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
<귀환무사 148화>
왕전의 분위기는 꽤나 살벌했다. 백여 명에 달하는 정도맹의 고수들 중 몇몇이 상당히 긴장하는 빛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왕전의 그러한 태도에 분기를 내비쳤다. 오왕에 대한 두려움이야 그들이라고 없을까. 그러나 지금은 명예욕과 복수심에 불타 사리 판단이 흐려진 그들이기에 당장의 상황에 대한 판단은 아주 이기적이었다.
단리중보가 뭐라 말을 하려고 할 즈음, 북궁천소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이건 뭐, 마치 빚을 받으러 온 인간처럼 구는군. 남쪽으로 가기 전에 여기서 한번 붙어 보고 갈까?”
제아무리 단리중보라도 작정하고 기세를 드러내는 북궁천소를 담담하게 바라볼 수는 없었다.
주변에 폭발 일보 직전의 기운이 넘실거리자 대부분의 인물들이 얼굴에서 오만함을 거둬 내고 긴장감을 드러냈다.
단리중보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는 몸을 일으켰다.
“귀 성의 뜻은 충분히 알겠소. 그럼!”
단리중보가 몸을 돌려 밖을 향했다. 고작 차 한 잔조차 제대로 마시지도 못한 정도맹의 고수들은 매우 언짢았다.
조윤이 뒤에다 대고 말했다.
“하나만 알려 주겠소. 그 정도 전력으로는 용성의 주력, 아니지 일부만 만나도 몰살을 면치 못할 것이오. 결코 허언이 아님을 명심하는 게 좋을 것이오.”
조윤의 말에 단리중보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낯빛이 불쾌함으로 가득했다. 오왕이고 뭐고 속에서 열불이 치밀었지만 어쩌겠나. 무조건 참을 수밖에.
“조언 고맙소.”
단리중보는 찬바람을 일으키며 밖으로 나갔다.
다른 이들이 저마다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며 그 뒤를 따랐다.
쾅!
객청을 나선 정도맹의 고수들은 느닷없이 들려온 폭발음에 깜짝 놀랐다. 객청을 빠져나오면 바로 연무장이다.
지금 연무장에서 웃통을 벗어젖힌 사내 둘이서 도를 휘두르며 대련을 하고 있었는데, 폭발음은 그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악승과 철무옥이었다.
“으합!”
거친 기합을 토해 내며 악승이 대도를 휘둘러 철무옥을 덮쳐 갔다.
꽝!
대도끼리 부딪히자 굉음과 함께 주변에서 흙먼지가 자욱하게 치솟았다. 파생된 여파가 때마침 밖을 향하던 단리중보 등을 향해 날아왔다.
그 파괴력이 심상치 않아 보이자 단리중보는 황급히 호신강기를 끌어 올려 차단했다.
깡!
단순한 여파임에도 부딪힌 부분이 은은하게 저려 오자 단리중보는 내심 크게 놀랐다.
‘엄청나다!’
그때 대련을 하던 둘의 육신이 느닷없이 정도맹의 고수들이 있는 곳으로 날아들었다. 허공에서 맹렬하게 대도를 섞어 가며 날아오는 그들은 정도맹의 고수들을 보지 못한 듯싶었다. 삽시간에 정도맹 고수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피했다.
콰지지직!
그들이 섰던 곳에 큼지막한 구덩이가 패였다.
“우……!”
누군가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두 자 깊이의 구덩이는 단리중보조차도 기가 질리게 만들어 버렸다.
악승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대도를 거두었다.
“아까 수련하면서 힘을 너무 뺐네. 형님! 내일 다시 뜹시다!”
“언제든지.”
“퉤! 배고파 돌아가시겠네.”
돌아서던 철무옥이 정도맹의 고수들을 위아래로 쓸었다. 평소라면 무례하다며 따지고 들었을 단리중보가 아무 말도 못했다.
때마침 왕전이 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철무옥이 그를 향해 다가갔다.
“형님! 술 좀 남았소?”
“늦기 전에 달려가 봐.”
휙!
철무옥과 악승이 바람을 일으키며 식당으로 달려갔다.
정도맹의 고수들은 둘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이내 정문을 향했다. 조윤이 그들을 응시하며 혀를 찼다.
“장로라는 자가 치기 어린 청년보다 못한 심기를 지녔다니…… 단리황이라는 불세출의 고수를 어떻게 배출했는지 그게 다 이상할 노릇이군.”
“모두가 다 훌륭할 수가 있나. 종종 저렇게 싹수가 글러먹은 후인들이 세가를 말아먹기도 한다고. 주공이 계셨던 화산을 봐. 스스로 주공을 내쳤던 그들이 십 년 동안 완전히 몰락하지 않았냐. 물론 지금이야 완전히 날개를 달았다만.”
“날개만 달았겠냐. 조만간 주공께서 화산의 인물임을 드러내시면 구파의 서열은 완전히 거꾸로 돌아가겠지.”
셋은 정도맹의 고수들을 쳐다보며 한심스럽다는 표정들을 지었다.
* * *
신마성의 은밀한 곳.
그곳에서 혁련천후는 홀로 수련을 하고 있었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구릿빛 육신이 온갖 흉터로 가득했다.
“후욱!”
챙그렁!
검을 놓은 혁련천후는 차디찬 냉수를 마셔 뜨거운 육신을 다스렸다. 그가 있는 곳은 주변이 암벽으로 둘러싸인 깊숙한 동굴이었다.
장원의 뒤쪽 산에 위치한 이곳은 진천의 환술과 사공진무의 재주를 엮어 금역과 최대한 비슷한 환경을 조성해 놓은 상태였다.
공기의 온도부터 공기의 흐름, 공기의 압력까지도 완벽하게 금역과 같은 환경으로 만들어 놓은 까닭에 수련을 하기에는 최적의 장소라 할 수 있었다. 덕분에 수련의 성과도 무척이나 빨랐다.
물론 천살강기와 구룡삼세를 완벽한 경지로 이끌려는 수련이었다.
혁련천후는 천을 들어 얼굴을 닦으려다가 입구에서 전해지는 기척을 느끼고는 슬쩍 미간을 찡그렸다.
“어머!”
동굴의 입구에서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혁련천후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목소리의 임자가 누군지 알기 때문이다.
“쳇! 사람이 왔으면 최소한 본 척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에요?”
영호수란이었다.
양손에 향긋한 향기를 발산하는 요리를 들고 들어섰다.
혁련천후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날름거린 그녀는 적당한 너비의 암석 위에 요리를 내려놓았다.
예전의 밝음을 찾은 그녀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흥! 제가 오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거든요. 언니가 이거 갖다 드리래요. 진무님이 직접 제조하신 영단이 들어갔으니 얼른 드시래요.”
쇠고기를 얇게 저며서 만든 요리였다.
이건 홍무의 주특기 요리다. 진무가 그 안에 특별히 제조한 영단을 넣었다면 어지간한 천하영단에 못지않은 효과를 낼 것이 분명했다.
“수련은 열심히 하고 있느냐.”
요리를 한 점 입으로 가져간 혁련천후가 덤덤한 어조로 물었다.
그것만으로도 영호수란의 얼굴은 햇살을 받은 꽃처럼 밝아졌다. 그녀는 재빨리 혁련천후의 옆에 찰싹 붙어 앉으며 입을 놀렸다.
“저번에 제게 심어 준 내공을 제 것으로 만드는 중이에요. 그런데 그게 참 쉽지가 않아요. 합쳐질 것 같다가도 순식간에 흩어지기를 반복하니 도리가 없네요. 어쩌면 좋죠?”
혁련천후가 그녀의 얼굴을 보더니 느닷없이 손을 잡아갔다.
움찔거린 영호수란은 피하지 않고서 손을 맡겼다. 목덜미까지 슬쩍 붉어진 모습이 꽤나 고혹적이다.
‘십전무제의 심법이라 꽤나 힘들겠군.’
맥문을 쥐고서 영호수란의 기운을 살핀 그는 자신의 내공과 따로 노는 한 덩어리의 기운을 느꼈다.
영호가문의 독문심법이야 천하가 인정하는 절예이다. 이십 년이 넘게 연마한 독특한 가문의 심법이 성질이 다른 기운과 한데 섞이기란 힘든 것이다.
“빨리 흡수하는 방법이 있긴 한데…….”
“어머! 그게 뭐예요? 얼른 가르쳐 주세요. 예?”
아이처럼 보채는 영호수란. 가까이서 새근거리는 숨결이 얼굴에 닿자 혁련천후는 슬쩍 얼굴을 뒤로했다. 방법을 떠올리자 순간 난감했다.
그는 괜히 말을 꺼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방법은 추궁과혈로 전신의 혈맥을 확장시키고 적당한 기운을 불어넣어 두 기운을 융합시키면 그것으로 끝이다.
물론 시전자의 내공이 영호수란보다 적어도 배 이상은 강해야 가능한 것인데…….
“가르쳐 주기 싫은 거죠?”
영호수란의 얼굴이 이내 시무룩하게 변했다.
“나중에 가르쳐 주지.”
“거봐. 가르쳐 주기 싫어서 이러는 거죠.”
“아니라니까.”
“쳇! 됐어요. 그냥 이대로 싸우다가 칼 맞고 죽어 버릴래요.”
“…….”
찬바람을 일으키며 돌아가는 영호수란. 혁련천후는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뇌리에 지난날 광동에서의 일이 스쳐 지나갔다.
영호수란을 치료할 때 그녀의 나신을 숨김없이 모조리 본 그였다. 새하얀 피부와 봉긋 솟아오른 가슴…….
순간 묘한 감정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생겨나며 머리를 뜨겁게 달궜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미쳤군.”
팍!
그의 육신을 천살강기가 둘렀다. 그러고는 이내 구룡삼세가 뿜어내는 기운들이 동굴 안에 난무하기 시작하며 수련이 재개되었다.
* * *
신마성을 빠져나온 단리중보 일행은 두 개 조로 나뉘어 남쪽을 향했다.
사실 그들이 신마성에 원했던 것은 전투력의 지원이 아니었다. 남쪽으로 가는 길에 신마성이 있어서 그냥 들른 것이다. 당대 천하를 울린 그들이 어느 정도인지, 신마성주라는 자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겸사겸사 들렀던 것뿐이고 그들이 도와주겠다며 나와도 자존심 때문에 거절을 할 마음까지 먹고 있었다.
한데 막상 홀대를 당하니 정도맹에서보다 더 한 불쾌감을 느꼈다.
진승이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무더기로 이동하면 군의 제재를 받을 수도 있으니 여기서부터는 여러 조로 나누어 이동을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알겠네.”
모두는 빠른 시간에 조를 다섯 개로 편성했다. 각 조에 고수를 한 명씩 배치해서 인솔을 하게 했고 각각 적당한 거리와 시간을 두고서 남쪽을 향해 움직였다.
정도맹의 지원을 받지는 못했지만 모두는 단호한 결기로 무장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공을 세워 영웅이 되겠다는 허황된 공명심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자신감도 넘쳤다. 사실 지난날 용성에게 몰살을 당했던 동료들은 용성의 전 병력과 전면전을 벌였던 것이고 자신들은 산개해서 이동하는 적의 일지군을 노리고 있었기에 충분히 공을 세울 수 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진승이 스무 명의 고수들을 인솔하여 가장 선두를 맡았다.
일각의 시간차를 두고 출발한 그들은 가장 먼저 백어산을 넘어섰다.
아직은 용성의 고수들이 섬서성까지는 들어오지 못했을 거라 여기고 있었기에 주변 경계도 대충 하는 데 그쳤다.
그렇게 얼마를 더 이동했을까.
진승과 그의 조원들은 한 협곡의 초입에서 이동을 멈춰야 했다.
바위 위에 한 노인이 그들을 보며 우뚝 서 있었다. 전신이 은은한 녹광으로 감싸인 노인은 팔짱을 하고서 오만한 빛으로 진승과 그 일행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분위기가 예사롭지가 않자 진승이 숨을 고르고는 외쳤다.
“우리는 정도맹의 고수들, 신분을 밝히시오!”
노인은 대답이 없었다. 칙칙한 계곡의 습기와 맞물려 노인의 전신에서 뿜어지는 녹광이 알 수 없는 섬뜩함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노인이 말없이 자신들만을 쳐다보자 진승의 미간에 주름이 생겨났다. 그가 앞으로 성큼 걸어 나가며 다시 외치려고 할 때 노인이 대답했다.
“지옥에서 왔다.”
“……뭐?”
“미쳐도 단단히 미친 늙은이구나! 썩 비켜서지 못할까!”
진승이 발끈하고 대답하자 노인이 슬쩍 몸을 움직였다. 순간 모든 이들이 입을 벌리고 눈을 크게 했다. 슬쩍 몸을 움직였다고 싶은 순간 노인은 자신들의 코앞에 나타나 있었다.
진정 놀랄 만한 신법이었다.
“새롭게 태어난 뒤라 내 힘이 어느 정도인지 제대로 파악이 안 되던 터였는데. 네놈들을 제물로 삼아 시험을 해 봐야겠다.”
노인이 대뜸 두 손을 슬쩍 휘둘렀다.
그러자 녹연이 피어오르더니 순식간에 바람을 타고 진승과 조원들을 휩쓸었다.
“쳐라!”
뭔가 심상찮음을 깨달은 진승이 검을 뽑아 들며 소리쳤다. 하지만 노인은 엄청난 속도로 본래 서 있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커헉!”
“크윽! 도, 독이다!”
갑자기 전부가 목을 움켜쥐며 휘청거렸다.
크게 놀란 진승이 고수들을 돌아봤다.
목을 움켜쥐고 비틀거리던 스무 명의 고수들이 피를 뿜어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네 이놈! 이게 뭣 하는 짓이냐!”
팟!
“후후후. 네놈도 곧 지옥으로 가게 될 게야.”
노인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진승의 얼굴이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했다.
제법 고강한 내공을 지녔던 그였지만 서서히 심장을 파고드는 독의 기운을 막아 낼 순 없었다.
“커억!”
울컥 선혈을 토해 낸 그는 불신의 빛이 역력한 눈으로 뒤를 돌아봤다.
‘엄청난 독공이다. 크윽!’
진승은 순간 노인의 존재를 후발대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피가 역류하고 있었다.
몸속이 끓는 물을 퍼부은 것처럼 극심한 고통까지 올라왔다.
“크아악!”
한 줄기 비명과 함께 앞으로 꼬꾸라진 진승은 그대로 숨이 끊어졌다. 때마침 뒤쪽에 후발대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들은 진승을 비롯한 모두가 쓰러져 있음을 발견하고는 황급히 뛰어왔다.
“이보게!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단리중보가 진승을 잡아 흔들었지만 이미 진승은 숨이 끊어진 뒤였다.
그때 누군가 외쳤다.
“독에 당한 것 같습니다!”
“뭣이라! 독!”
단리중보가 벌떡 일어서서는 죽은 자들을 빠르게 살폈다.
어떤 독인지는 모르나 독 때문에 죽은 것은 확실해 보였다. 단리중보의 얼굴이 가는 경련을 일으켰다.
“싸우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는데…….”
그때였다.
“후후후.”
뒤쪽에서 섬뜩한 웃음이 들려오자 단리중보의 몸이 팽이처럼 뒤로 돌아갔다. 한 노인이 그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누구냐!”
“저승사자.”
“……뭐라?”
“지옥에서 왔다고 여겨라. 후후후후.”
노인의 전신에서 녹연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뒤이어 바람을 타고 단리중보와 다른 자들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제9장 무당의 참회
마교주 뇌어양은 장원의 뒤쪽 산에서 망중한을 즐기고 있었다.
탁 트인 전경과 초가을의 시원한 산들바람은 그의 심중에 가득했던 고뇌를 잠시나마 잊어 주게 만들었다.
그의 뒤에 시립한 장용백 역시 한눈에 들어오는 섬서의 전경을 보며 모처럼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이런 게 평화라는 것일까…….”
“모처럼 안색이 좋아 보이십니다.”
“그렇게 보였느냐. 허허허.”
장용백이 표정을 고치고는 물었다.
“신강에 흩어져 있을 아이들을 불러모아야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