 낮게 말했다.
“이봐! 금치문. 그냥 힘으로 뺏으려고 했다면 벌써 네놈의 눈에 흙이 들어갔을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정중하게 나오는 이유는 네놈의 상술이 필요했을 뿐이야. 알아들었나? 정 안 되면 다른 상단의 인물이 네놈을 대신하게 할 수도 있겠지. 물론 넌 이 자리에서 싸늘하게 식어 버릴 테지.”
새카맣게 가라앉은 노인의 눈동자가 금치문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본다.
그 기운만으로도 금치문의 등골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버렸다.
[총관에게 넘겨.]
전음이 금치문을 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