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
<귀환무사 157화>
“걱정 마십시오. 아이들을 보냈으니 소식을 들으면 바람처럼 달려올 겁니다.”
혁련천후가 찻잔을 기울이며 조부 혁련강에게 시선을 던졌다.
“적들의 움직임이 지나치게 조용합니다.”
“오랜 세월을 준비했던 자들이니 확실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겠지. 게다가 사련이 용성이나 빙궁과 모종의 협약을 맺었던 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의 멸망이 꽤 부담을 주었을 게야. 옛날의 세 마두들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그들도 승리에 대한 확신이 설 때, 그때 전면에 나설 것이다.”
“그렇게 예상은 하고 있습니다만…….”
혁련강이 따뜻한 미소를 머금으며 좋은 말로 달랬다.
“허허! 너무 조급해하지 마라. 답답하기는 놈들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느냐? 그들이 완벽한 힘을 기른다면 우리도 거기에 맞춰 힘을 기르며 준비하면 그뿐이다. 다만 정도맹의 은거고수들이 하루빨리 자리를 털고 세상으로 나오는 게 승부의 관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게야. 전 전대의 고수들 중, 만약 지금껏 살아 있는 자가 있다면 천하고수보다 강한 고수도 기대할 수 있겠지. 상당한 전력이 되지 않겠느냐?”
모두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성을 넘어서지 않더라도 그에 준하는 정도의 고수 몇 만 있어도 엄청난 도움이 된다.
특히 강호에 가급적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소림의 전대 고수들은 추측하기에 오성을 넘어가는 고수들이 몇 있다고 모두가 여기고 있었다.
만약 전 전대의 십팔나한들이 생존해 있다면 그들만으로 어지간한 대문파의 전력을 상회할 것이다.
조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조용할 때, 처리할 일이 좀 있습니다만…… 저와 흑야가 밖을 좀 다녀와야겠습니다.”
“처리할 일?”
“송가장의 일과 당가를 이대로 둘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확실하게 끝맺음을 해 놓는 것이 좋겠습니다.”
혁련강이 의아한 빛으로 물었다.
“당가를 무력으로 제압할 생각이더냐?”
“태도를 봐서 결정짓겠습니다.”
“전력의 반이라고 할 수 있는 독제 당률이 죽었다. 어지간하면 그냥 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다소 염려스러워하는 혁련강을 보며 혁련천후가 대답했다.
“모용세가를 언제까지 그들의 위협하에 둘 순 없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그들이 해 왔던 악행들에 대한 매듭을 짓는 것이 차후 정도를 표방하는 문파들에게 기준이 될 것입니다. 힘이 있다고 해서 사사로운 잘못이 묻혀 간다면 사파나 마도와 다를 게 없지 않겠습니까?”
그의 어조는 무척 단호했다.
이미 그렇게 하기로 결심이 선 것을 짐작한 혁련강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수긍을 표했다. 당가와의 악연을 잘 모르는 남궁소미가 커다란 눈망울을 반짝이며 혁련천후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녀에겐 당가는 막역한 동맹 관계에 있는 아군일 뿐이다.
“저도 잠시 다녀올 곳이 있어서 자리를 비울까 합니다만…….”
그 말에 독고혜와 영호수란이 하던 일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어디 간다고만 하면 그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그녀들이다. 혁련강이 그녀들을 보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허허허! 저 아이들을 봐서라도 얼른 다녀오너라.”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인가요?”
“보름 정도…….”
사람에 따라 보름은 길수도 짧을 수도 있는 시간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그녀의 입장에선 무척이나 긴 시간이다.
하지만 그녀는 전처럼 자신도 함께 가겠다고 나서진 않았다. 그는 이제 자신 혼자만이 차지하기엔 너무나도 큰 거물이 되어 있었다.
어쩌면 강호의 안녕이 그의 양어깨에 달려 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녀의 속내를 짐작한 혁련강이 인자한 표정으로 달랬다.
“너희들은 이 아이가 돌아올 때까지 나와 함께 수련이나 하자꾸나. 식구가 될 아이들이 위험에 처하는 것을 어찌 보고만 있겠느냐. 허허허!”
그 말에 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식구가 될 아이들이라니. 혁련천후의 조부인 혁련강이 그런 말을 했으니 가슴이 쿵쾅거리며 마구 뛰었다.
그때였다. 홍무가 올라왔다.
“금옥장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자식이 돈을 주러 이제야 왔나 봅니다.”
북궁천소가 히죽 웃는다.
“장주가 직접 왔느냐?”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게, 표정이 영 아니던데…….”
“표정이 영 아니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무척 다급한 듯 보였습니다. 사숙조님을 급히 찾으십니다.”
“나를……?”
“예! 지금 객청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혁련천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혁련강에게 허리를 숙여 보이고는 객청으로 걸음을 놓았다.
* * *
새롭게 치장을 한 객청은 전과는 달리 무척 크고 화려했다.
평범한 재료들을 사용해 만들었음에도 멋들어진 조각들과 그림들, 그리고 일필휘지로 새겨진 수많은 족자들이 고급스러움을 한껏 뽐내고 있었다.
객청을 두리번거리는 금치문의 얼굴은 집 나간 마누라를 찾는 술꾼처럼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와 함께 온 총관은 연신 객청의 입구를 살피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습이다.
“신마성주께서 과연 청을 들어주실지 의문입니다. 장주님!”
“무조건 들어주셔야 한다. 내 재산의 반을 주는 한이 있더라도, 아니, 내 목숨을 그분에게 팔고서라도 무조건 승낙을 얻어 내야 해! 절대 그런 무뢰배들에게 넘겨줄 순 없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목숨까지 거론할까. 그리고 무뢰배라니…… 금치문의 얼굴에 비장함이 어렸다. 입술을 지그시 깨문 그는 객청의 입구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시일이 며칠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만약 승낙하지 않으면 곧장 정도맹으로 가야 합니다.”
“난 그분을 믿는다. 비록 악연으로 엮였지만 그 눈빛을 믿는다. 절대 거짓을 행하고 불의를 방관할 사람이 아니다. 확신해!”
“제발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 불한당 같은 놈들에게 주느니 차라리 당대 천하를 떨쳐 울리는 신마성에게 거저 주는 것이 나을 겁니다.”
“정 안 되면 금옥장을 통째로라도 줄 수밖에…… 괘씸한 놈들!”
금치문이 누군가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그게 누구인지는 오직 둘만이 알 뿐이다.
“어! 오십니다!”
혁련천후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둘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성주님!”
“늦었군.”
“죄송합니다. 사정이 생기는 바람에 그만…….”
혁련천후가 자리에 앉자 둘도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전날의 약속을 지키려고 온 것인가?”
“그것도 있고, 부탁드릴 것도 있고 해서…….”
“부탁이라니……?”
금치문이 다소 머뭇거렸다.
막상 그를 보자 지난날 자신이 저질렀던 잘못이 떠올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혁련천후가 다시 물었다.
“그대 정도의 인물이 망설인다면 꽤 큰 부탁인 듯싶군. 뭐지? 부탁이라는 게.”
입술을 지그시 깨문 금치문이 느닷없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금옥장이 일단의 무리들에게 협박을 받고 있습니다. 그 문제를 청하려고 이렇게 불원천리를 마다않고 달려왔습니다. 염치없음을 잘 압니다만 워낙 시급한지라…….”
“협박을 당한다?”
“그렇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이 강남 이북의 상권을 모조리 내놓으라고 합니다. 사람을 풀어 그자들의 정체를 수소문해 봤지만 도저히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 도와주십시오!”
혁련천후의 미간이 슬쩍 좁아졌다.
“그대의 장원에 꽤 많은 무림인들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도저히 상대가 되질 않았습니다. 천금을 주고 고용을 한 고수가 놈들의 손짓 한 번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염치가 없어 당가에 부탁을 해 봤습니다만 그곳도 큰일을 당한 터라…….”
금치문의 얼굴에 절박함이 묻어났다.
말이 강남 이북의 상권이지, 그것을 금액으로 환산하면 황금 수천만 냥에 해당하는 엄청난 것이다. 협박을 해서 얻어내기엔 지나치게 과한 것이다.
혁련천후가 다시 물었다.
“내가 그대를 도와줄 것이라 여기고 찾아온 건가? 우린 그다지 좋은 인연은 아닐 텐데…….”
“지난날의 잘못은 제 목숨을 내놓아서라도 용서를 빌겠습니다. 하니 부디 금옥장을 구해 주십시오!”
“목숨까지 걸었다면 그냥 줘 버리면 될 것을, 왜 내게 그런 부탁을 하지? 내겐 줄 수 있는 목숨을 그자들에겐 못 주는 이유라도 있다는 말인가?”
금치문이 비장한 어조로 대답했다.
“제가 비록 주색을 밝혀 숱한 과오를 저질렀으나 돈을 씀에 있어서는 사리분별이 확실한 사람입니다. 놈들에겐 제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단 한 푼도 내줄 수 없습니다.”
“내게 주는 것과 그자들에게 주는 것이 무슨 차이지?”
“투자를 하는 것입니다. 제겐 목숨과도 같은 금옥장입니다. 목숨을 맡길 만한 분이라고 믿었기에 이런 부탁을 드리는 것입니다. 놈들은 억만금을 줘도 결국엔 금옥장을 삼킬 놈들이니, 그것이 단 한 푼도 줄 수 없는 이유이지요.”
혁련천후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어쩌면 이런 일이 생기기 전에 자신의 손으로 죽였을 수도 있는 인물이 지금 자신에게 목숨을 담보로 부탁을 하고 있다.
그는 사람의 일은 하늘도 모른다는 어른들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음을 새삼 느끼고 있었다.
“투자라면 내가 얻는 것은 무엇이지?”
“청을 들어주시는 겁니까?”
금치문의 얼굴이 대번에 상기되었다.
“조건이 맞으면 안 들어줄 것도 없겠지.”
“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으흐흐!”
금치문은 연신 고개를 꾸벅였다.
그는 재빨리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혁련천후에게 내밀었다.
“이게 무엇이지?”
“강남 이북의 상권입니다! 그것을 성주께 드리겠습니다! 문파를 경영하시려면 자금이 필요하실 텐데, 그것이면 수십만을 문도로 두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운영할 전문가들도 이미 추려 놓았습니다!”
혁련천후는 내심 크게 놀랐다.
설마 이 정도로 큰 것을 내놓을지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바이다.
그는 순간 그것을 받아야 할지를 고민했다.
그만큼 금치문이 내놓은 것은 엄청났다. 그가 아무 말이 없자 밝아졌던 금치문의 얼굴이 다시 굳어졌다.
“금액이 적습니까?”
“……!”
“적으시다면 황금 오십만 냥을 추가로 드리겠습니다!”
졸지에 거금이 더 들어왔다.
“천하제일의 부자라더니 많이도 벌었군.”
“예?”
“아니다! 놈들이 언제 온다고 했지?”
“들어주시는 것입니까?”
“거절하기엔 그대가 제시한 조건이 너무 좋군. 거절하면 사람들이 바보라고 하지 않을까?”
금치문과 총관이 다시 격동으로 물들었다.
“아! 감사합니다! 성주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 금치문, 죽는 날까지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엉엉!”
어린아이처럼 우는 금치문을 보며 혁련천후는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설마 이들과 이런 인연으로 엮일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 * *
금치문과의 일을 전해 들은 사람들은 벌어진 입을 좀처럼 다물지 못했다.
속세를 초월한 듯 여겨지던 혁련강조차도 놀란 표정을 좀처럼 고치지 못했다.
왕전이 믿기지 않는 듯, 눈을 크게 치켜뜨고 물었다.
“이게 강남 이북의 상권을 모조리 우리 것으로 만들어줄 문서란 말입니까?”
왕전이 자신의 얼굴을 꼬집는 시늉까지 했다.
흑야의 얼굴이 그 누구보다 심하게 실룩거렸다. 기뻐서 그런 것이다. 이젠 더 이상 돈을 벌기 위해 청부를 받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일의 순서를 바꾸어야겠습니다. 놈들의 금옥장 방문이 보름 정도가 남았으면 그것을 먼저 해결하고 당가로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누구보다 냉철한 조윤마저도 제법 상기된 표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