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
<귀환무사 147화>
순간, 일곱의 전신에서 한기가 뿜어졌다. 뼈를 시릴 듯한 차가움에 남궁소미가 어깨를 움찔했다.
“이제야 좀 살 것 같군.”
“강물에 씻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은데.”
남궁소미는 속으로 크게 놀랐다.
‘더위를 다스리려고 이런 기운을…….’
모두는 더위를 식히려고 음공(陰功)을 시전한 것이다. 그런데 그 정도가 놀라울 정도로 대단했다. 그녀는 새삼 이들의 무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배고프다. 밥 먹으러 가자.”
“술은 좀 남아 있으려나.”
왕전이 영호수란을 보며 다소 애절한 눈빛으로 물었다.
“금존청은 좀 남아 있냐?”
“흠! 열 병 정도?”
“세 병만 적선해라. 명색이 호위 무사가 아니냐.”
“흠! 좋아요. 세 병만 적선하죠. 얼른가요.”
영호수란이 평소보다 더 친근하게 나오자 왕전 등은 다시 한 번 눈이 휘둥그레졌다.
북궁천소가 남궁소미에게 말을 건넸다.
“같이 가지.”
“감사합니다.”
남궁소미는 결코 빼지 않았다. 영호수란이 그녀를 슬쩍 노려보고는 식당을 향해 걸음을 놓았다.
모두가 식당으로 걸음을 놓았다. 연기가 무럭무럭 오르는 식당 주변은 시장기를 자극하는 구수한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이미 상당한 인원이 들어선 신마성은 여느 문파에 못지않은 틀이 잡혀가고 있었는데, 전문 숙수들도 이미 여럿 구해 놓은 상태였다.
주변을 돌아보며 구경하던 남궁소미가 연신 눈을 반짝거렸다.
‘대단해. 이처럼 짧은 시간에 이 정도의 발전을 이루다니.’
전반적인 규모는 어지간한 구대문파에 못지않았다. 그러나 그 힘은 구대문파의 두세 개를 합친 것과 비등할 정도라 그녀는 생각했다.
물론 그녀의 생각이다.
식당을 들어서자 제법 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마교의 고수들과, 청룡단원들, 그리고 장원의 일반 민초들이 각기 모여 한참 식사에 열중이었다.
그들이 들어서자 청룡단원들이 벌떡 일어섰다. 담대소천이 손으로 앉으라는 시늉을 하자 그제야 그들은 앉아서 식사를 재개했다.
그때 마교의 고수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누군가가 일서나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장로 구지겸이었다. 양손에 술병을 든 그는 꽤나 밝은 표정이다. 몇 번의 치열한 전투를 함께 치르면서 상당한 교감을 나눈 터라, 꽤 친숙해져 있었다.
“그러다가 신마성이 천하제일이 되는 것 아니오?”
그가 술병을 내밀며 웃었다.
조윤이 말을 받았다.
“함께하신다면 언제든지 쌍수를 들어 환영합니다. 하하!”
“흐흐! 거 좋지!”
북궁천소가 거들었다. 구지겸이 술을 털어 넣고는 껄껄 웃었다.
“내가 교주님을 한번 졸라 보겠소. 그나저나 이거 매일 밥만 축내서 미안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구려. 이거 밥값을 해야 속이 편할 터인데…….”
“밥값이야 사련과의 전투에서 넘칠 정도로 받았으니 개념치 마십시오.”
“아니오. 놈들이야 전부터 손을 봐주고 싶었다오. 덕분에 제대로 손을 봐줬으니 오히려 우리가 고마울 따름이오. 사실 교주와 그 부분에 대해서 의논을 했었소. 신세를 지고 있으니 뭔가 갚아야지 않나 싶어서 말이오. 해서 나온 결론이 화산의 무사들의 수련을 우리가 맡겠소. 뭐, 마도적인 것 말고 정도에 적합한 검법을 익힌 고수들이 몇 있으니 꽤 도움이 될 것이오.”
모두가 내심 크게 놀랐다.
특정한 경지를 넘어선 고수들은 여간해선 자신의 무공을 타인에게 전수하지 않는다. 그것은 정과 마를 막론하고 대부분이 그랬다.
그런데 마교가 스스로 화산의 수련을 자청하고 나섰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주공께 말씀드려 곧 확답을 드리겠습니다.”
조윤이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전했다.
“누가 교관이 되는 것이오?”
정중한 조윤과는 달리 북궁천소가 거칠게 물었다. 그 성정을 이미 알고 있는 구지겸은 개의치 않는 표정이다.
“저분이 맡을 것이오.”
구지겸이 눈빛으로 누군가를 가리켰다. 모두의 얼굴이 조금은 놀란 빛으로 변했다.
그가 지목한 인물은 바로 천마사로의 검노였다. 남궁소미는 이들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를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그녀는 지금 한쪽에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마교의 고수들임은 알았지만 그 신분까지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마교가 화산파의 제자들을 가르친다니…….’
불과 얼마 전이라면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때 청진이 안으로 들어왔다.
“정도맹에서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정도맹에서? 누가?”
“오대세가와 그 외 중소 군파의 인물들이라 합니다. 사숙…… 아니 성주님을 뵙자고 하는데요?”
청진이 황급히 말을 돌렸다.
아직 혁련천후가 화산파의 석수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해서 신마성에서는 가급적 성주라고 부른다.
“그들이 왜 주공을 찾는 거지?”
조윤이 미간을 찌푸리며 일어섰다.
혁련천후가 없을 시, 대부분의 공적인 일은 그가 대신 맡아서 하고 있었다.
“왜 왔는지 이유는 물어보았느냐.”
“그게, 다짜고짜 성주님을 찾아서 곧장 이리로 달려오는 길입니다.”
“다짜고짜 주공을 찾아?”
“예.”
조윤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이내 청진과 함께 정문을 향했다.
* * *
단리세가의 단리중보는 강가에서 아이들처럼 멱을 감으며 소란을 떠는 청년들을 보며 혀를 찼다.
“팔자 한번 늘어졌군.”
“사련을 쓸어버렸으니 기고만장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정도맹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들이 어떻게 사련을 당해 낼 수 있었겠습니까? 어림도 없지요!”
“당연하지! 그럼에도 천하엔 이들 신마성의 이름만 드높지. 죽어 간 본 세가의 아이들과 여타 문파들의 희생 따윈 입에 담지도 않는다네. 젠장! 모든 게 맹주의 나약한 심성 때문이다. 무당의 명수진인이 구천각주에서 물러나면서부터 정도맹은 허약한 서생들의 집단처럼 변해 버렸어!”
“옳은 말씀입니다!”
단리중보의 옆에서 맞장구를 쳐 주는 인물은 광주 진가주의 동생 진승이라는 위인이었다.
세모꼴 얼굴에 염소수염을 기른 그는 생긴 것과는 달리 꽤나 거칠고 파괴적인 도법을 구사하는 고수로 알려진 인물인데, 단리중보의 비위를 맞춰 주느라 연신 눈알을 굴리기 바빴다.
“저기, 누가 나오는군요. 성주라는 자일까요?”
“당연히 성주가 직접 나와야지. 조금 떴다고 정도맹의 소속인 우리를 무시해서야 되겠나.”
“어! 소문의 신마성주와는 다른 잡니다.”
진승의 말에 단리중보가 눈을 가늘게 하고서 쳐다봤다.
차가운 얼굴에 호리호리한 몸매를 지닌 조윤의 인상착의는 흑발을 늘어뜨리고 언제나 흑색 장포를 걸친다는 신마성주 혁련천후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단리중보의 얼굴에 은은한 노기가 어렸다.
“하찮은 명성을 얻더니 오만이 하늘을 찌르는군.”
단리중보는 성주가 직접 나오지 않은 것이 불만이었다. 그는 단리세가의 장로이다.
육십을 넘어가는 나이지만 워낙 고절한 무공 탓에 고작 서른 중반 정도로 보일 정도였다. 정도맹에서도 단리세가는 꽤나 비중이 있는 세가다.
그런 곳의 장로인 자신이 왔다면 응당 성주가 직접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던 단리중보는 못마땅한 기색으로 조윤을 응시했다.
“장로님의 신분을 밝혔다면 직접 나왔을 것입니다. 너무 노여워 마십시오.”
진승이 그를 달랬다.
그러고 보니 처음 자신을 맞았던 화산의 젊은 무사가 자신의 신분을 물어보지도 않았다. 화산에 대한 지난날의 악감이 슬그머니 고개를 쳐드는 순간이었다.
‘건방진 놈들.’
그때, 조윤이 단리중보와 정도맹 고수들의 앞에 섰다.
“정도맹에서 오셨소?”
“그렇다네. 성주는 바쁘신가?”
단리중보가 조윤이 자신보다 훨씬 어려 보여 대뜸 하대로 대답하자 조윤의 눈가가 슬쩍 뒤틀렸다.
내색하지 않은 조윤이 다시 물었다.
“용건이……?”
“이보시게. 이분은 단리세가의 장로가 되시는 분이시네. 허면 응당 안으로 모셔야 할 것이 아닌가!”
진승이 조윤을 보며 나무랐다.
그 목소리가 제법 컸던 탓에 강가에서 멱을 감던 신마각의 무사들이 모두 그곳을 쳐다봤다.
마침 옷을 걸치고 있던 악승이 조윤에게로 다가왔다.
“무슨 일입니까?”
“이분들을 안으로 모셔라.”
“누굽니까?”
“정도맹에서 오셨다는군.”
악승이 험악한 눈빛으로 단리중보 등을 쓸어내렸다.
그 태도를 오만하다 여긴 단리중보의 미간에 힘줄이 돋아났다. 그러나 그걸 가지고 뭐라 할 순 없었다.
“따라오시오.”
퉁명스럽게 한 마디 툭 던진 악승이 몸을 돌려 연무장으로 향했다. 그 태도가 오만하기 짝이 없었지만 단리중보는 한 번 더 참았다.
하지만 속내는 끓는 물처럼 부글부글 끓었다.
‘이것들이 진짜.’
* * *
백여 명에 달하는 정도맹의 고수들은 신마성이 생각 이상으로 거대한 규모를 지니고 있음에 크게 놀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허드렛일을 하는 노인들과 차를 나르는 여인들이 모두 평범한 민초들임을 알고는 단리중보의 얼굴에 조소가 어렸다.
“규모만 컸지 내실은 형편없군.”
“몇 명을 제외하면 딱히 내세울 것도 없는 곳이 아닙니까.”
“하긴…….”
대부분의 세가들이나 문파들은 마구간의 지기까지도 무공을 배운다. 오죽했으면 오대세가의 문지기는 어지간한 군소 방파의 수뇌부와 그 괘를 같이한다는 소문까지 나돌 정도였을까.
하물며 손님들을 맞는 이들이 그저 논밭을 일구고 살아가는 민초들로 보이니 조소는 더욱더 짙어졌다.
“오왕이 뭣 때문에 이곳에 몸을 담고 있는지는 몰라도 문파란 결코 소수정예만으로 유지될 수는 없지. 어쩌다 운이 좋아 사련을 잡았다만 전통의 오대세가와 구파의 명예는 절대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당연하신 말씀입니다.”
역시 진승이 맞장구를 친다.
제법 비싼 축에 드는 차가 향기로움을 뽐내며 그들의 후각을 자극했다.
대부분의 인물들이 찻잔을 들어 입으러 가져가며 음미하는 모습과는 달리 단리중보와 몇몇은 찻잔에 손을 대지도 않았다.
그들은 오로지 누군가가 어서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마침 객청의 문이 열리며 조윤이 다시 들어섰다.
단리중보의 미간에 노골적인 불만이 드러났다. 내심 성주가 나오길 기다렸던 그다.
조윤의 뒤쪽에서 어슬렁거리며 따라오는 둘을 흘긋거린 그는 짐짓 정중한 어조로 물었다.
“귀성의 성주께선 여전히 바쁘신가 보오?”
“이봐! 찾아왔으면 먼저 신분부터 밝혀야지.”
조윤의 뒤에서 거친 음성이 들려왔다.
왕전이었다. 그는 성큼 앞으로 나서며 눈을 부라렸다. 단리중보가 기가 막혀 눈이 돌아갔다.
자신에게 하대로 물어온 왕전을 노기 어린 눈으로 살피던 그는 순간 눈을 부릅떴다.
‘전왕!’
귀고리를 발견했다. 상아로 빚어 만든 그것이 전왕 단리극의 전유물임을 그 누가 모를까. 단리중보가 이번엔 조윤을 다시 살폈다.
그러나 그가 창왕임을 나타내는 그 어떤 것도 없었기에 알 방도가 없었다.
“주공은 맹주가 아니면 만나 뵐 수 없는 분이시지. 당신들이 이곳에 온 목적부터 말하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하는데.”
이번에는 왕전보다 더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북궁천소였다. 보다 못한 진승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이분은 정도맹 소속이자 단리세가의 장로 되시는 분이오. 예를 다해 맞아 주시오!”
다른 정도맹의 고수들도 곳곳에서 불만 어린 목소리를 쏟아 냈다.
조윤이 조금은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남의 집에 왔으면 먼저 신분을 밝히는 것이 중원의 예법이 아니오. 오대세가라면 더더욱 그 정도 예법은 몸에 익었을 터! 한데 귀하들은 다짜고짜 본성의 주인을 찾으니 이보다 더한 무례는 없을 것 같소만.”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일순 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진승이 애써 정중한 어조로 말하고 나섰다.
“우리는 지금 용성과의 전투에서 산화한 동료들의 복수를 하고자 남쪽으로 길을 떠나는 중이오. 귀성의 성주께 부탁할 것이 있어 들른 것이니 오해는 말아 주시오.”
조윤이 나섰다.
“주공께서는 일이 있어 나오실 수가 없소. 하니 할 말이 있거든 내게 하시오.”
단리중보는 눈앞의 조윤을 짧은 시간에 면밀히 살폈다. 전왕을 뒤에 두고 그가 나선 것으로 보면 그 역시 오왕의 하나임이 분명할 거라고 여겼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눈빛부터가 달라졌다. 표리부동의 전형적인 인물이 단리중보였다.
“귀성의 성주를 뵙지 못한다는 것이 아쉽지만 공무가 바쁘시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니 귀하께 말씀드리겠소.”
태도를 바꿔 정중하게 말을 건넨 단리중보가 한 호흡 끊고서 다시 말을 이었다.
“사해가 동도라고 했소이다. 귀성이 사련과 전투를 벌일 때, 본 세가와 정도맹의 의인들이 피를 뿌리며 함께했었소. 생색을 내는 것은 아니오. 다만 우리가 가는 길에 귀성에서도 최소한의 힘을 보탰으면 하는 것이 본인의 생각이오.”
전력을 빌려 달란 말이었다.
조윤이 여전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도맹의 뜻이오?”
“협을 행하고 악의 무리를 토벌하고자 하는 길에 맹의 뜻이면 어떻고 그렇지 않으면 어떻소. 협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강호의 동도로서 부탁하는 것이오.”
말에서 윤기가 넘쳤다.
조윤은 이런 자들의 속성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주어진 환경에서 최대한의 이익만을 얻고자 노력하는 이들은 자신과 틀어지면 적보다 더한 자들로 돌변한다.
소위 명문대파의 인물들에게서 쉽게 나타나는 속성이 단리중보에게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듯하오만…… 본 신마성은 아직 개파를 하지 않았소. 그것은 곧 정과 마, 사를 표방하지 않았음을 뜻하오. 단순히 사파인 사련과 전쟁을 벌였다고 해서 그대들, 정도맹과 한 배를 탄 정파라 생각하면 곤란하오. 또한 정도맹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니 이런 부탁은 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여기오만…….”
“이곳에 본맹의 청룡단이 당신들과 함께하는 것은 무엇이오? 지금 그대의 말은 핑계를 위한 궤변일 뿐이오.”
단리중보가 다소 목청을 높였다.
왕전이 끼어들었다.
“이봐! 우리가 그 아이들을 보내라고 한 적은 없었다. 필요하면 그 아이들을 데리고 가든가! 그리고 뭔가 잊어버린 게 있는 듯한데, 우리 오왕은 결코 정파에 속한 몸들이 아님을 간과해선 곤란해. 무슨 뜻인지 알겠지? 수틀리면 니들도 적으로 간주할 수도 있어. 어디서 달라 마라 수작질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