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무사-149화 (147/425)

# 149

<귀환무사 149화>

“아직은 때가 아니지 않느냐?”

“어차피 빙궁 놈들은 중원으로 들어왔습니다. 적어도 몇 달 후면 어딘가에서 한 무리로 뭉쳐 움직일 것이 분명한데, 우리도 그때를 대비해서 미리 세력을 갖춰야지 않겠습니까.”

뇌어양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들이 온다고 해도 어차피 놈들에겐 상대가 되질 않아. 차라리 이곳에 있는 우리만으로 그들과 맞서는 것이 옳겠지. 애꿎은 목숨들이 죽어 나가는 일은 이제 그만 되어야 한다.”

“우리만으론 어림도 없습니다.”

“허허! 저들이 있지 않으냐?”

뇌어양이 신마성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장용백이 입술을 지그시 깨문다.

“언제까지 저들과 함께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비록 산악이 있어 지금의 관계가 유지되고는 있지만 저들은 엄연한 정파의 인물들입니다. 언젠가는 서로 떨어져야 할 때가 오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적으로 만나게 될 수도 있습니다.”

“허허! 정과 마의 기준이 무엇이더냐. 아직도 그깟 통념 따위에 얽매여 있다니, 쯧쯧! 이른 살에 이르고서도 아직 그 정도이더냐?”

뇌어양이 짐짓 나무랐다.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때와는 달리 그는 장용백을 어린아이 대하듯 했다. 물론 진득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뇌어양이 말을 이어 갔다.

“우리가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버려라. 정도맹과 함께하는 것보다는 저들과 함께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동질감이랄까. 그런 게 저들에게서 느껴지더구나. 사로도 딱히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고 말이지.”

“뭐, 정도맹보다야 신마성이 훨씬 마음에 차기는 합니다만…….”

“나를 걱정하는 것이냐?”

“신마성주는 장차 크게 될 인물입니다. 그와 함께하시면 교주께서…….”

장용백이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뒷말을 짐작한 뇌어양이 소리 내어 웃었다.

“허허! 나보다 잘난 사람하고 지내는 것이 뭐가 어때서 그러는 게야. 아직도 그런 호승심이 남아 있는 걸 보면 너도 아직 늙지는 않았구나. 허허허!”

“제겐 누가 뭐래도 세상에서 제일 뛰어나고 훌륭하신 교주이십니다.”

“허허! 입에 바른 소리도 할 줄 알았더냐? 자! 그만 내려가 보자꾸나. 성주와 술이라도 한잔 하면서 부탁을 해 봐야겠다.”

“부탁이라뇨?”

“허허! 신세를 지려면 허락을 받아야지. 허락이라고 해서 기분 상할 것 없다. 우리가 지낼 공간을 얻는 대신 우린 그들에게 힘을 보태 주면 되는 것 아니겠느냐. 상부상조라 보면 되겠지.”

뇌어양이 몸을 일으켰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장용백은 눈가에 뿌연 이슬이 맺혔다. 그동안 밤마다 잠을 들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들에겐 별다른 기색을 보이진 않았지만 뇌어양의 심란함이 어떨지는 그도 짐작했다.

‘우리 때문이다.’

뇌어양이 자신들 때문에 신마성에 몸을 의탁할 생각을 했다고 그는 여겼다. 며칠 전, 그가 모두를 불러 놓고 말했었다.

다시는 내 눈으로 교의 형제들이 죽어 가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고…….

장용백은 그 말의 숨은 뜻을 지금에야 헤아렸다. 지금 자신들의 주인은 신마성을 울타리로 삼아 자신들을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에이…….’

장용백은 자꾸 흐르려는 눈물을 간신히 참아 냈다.

“이제 그만 내려가자꾸나. 가서 밭일이라도 도와야지.”

뇌어양의 노구가 산 아래를 향했다. 장용백은 입술을 깨물어 호흡을 가다듬고는 뒤를 쫓았다.

신마성 주변에는 밭이 꽤 많았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밭을 가꾸느라 여념이 없었다. 밭을 일구는 사람들의 모습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각종 채소를 가꾸는 사람들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었지만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먹고살 것에 대한 걱정이 우선이었던 이들은 요즘의 삶이 무척이나 행복했다.

괴롭히는 탐관오리도 없었고 먹을 것이 없어 배를 곯아야 하는 일도 없었다. 아이들이 아파 발을 동동 구르던 것도 사공진무 때문에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모든 음식을 자급자족하기 위해 그들은 가축을 길렀으며 채소를 가꾸었다.

그리고 산을 개간하여 감자와 보리를 심었다. 그중 가장 질 좋은 것들은 무조건 혁련천후에게 먼저 바쳤지만 언제나 그것은 그들에게로 다시 돌아왔다.

가장 좋은 음식과 채소, 고기는 언제나 아이들의 몫이었다. 혁련천후의 뜻에 따른 것이다.

아이들이 건강하니 그 부모들은 저절로 삶에 활력이 넘쳤다. 청룡단 소속의 무사들이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무공에 남다른 재주를 지닌 아이들은 일찌감치 화산으로 보낸다. 벌써 화산에 입문한 아이들만 다섯이 넘어갔다.

주변을 살펴보던 뇌어양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진정 올바른 삶일 수도 있지 않겠느냐.”

장용백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진정한 삶은 마교를 재건하여 마도천하를 이룩하는 것이다. 하니 어찌 답을 할 수 있으랴.

그 속내를 짐작한 뇌어양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만 들어가자꾸나.”

“예.”

* * *

용성도, 빙궁도 더 이상의 행보를 보이지 않으면서 시작된 일시적인 평화는 몇 개월을 훌쩍 지나쳤다.

신마성에 무당파에서 손님이 온 것은 팔월이 지나고 구월에 접어든 어느 날이었다.

문지기가 없는 신마성의 문이 열리며 젊은 도인이 머리를 쑥 내밀었다.

맑은 눈이 인상적인 그 도인은 바로 도량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며 다소 조심스러운 행동을 보이던 도량은 연무장에서 떠들썩하게 들려오는 기합 소리를 듣고는 그곳으로 걸어갔다.

그런 도량의 등에는 봇짐이 메어 있었다.

“대단하다.”

도량은 신마각의 무사들이 수련하는 것을 보며 입을 벌렸다. 그 자신도 질풍대원이라 또래에선 결코 약하지 않다고 자부하건만 신마각의 무사들이 뿜어내는 파괴적인 기운은 놀라기에 충분했다.

“청룡단이잖아?”

도량의 눈이 동그래졌다.

신마각의 옆에는 청룡단원들이 비지땀을 흘리며 수련 중이었는데, 교관은 진청이 맡고 있었다.

허리에 손을 올리고 날카로운 안광을 번득이는 진청에게서 제법 고수의 냄새가 풍겨났다. 도량은 잠시 청룡단의 수련 모습을 지켜보다가 연무장에서 본관으로 시선을 돌렸다.

“흠! 떨지 마라, 도량아!”

이제 혁련천후를 찾아뵈어야 한다.

떨지말자고 스스로에게 주문한 도량이 걸음을 떼었다. 하지만 몇 걸음 옮기지 못하고서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누구냐?”

묵직한 음성이 뒤쪽에서 들려왔다. 재빨리 고개를 돌린 도량의 눈에 무척이나 무섭게 생긴 청년이 보였다.

철무옥이었다. 도량은 머리를 조아렸다.

“아, 안녕하십니까. 무당에서 온 도량이라고 합니다.”

“무당? 무당의 제자가 왜 온 거지?”

“그, 그게…….”

도량이 대답을 못하고서 머리를 긁적였다. 철무옥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무당과 화산의 관계를 들어서 알고 있었던 그는 도량을 좋지 않은 눈으로 응시했다.

“너희 무당이 올 곳이 아닌데, 이곳은…….”

“그, 그게…….”

여전히 도량은 우물거렸다.

그때 전각의 이 층에서 관산악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정문에 서 있는 도량과 철무옥을 보고는 이채를 발했다.

고개를 숙인 도량과 잔뜩 힘을 주고 선 철무옥, 관산악의 눈에는 철무옥이 도량을 괴롭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만해라.”

도량이 관산악을 보았다. 순간 도량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대뜸 그에게로 뛰어가려던 도량이 멈칫했다.

“저기, 저, 저분을 뵈러 왔습니다.”

“형님을? 그럼 진즉에 그렇게 말했어야지. 빨리 가 봐!”

철무옥이 쌍심지를 돋우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도량은 그에게 인사를 하고는 재빨리 관산악에게로 달려갔다.

잠시 후 도량은 혁련천후의 거처를 찾았다. 혁련천후는 도량이 건넨 서찰을 읽으며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서찰엔 명수진인의 직인이 찍혀 있었다. 도량은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푹 숙이고 있었다.

서찰을 다 읽은 혁련천후가 도량을 쳐다봤다.

“상태가 심각하느냐?”

“예. 얼마 전부터는 물 한 모금 드시지 못하고 계십니다. 간혹 각혈도 하시고…….”

“의원들은 뭐라고 하더냐?”

“용하다고 소문난 분들도 모조리 고개를 흔드셨습니다. 골수까지 바람이 들어 도저히 손을 쓸 수가 없다는 말만…….”

도량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혁련천후는 명수진인을 떠올렸다. 화산을 어쩌지 못해 안달하던 그의 성난 얼굴과 쓸쓸히 맹을 떠나던 뒷모습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땐 단칼에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한데 그가 지금 시한부라고 한다.

스스로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서찰에 적어 놓았다. 지난날의 과오를 용서하고 이 아이를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이토록 부질없는 삶이거늘…….’

모든 것이 서찰 하나로 잊어졌다.

결코 작지 않았던 골 깊은 감정이 도량의 물기 어린 눈을 보니 눈 녹듯 사라졌다. 혁련천후는 관산악을 돌아보았다.

“진무를 불러와라.

“진무를 말입니까?”

“그래.”

관산악이 거처를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사공진무가 들어섰다. 시커멓게 그을린 얼굴이 눈만 하얗게 빛났다.

“찾으셨습니까?”

“무당엘 좀 다녀와야겠다.”

“무당엘 말입니까? 왜요?”

혁련천후가 대답을 하지 않고서 도량을 쳐다봤다.

“무당까지 함께 갔다가 같이 돌아오너라. 수련은 그때부터 해도 늦지 않다.”

도량이 사공진무를 쳐다봤다. 사공진무도 도량을 쳐다봤다. 도량과 혁련천후를 번갈아 응시하는 하얀 눈동자는 왜 무당파로 가라고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한 궁금증을 담고 있었다.

“이 친구라면 고칠 수도 있을 것이다.”

“……!”

도량이 놀란 눈으로 사공진무를 다시 쳐다봤다. 아무리 봐도 자신보다 몇 살 정도밖에 많아 보이지 않는 그가 사숙의 병을 고칠 수 있다니, 도량은 믿기지 않았다.

사공진무가 물었다.

“누굴 고쳐야 합니까?”

“명수진인.”

“예, 예? 그 못된 늙은 도사를요? 왜요?”

사공진무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량이 사공진무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눈빛으로 사공진무를 나무란 혁련천후가 빨리 가보라는 뜻을 전했다.

“혹시 모르니 진천과 함께 다녀오도록 해.”

“……알겠습니다.”

사공진무와 도량이 허리를 숙여보이고는 거처를 나섰다. 둘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관산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용서하셨습니까?”

“나도 모르겠다.”

혁련천후는 찻잔을 입으러 가져가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자신도 자신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았다.

다만 진청과 화산의 제자들을 처음 보았을 때의 그 느낌과 같았다.

찻잔을 내려놓은 그가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갔다.

마침 이 층을 돌아보던 도량과 시선이 부딪혔다. 도량이 황급히 허리를 굽혔다. 그에게서 죽은 명진이 스쳐 지나갔다.

“산악!”

“예, 주공!”

“저 아이를 네가 맡아 봐. 무당은 검의 조종이라 할 만하지만 당대의 그들은 지나치게 섬세한 쪽으로 치우쳤다. 과거의 무당은 도법에 버금가는 파괴력을 지녔었다. 그 잃어버린 힘을 네가 찾아 주는 것이 좋겠다.”

“언제 다시 검을 들이밀지 모르는 자들입니다.”

혁련천후가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적어도 저 아이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저런 눈을 가졌던 친구가 있었지. 무당의 삐뚤어짐을 항상 가슴 아파 하던 친구였다. 저 아이는 그 친구의 동생이다.”

“알겠습니다. 화산이 두려워할 만큼 강하게 키웁죠. 흐흐!”

“저 아이들 대에서는 친구가 되어야겠지. 피를 나눈 형제만큼이나 끈끈한 친구 말이다…….”

“무당파의 도사 놈들이 성질머리가 고약해서 쉽지는 않을 텐데…….”

관산악이 말끝을 흐리며 수련 중인 화산의 다섯 제자를 응시했다.

“저놈들도 마찬가지이고 말입니다.”

혁련천후도 같은 곳을 응시했다. 왕전에게 말대꾸를 하다가 쥐어터지는 진청을 보고는 둘 다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쉽지는 않겠지만 가능은 할 것이다.”

* * *

수련을 끝낸 철무옥은 소변이 마려워 강가에 적은 공간으로 조성된 작은 수풀로 슬쩍 들어섰다.

“으흐! 터지는 줄 알았네.”

쏴아아!

배변의 쾌감만큼 시원함이 또 있을까. 철무옥은 몸을 떨어 가며 용변을 보았다.

굵은 오줌 줄기에 스스로 만족하며 히죽 웃던 그가 백어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희미하게 비명이 들려온 까닭이었다.

“뭐지?”

그때 다시 비명이 들려왔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들려오는 비명에 그는 바지춤을 끌어 올리고는 빠르게 그곳으로 날아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왕전이 피식 웃었다.

“저놈은 오줌 누다 말고 어딜 가는 거지?”

북궁천소가 히죽 웃었다.

“큰 게 마려운 모양이지. 꽁지 빠진 쥐새끼처럼 뛰어가는 꼴을 보니.”

“그냥 저기서 누면 될 것을…….”

“미친놈. 큰 걸 누기엔 저곳이 너무 훤하잖아.”

“그런가?”

북궁천소의 말따나 좁은 수풀은 철무옥처럼 큰 덩치가 앉아서 용변을 보기엔 지나치게 좁고 낮았다.

철무옥은 왕전과 북궁천소의 시선을 뒤로하고 빠르게 달렸다. 능선을 넘어가니 저 만치 앞에서 허겁지겁 뛰어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철무옥은 한눈에 그들을 알아보았다.

‘뭐야? 전에 들렀던 그놈들이잖아.’

성에 들렀던 정도맹의 고수들 중 몇이었다.

그때 가장 뒤쪽에서 달려오던 자가 피를 뿌리며 날아갔다. 철무옥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뭐야 저거?”

그의 시선은 달려오는 고수들의 뒤쪽을 향했다.

엄청난 속도로 쫓아오는 당률이 보였다. 두 눈에 어린 녹광이 얼마나 짙었으면 그 먼 거리에서도 선명하게 보일 정도였다.

“마공을 익힌 놈인가?”

철우목은 대도를 뽑아 어깨에 두르고는 곧장 사람들을 향해 마주 달려 나갔다.

당률의 손이 다른 정도맹 고수의 머리를 향해 뻗어 가는 것을 본 철무옥은 허공에서 대도를 휘둘렀다.

쐐액!

강기가 당률을 향해 날아갔다.

당률이 허공에서 몸을 세웠다. 그러고는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섰다.

철무옥이 그 앞에 떨어져 내리며 대도를 겨누었다. 당률의 마수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신마성으로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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