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무사-144화 (142/425)

# 144

<귀환무사 144화>

백리관이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혹시 사귀시는 분, 있으십니까?”

“누구? 나?”

사공진무가 양 볼을 가득 채우고서 물었다.

백리관이 고개를 저었다. 흑야를 흘긋거린 사공진무가 눈을 동그랗게 하고서 다시 물었다.

“형님이야 당연히 없지. 여자가 미치지 않고서야 저렇게 차가운 사람한테 오겠냐. 그런데 그건 왜 물어?”

“아, 아닙니다! 그냥 한번 물어봤습니다. 어! 술잔이 비었네? 제가 한잔 올리겠습니다. 헤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웃는 백리관을 보며 사공진무가 멀뚱거렸다.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흑야가 사공진무를 보며 물었다.

“넌 산악에게 가 봐야지?”

“그래야죠. 이것 다 마시고 갈게요.”

“그 영단이면 완전히 회복되기는 하는 것이냐?”

“제가 누굽니까? 모르긴 몰라도 전보다 더욱 강해지실 겁니다. 크! 역시 금존청이 최고군. 향이 죽인다니까.”

덜컥!

문이 열리며 얼굴 하나가 쑥 들어섰다.

청진이었다. 시커멓게 그을린 얼굴에서 과거의 앳된 티는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었다.

모두가 진천과의 수련 덕분이었다.

“모두 나오시랍니다.”

“주공께서 찾으시냐?”

“아닙니다. 노야께서 찾으십니다.”

“노주께서?”

사공진무가 의아한 얼굴을 하며 일어섰다.

“노주께서 우리를 왜 찾으실까요?”

“가보면 알겠지.”

마지막 술병을 비운 흑야도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금존청의 향기를 맡으며 침을 꿀꺽 삼킨 청진이 몸을 돌려 앞장섰다.

* * *

혁련강의 거처에는 다른 이들이 먼저 앉아 있었다. 물론 치료 중인 관산악은 없었다.

흑야와 사공진무가 가장 늦었다. 둘이 자리에 앉으니 조윤이 혁련강을 향해 공손히 말했다.

“다 모였습니다.”

“허허! 별것 아니니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게. 그냥 자네들과 말이라도 나눌 겸 술도 한잔 할 겸해서 불렀네.”

“허면 술상을 들이라고 하겠습니다.”

홍무가 재빨리 밖으로 나섰다. 이제 그는 누가 뭐래도 신마성 최고의 숙수였다.

혁련강이 오왕을 비롯한 모두를 보며 말했다.

“수련들은 잘되어 가고 있는가?”

“생각만큼 진도가 빠르지 않습니다. 몸이 굳어서 그런 듯합니다.”

조윤이 대답했다.

사실 모두는 수련 중이었다. 사련과의 전투를 겪은 후, 보다 더 강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해서 모두는 각자의 절기를 더욱더 완벽하게 갈고닦는 중이었다.

거기에 혁련강이 건네준 무공서까지 익히고 있었던 까닭에 누구보다 바쁜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담대소천이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솔직히 말씀을 드리자면 새로운 무공을 익히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한 것 같습니다.”

“허허! 자네들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보네. 물론 극성까지는 힘들겠지만 굳이 그렇지 못하더라도 상당한 도움은 될 것이네.”

“허면 묵련이 언제쯤 움직일 것으로 보시는지요.”

“사련의 일로 인해 정파가 하나로 똘똘 뭉치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그들도 섣불리 전면으로 나서지는 못할 걸세.”

“사련을 쓸어 냈다고 긴장할 정도의 놈들이라면 그다지 두려울 것도 없지 않습니까.”

조윤의 말에 혁련강은 고개를 저었다.

“흠…… 그건 아니지. 놈들과 싸울 때의 숫자가 중요하지. 우린 고작 열댓으로 사련을 쓰러뜨렸어. 물론 정도맹의 도움이 있었다지만 그들도 그 부분을 절대 간과하지 못할 게야. 우리에게 숨겨둔 전력이 있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면 이번 사련과의 싸움은 꽤나 많은 시간을 벌어 줄지도 모를 일이네.”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혁련강이 말을 이었다.

“자네들은 당분간 수련에만 몰두하는 것이 좋겠네. 가급적 강호의 일에 관여하지 말고 말일세.”

왕전이 물었다.

“저희들이 만약 극성에 이르게 된다면 주공처럼 생강시 정도는 한칼에 베어 버릴 수 있습니까?”

“아마도, 하지만 그것과는 비교되지 않는 엄청난 존재가 바로 철갑신마의 진경을 익힌 자들이라네. 그들의 견고함은 생강시보다 훨씬 더할 것이네.”

모두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혁련강이 말을 이었다.

“마교가 상대했던 자들은 분명 극성에 이르지 않은 자들이었을 테지. 극성에 이른 자라면 천마사로 전체가 덤벼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옳을 테니까. 만약 자네들이 내가 전해 준 것을 익히지 못한다면 다섯이 합공을 해야만 간신히 두 명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네.”

놀라운 말이었다.

오왕 전체의 합공을 요하는 고수라니. 누가 들었다면 혁련강을 미쳤다고 할 테지만 정작 본인들은 심각하게 그것을 받아들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혁련강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어야 했다.

사실 그들도 혈마와 광마, 그리고 철갑신마의 전설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다.

그들이 강호를 멸망 일보 직전까지 몰아갔던 것까지도 말이다.

다만 그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는 없었다. 보지 않았으니 직접 비교해 볼 방도가 없었던 까닭이다.

“더 큰 경우를 대비해서 용성과 빙궁의 무리들이 소란을 일으켜도 그대들은 이곳에서 한 걸음도 나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게. 수련만이 천하를 구하는 길임을 명심하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네.”

“……알겠습니다.”

모두가 무거운 기색으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지간해선 기색이 바뀌지 않는 북궁천소와 왕전조차도 표정이 꽤나 심각하게 굳어져 있었다.

잠시 후, 홍무가 술과 요리를 들고 들어오자 분위기가 다소 누그러졌다.

* * *

중원의 모처.

칙칙한 기운이 무겁게 깔려 있는 대전에 핏빛 털로 치장된 큼지막한 태사의에 몸을 묻은 적포인이 있었다.

혈광이 은은히 번들거리는 눈으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 자를 내려다보는 그에게서 태산을 압도할 듯한 기도가 뿜어졌다.

“분명 그곳의 기운이 확실하단 말이지?”

낮게 깔린 음성은 인간의 감정이라고는 하나 담겨 있지 않았다.

머리를 조아린 자가 대답했다.

“신마성주라는 자 역시 그곳의 인물로 추정됩니다. 같은 성씨를 쓰고 있어서 아이들을 보냈는데 하나같이 놈에게 모조리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중 하나의 시신에서 혈마의 아수라진경에 들어 있는 제뇌심공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제뇌심공이 말이냐.”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놈이 그것을 이용해 아이들로부터 정보를 빼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놈들에게 우리의 정보가 이미 흘러들어 갔다고 봐야겠군.”

그저 담담히 중얼거린 말에도 머리를 조아린 자의 눈빛이 급격히 흔들렸다. 이미 그의 등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하지만 힘주어 말했다.

“명을 내려 주십시오!”

“놈들을 처치하자는 말이냐?”

“천왕의 위대한 앞길에 방해가 될 자들이니 사전에 제거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적포인, 천왕이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서둘러서 좋을 것은 없다. 혁련가의 놈들은 절대 가볍게 볼 놈들이 아니다. 선조들부터 이어져온 악연의 고리를 끊어내고 싶은 심정이야 불길처럼 뜨겁다만 대업을 위해서는 보다 신중하게 움직여야 한다. 본좌의 마공이 극성에 이르기 전까지는 절대 그들을 자극하지 마라. 그리고 제뇌심공을 통해 정보를 파악했다면 도처에서 활동하는 본련의 아이들이 위험한 지경에 처할 수도 있다. 하니 모조리 불러들이고 당분간 모든 활동을 중단한다.”

“존명!”

천왕이 수염을 쓰다듬고는 다른 것을 물었다.

“용성과 빙궁의 무리들은 어디까지 들어섰더냐?”

“아직 중심부까지 들어서려면 꽤 시간이 걸릴 듯 보입니다. 정보를 입수한 정도맹이 곳곳에 감시망을 두고서 철저하게 경계하는 탓에 이동 속도가 생각보다 현저히 느려졌습니다. 한 무리로 이동했다면 부수면서 전진할 수도 있었겠지만 전력을 나누는 바람에…….”

천왕의 깊고 무겁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일순 섬뜩한 혈광을 번뜩였다.

그러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차후, 어떻게 해야 할지는 네가 알리라 믿는다. 본좌는 지금부터 마지막 연공에 들 것이다. 그동안 완벽하게 준비를 마쳐 놓아야 할 것이다. 연공에서 깨어나면 곧장 움직일 수 있게 말이지. 알겠느냐?”

“믿어 주십시오!”

우렁찬 대답에도 천왕은 더 이상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머리를 조아렸던 자가 뒷걸음으로 대전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천왕이 슬쩍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모든 것이 순리대로 진행이 되어 가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놈들이 나타나 발목을 잡으려 하다니…….”

싸아아!

대전에 찬바람이 몰아쳤다.

그 기운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태사의를 감싼 짐승의 털에 하얀 서리가 내려앉았다.

“그렇다고 해서 바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잠깐 불었다가 사라지는 미풍에 불과할 뿐이지. 후후후.”

대전의 문이 열리며 잠깐 스며든 빛에 적포인의 손가락에 끼어진 반지가 강렬한 반사광을 피워 냈다. 굵직한 황금의 가운데에 핏빛 보석을 박아 넣은 그것은 절대 그가 이곳에 있어선 안 될 인물임을 뜻하는 것이었다.

* * *

앳된 청년 두 명이 신마성의 정문을 기웃거렸다.

사내라고 보기엔 다소 연약한 그들은 대단히 준수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멈칫멈칫하면서 신마성의 정문을 향하더니 서로를 돌아보며 눈이 동그래졌다.

“정문을 지키는 무사들이 없다니, 여기가 신마성이 맞아?”

“틀림없이 신마성이 맞는데…….”

“그런데 과연 우리를 받아 줄까? 전에 부탁했었던 일도 들어주지 않았잖아.”

“그래도 한번 청은 드려 봐야지.”

“그냥 가자, 누나.”

“여기까지 와 놓고 어떻게 그냥 가.”

다소 어려 보이는 청년이 다른 청년에게 말했다. 그런데 누나라니? 그로보다 한 청년은 남장 여인임이 분명했다.

그때였다.

“무슨 일이시오?”

굵직한 목소리가 그들의 뒤쪽에서 들려왔다.

화들짝 놀란 둘이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양손에 뭔가를 잔뜩 들은 청년이 자신들을 쳐다보며 서 있었다.

시커먼 얼굴에 강인한 어깨가 인상적인 그 청년은 바로 청진이었다. 고된 수련 때문에 두 눈과 간간이 드러나는 치아를 제외하고는 죄다 흙빛이었다.

청진은 성문을 기웃거리는 둘을 보며 재차 물었다.

“이곳에 볼일이 있는 분들이시오?”

“아, 예!”

“무슨 일인지 내게 말해 보시오.”

잠시 머뭇거리던 청년이 이내 말문을 열었다.

“저희는 산동 송가장의 사람들입니다. 이곳에 찾아 뵐 분들이 있어서…….”

“누구를 찾으시오?”

“그, 그게…….”

송가장의 장녀, 송영은 대답하지 못했다.

일순 머뭇거리는 그녀와 어린 소년을 청진은 의아한 빛으로 쳐다봤다. 그때 송영이 다시 말했다.

“저희는 오왕과 잠깐 연을 맺은 적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분들을 뵙고자 찾아왔습니다.”

“……진짜요?”

“예. 진짭니다.”

청진은 가볍게 놀랐다.

그의 눈에는 그저 평범한 무사처럼 보이는 이들이 오왕과 연을 맺었다니. 청진은 잠시 둘을 이리저리 살펴보고는 성큼 걸음을 놓았다.

“따라오시오.”

송영과 그녀의 동생은 주변을 둘러보며 청진의 뒤를 따랐다.

* * *

‘응!’

막 수련을 끝내고 잠시 휴식을 취하던 왕전이 정문을 쳐다보다가 눈이 동그래졌다. 청진을 따라 들어서는 송영을 본 것이었다.

마침, 담대소천도 그곳을 돌아보더니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둘이 서로를 쳐다보더니 살짝 당황스러운 기색을 비쳤다.

“이런 실수가…… 저 아이들을 잊고 있었군.”

“그러게 말이다. 원망이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한데 어쩐 일로 여길 찾아왔을까?”

그때 흑야가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그럴 일이 있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일인데.”

“몰라도 된다,네놈은.”

흑야가 왕전을 죽일 듯 노려볼 때, 청진이 다가오며 환하게 웃었다.

“부탁하신 것들을 전부 다 사 왔습니다. 그리고 사부님들! 이 공자들이 사부님들을 찾는데요?”

송영과 그녀의 동생 송효는 왕전 등을 보자마자 넙죽 머리를 조아렸다.

“오랜만이군.”

왕전이 머리를 긁적이며 인사를 받았다. 표정은 그들이 부탁한 것을 지금껏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에 대한 미안함이 가득했다.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강녕까지는 아니더라도 대충 잘 살고는 있었다.”

송영은 더 말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담대소천이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전에 그자의 일은 어떻게 되었느냐.”

역시 미안함이 가득했다. 송영이 얼굴을 붉히며 머리띠를 풀었다. 그러자 치렁치렁한 흑발이 쏟아지며 향긋한 냄새가 주변을 진동했다.

청진이 눈을 동그랗게 했다. 설마 송영이 여자인 줄 몰랐던 까닭이다.

“그게, 더 이상 저희를 괴롭히지는 않습니다만, 문제가…….”

“문제?”

“사실은 제가 그자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저 아이가 화산의 제자로 입문하게 되었다고…….”

“…….”

가볍게 놀란 모두가 이내 피식 웃었다.

그 말만으로 대충은 짐작할 수 있었다.

화산은 얼마 전의 화산이 아니다. 신마성의 보호를 받는 그들을 무시할 문파는 천하에 없었다.

그런 화산에 제자로 입문한다고 했으니 괴롭히던 작자가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은 다음에야 송가장을 괴롭힐 순 없을 것이다.

좀처럼 크게 웃지 않는 담대소천이 환하게 웃었다.

“잘했다. 사실 그간 일이 많아 너희들을 깜빡했던 것이 무척이나 마음에 쓰였는데 네 거짓말이 우리를 구했구나.”

“그런 거짓말은 언제든지 해도 괜찮다. 여긴 그럼 화산으로 가는 길에 들른 것이냐?”

“아닙니다. 염치없이 부탁드릴 게 있어서…….”

송영이 목까지 붉어졌다.

그 옆에서 조금은 겁을 먹은 표정을 지은 채 머뭇거리는 송효를 북궁천소가 흘긋거렸다. 그는 송효의 위아래를 살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말해 보거라. 부탁이 무엇인지…….”

담대소천의 물음에 송효를 힐끗거린 송영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는 말했다.

“제 동생을 받아 주십시오. 염치없는 부탁인 줄은 알지만 꼭 그렇게 해 주시면 이 은혜,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화산에 말이냐?”

“화산이든, 신마성이든 어디든 좋습니다. 받아 주시기만 한다면 제가 종이라도 될 터이니…… 제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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