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
<귀환무사 160화>
“내공이 돌아오는 대로 나는 먼저 가 봐야겠다. 무옥 형님의 치료를 서둘러야 하니…….”
“자식아! 가려면 다 함께 갈 일이지. 의리 없이 너만 간다고?”
“너희들은 안 돼. 군부의 심기에 거슬리면 곤란해. 난 그냥 적당히 탈출했다고 둘러대고 너희들은 소천 형님이 오실 때까지 이곳에 있어야 해.”
듣고 있던 진청이 말했다.
“도망가면 지들이 이 넓은 천지에서 우리를 어떻게 찾는단 말입니까? 누군지도 모를 텐데…….”
사공진무가 생각 좀 하라는 눈빛으로 진호를 나무랐다.
“너희 옷 좀 보고 말해.”
그 말에 셋은 머쓱한 표정이 되었다. 화산은 군부에도 잘 알려져 있었다.
가끔 군부의 신임 장수들이 수련차 화산을 찾곤 했기에 화산의 무복을 모를 리 없다. 폭발의 여력으로 너덜거렸지만 그래도 화산의 무복임을 한눈에 알아볼 정도는 되었다.
“그냥 형님이 오실 때까지 운기하면서 내상이나 다스려. 전수 중인 무공구결도 다시 한 번 살펴보고 말이야.”
“쩝!”
사공진무의 그 같은 말에 셋은 입맛을 다시며 바닥에 드러누워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대략 한 식경쯤 지났을까? 사공진무는 소리 없이 감옥에서 사라졌다.
사람이 갑자기 꺼지듯 사라져 버리자 다른 죄수들이 그 자리에서 거품을 물고 졸도를 해 버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사공진무의 행방을 묻던 장수는 죄수들이 그냥 귀신처럼 사라졌다는 말만 되풀이하자 단체로 매질을 가했다. 덕분에 애꿎은 여타 죄수들은 또 한 번 졸도를 해야만 했다.
* * *
섬서성의 북방 지역은 명나라 최고의 골칫거리인 북원의 잔당들이 자주 출몰하는 곳이다.
소수 전력으로 인근 고을을 약탈하고 빠지는 수법으로 인해 그 피해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해서 영락제는 실전 경험이 풍부한 군사들을 그곳에 주둔하게 만들고는 자신도 가끔은 직접 그곳에 들러 군사들의 노고를 위로하기도 했다.
그곳에 악연(岳延)이라는 명장이 있다.
악연은 명국의 떠오르는 신흥 명문가 출신의 이름난 명장이다.
나이 서른에 이미 상장의 반열에 오른 그는 장팔사모를 휘두르며 적진을 향해 돌진하여 적장의 목을 따는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사모를 씀에 있어서 그 옛날 촉한의 맹장 장비를 능가한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을 정도였다.
휘이잉!
드넓게 펼쳐진 주둔지가 거센 바람에 휩싸였다.
통나무를 박아서 세운 군진의 중심에 오 장 높이의 첨탑이 있었는데 그 위에 핏빛 갑주를 걸친 젊은 장수가 부관들과 함께 먼 곳을 응시하며 서 있었다.
짙은 눈썹과 각진 얼굴, 그리고 두꺼운 입술은 강인한 사내의 향기를 풀풀 풍겨 냈는데, 그가 바로 악연이다.
북원 진압군의 총사인 악연은 호목을 번득이며 부관들의 보고를 받는 중이다.
잠시 후, 악연의 두꺼운 입술이 벌어지며 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무림인들을 포박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화산파의 복장을 한 셋과 나머지 둘입니다. 엄청난 폭발의 현장에 놈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분실된 화약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잔챙이들이겠군. 군병들에게 잡힐 정도라면 무림인이라 할 수도 없지. 지금 어디에 있느냐?”
“보급 부대가 놈들을 잡고 있습니다.”
“문초는 해 보았는가?”
“그게…….”
머뭇거리는 부관을 보며 악연이 눈빛을 발했다. 부관이 다시 말했다.
“몽둥이찜질을 가해도 당최 고통스러워하는 기색조차 없으니, 난감할 지경입니다. 물을 끓여 그 안에 집어넣어 볼까 생각 중입니다.”
“팽 형은 역모를 꾸민 자들에게나 행하는 것 지나치지 않은가? 그들도 엄연한 명의 백성이다. 죄가 드러나기 전에 함부로 대해선 곤란해. 그자들을 이곳으로 데리고 오도록. 내가 직접 심문해 보겠다.”
“하찮은 자들입니다. 장군! 그냥 저희들에게 맡겨 주십시오.”
“십만 근의 화약이 사라졌다. 그 정도면 어지간한 성 하나는 그냥 날려 버릴 수 있는 양이지. 그걸 하찮게 여기는 것은 아니겠지?”
그 말에 장수들이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서 고개를 숙였다.
악연의 눈동자가 강렬할 빛을 발했다.
“반드시 범인들을 찾아내야 한다. 알겠느냐!”
“예! 장군!”
악승이 위압감을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첨탑의 창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한 사건을 떠올리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얼마 전, 섬서와 호북의 경계에 주둔한 군영에서 화약이 사라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무려 십만 근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화약이 하룻밤 사이에 사라졌다. 무기고를 경계하던 병사들, 수백이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것은 오히려 약과였다. 화약을 강탈한 범인들이 며칠 뒤, 그곳을 통째로 날려 버렸다.
그때 죽어 간 병사들의 수만 무려 오백이다. 모두가 악연의 휘하에 있던 군사들이었다.
악연이 입술을 잘근 씹었다.
“반드시 잡아내고야 만다. 아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범인들을 찾아내야 한다. 국가의 존망과도 연결된 중차대한 일이니 당분간 돌궐은 잊고 총력을 범인 색출에 투입한다. 모든 예하 부대에 그리 전하도록!”
“예! 장군!”
부관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히고는 빠르게 첨탑을 내려갔다.
늦가을의 시원한 바람이 악연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글거리던 악연의 눈동자가 한 순간, 아련한 기운을 품는다.
‘도대체 어디에 계신 겁니까?’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사내를 떠올렸다.
한 자루 청룡언월도를 들고 적진을 휩쓸던 무적의 사내. 손짓 한 번이면 십만의 대군이 목숨을 걸고 적진을 향해 돌진했다.
백번을 싸워 단 한 번의 패배조차 몰랐던 그 사내가 악연은 무척 그리웠다.
‘정녕 이대로 돌아오지 않으실 건가.’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 그를 찾아 천하를 수소문했지만 어디에도 그는 없었다.
들려오는 소문은 흉흉했다. 이름 모를 자객의 습격으로 사망했다. 조선으로 망명했다. 병을 얻어 앓다가 사망했다는 등…….
그러나 악연은 그 모든 것들을 믿지 않았다.
‘그렇게 쉽게 갈 분이 아니다. 이 악연이 목숨을 걸었던 분이다. 분명 어디선가 뜻을 세우고 계실 거다!’
악연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붉은 석양이 지평선의 너머로 서서히 떨어져 내린다.
온통 붉게 물든 지평선의 끝자락에 한 필의 전마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악연이 첨탑에서 내려간 바로 직후였다.
불게 타오르는 석양의 가운데 선 전마는 악연이 있었던 첨탑을 향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 * *
“여긴 어디요?”
진천이 물었다.
호송하던 장수는 그를 노려만 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넷은 다른 죄수들과 격리된다며 다른 주둔지로 끌려왔다. 이미 내공이 돌아온 그들은 성으로 돌아갈까도 했었지만 군부를 자극하면 곤란하다는 사공진무의 말 때문에 순순히 군의 처사에 몸을 맡겼다.
대신 화산의 제자들이 진천의 핍박에 괴로울 지경이었다.
모든 것이 화산의 무복 때문이라 여긴 진천이 수시로 셋을 구박했는데 셋은 그것을 온몸으로 받아 내는 중이었다.
주변을 유람하듯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진천은 군사들의 기세가 매우 강성해 보이자 호기심을 보였다.
‘제법인데. 이 정도면 상당한 정예들이겠군. 전쟁이라도 치를 작정인가?’
지나가는 자신들을 쳐다보는 병사들의 눈빛이 하나같이 살아 있었다.
휴식을 취하는 와중에도 기강이 흐트러진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다.
최초 수감되었던 곳의 병사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모습에 진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목책을 돌아가자 또 다른 목책이 나타났는데, 뒤쪽으로 수백의 천막들이 늘어선 것을 본 일행은 이곳이 전보다는 더 큰 규모임을 직감했다.
천막의 크기나 숫자로 볼 때, 어림잡아 오천은 넘어가는 군사들이 주둔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진호가 인상을 그렸다.
“이거 이러다가 끓는 물에 들어가는 것 아니냐?”
“우리가 무슨 역모를 꾸몄습니까? 끓는 물에 들어가게…….”
“저놈들이 그런 거 따지는 놈들이냐? 수틀리면 그냥 역모로 몰아 구족을 참하는 게 저놈들이다. 우리도 수틀리면 군부고 지랄이고 확 쓸어버리고 튀어야겠다.”
“아이고, 배고파서 그럴 힘도 없습니다.”
“빌어먹을 놈들! 밥은 줘야 할 것 아니야. 정말 성질나면 파문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확 쓸어버린다.”
진호가 눈을 부라리며 주변을 노려봤다.
다른 둘도 그에 못지않은 험악한 인상들을 하고 있었는데, 이유는 지금껏 물 한 모금 먹질 못했기 때문이었다.
제아무리 무림인이라도 밥은 먹어야 한다. 그러나 군병들이 그들에게 준 것이라곤 몽둥이 찜질뿐이었다.
덕분에 내공이 빨리 돌아오긴 했지만 말이다.
“참아라, 인간들아. 정상적으로 나가는 게 주공을 돕는 거다. 알아들었냐?”
“솔직히 참기 힘듭니다. 우리가 왜 이런 개고생을 해야 합니까. 아무 죄도 없는데…….”
진호가 따지듯 대답하자 진천이 묘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다.
“너, 그날이냐?”
“예?”
“계집애처럼 왜 그렇게 날카롭게 굴어. 좀 진득하니 기다려 봐. 누군 성질이 없어 가만히 있나? 한 번만 더 투덜대면 내손으로 너를 삶아 버린다. 알았어?”
“끙…….”
그때 젊은 장수 하나가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용맹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얼굴을 한 장수는 진천 일행을 호송하던 장수에게 대뜸 고함을 질렀다.
“포박을 풀어 드려라! 어서!”
“……예?”
“귀가 먹었느냐! 냉큼 그분들의 포박을 풀지 못할까?”
호송하던 장수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호송하는 죄수를 풀어 주라니.
순간 장수는 세상에 만연한 부패를 떠올렸다. 나라가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아 온갖 부정부패가 만연한 세상이다.
누군가가 윗선을 매수하여 이들을 풀어 주라고 시킨 것이라 여기고는 대뜸 거친 말을 쏟아 내었다.
“씨팔! 개 같은 세상!”
코앞에 상관이 있음에도 장수는 욕설을 퍼부으며 신경질적으로 진천과 일행들의 포승줄을 칼로 끊어 냈다.
호통을 치던 장수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
“놈! 관등성명을 대거라!”
“관등성명요? 그냥 개처럼 일하는 중앙군 백인장 왕팔이오.”
나오는 대답이 불량스럽기 짝이 없다.
주변의 병사들 모두는 왕팔이 경을 칠 거라고 여겼다. 지금 눈앞의 젊은 장수는 주연이라는 이름을 지닌 장수로서, 용맹하기로는 악연에 결코 떨어지지 않는 천하맹장이자 황제 영락의 먼 인척뻘이 되는 사람이다.
“지금 네가 하는 행동은 하극상임을 모르느냐?”
주연이 호통을 쳤으나 왕팔은 지지 않고 대꾸했다.
“그렇다면 적법한 절차를 밟아서 이들을 풀어 주라고 하시오! 그럼 내가 하극상을 인정하고 참수형이라도 달게 받겠소.”
“허어! 그래도 이놈이…….”
“담대 장군이 계실 땐 이러지 않았소. 지금은 이게 뭐요? 툭하면 정치하는 자들이 찾아와 청탁을 하지 않나, 조금만 연이 있으면 그저 편안한 자리로 빼 가려 하지를 않나. 내 더러워서 더는 못해 먹겠으니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시오!”
주연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걸린다. 그가 뒤를 돌아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이들에게 술과 음식을 내려 배불리 먹이도록 하라!”
“……!”
모두의 표정이 얼떨떨하게 변했다. 왕팔도 마찬가지였다.
주연이 왕팔을 보며 말했다.
“그런 용기와 배짱! 적들 앞에서도 부려 주길 바란다. 그리고 다른 장수들에겐 이런 행동이 먹히지 않음을 기억해 둬. 죽기엔 아까운 자이니 알아서 처신하기를 바란다.”
“……!”
주연이 진천과 화산의 제자들을 이끌고 돌아갔다.
긴장이 풀어지자 호송했던 군병들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성질을 부렸던 왕팔이 멀어지는 주연을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역시 담대 장군의 부관들은 다르군.”
“저분이 담대 장군의 부관입니까?”
“그래.”
“어쩐지…….”
* * *
“어!”
악연의 거처로 들어서던 진천과 일행들은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